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말이다 보니 바빠 당초 목표보다 연재가 느려지고 있지만, 꾸준히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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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의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몇 분 더 이어졌다.
나는 여러번, 끼어들어 강이훈을 도울까 했지만 이따금씩 마유미와 눈이 마주칠 때면 뱀 앞의 개구리처럼 몸이 꽁꽁 얼어붙어 그만 두었다.
마치, 마유미가 타오르는 듯한 루비색 눈빛으로 내게 이렇게 경고하는 것 같았다.
'방해하지마.'
나는 이것이 마유미의 타고난 카리스마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것은 일국을 대표하는 자의 품격, 좌중을 압도하는 선동가의 연설, 대군을 지휘하는 대장군의 지휘 같은 것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뭔가였다.
뭐랄까, 굳이 콕 집어 표현하자면... 포식자의 그것.
다른 표현을 떠올려봤지만, 피식자를 옭아매는 포식자의 그것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왜 그런 것을 이런 유치하고, 사소한 상황에 쓰는 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런 카리스마가 실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여신같은 마유미의 외모에 더해지니 나는 정말로 그녀가 사람같지 않게 느껴졌다.
재밌게도 내게 마유미는 동전의 양면처럼, 때에 따라 눈부신 불꽃의 여신처럼 보이기도 했고, 유희를 즐기는 아름다운 악마처럼 보이기도 했다.
확실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잠자코 이 작은 소란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당하기만 하는 강이훈을 물끄러미 보면서 생각했다.
과거 내 기억 속의, 누구보다 침착하고 평정심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렸던 오컬트 씹덕은 이제 안녕이다.
누구보다 비범해보이는 여자 옆에 흔한 오컬트 씹덕 필부가 마침내 항복을 선언했다.
"유잼노죄, 노잼유죄! 재밌어 지도록 노력할테니까! 그만, 제발 그만! 후배님, 오늘은 내 친구도 왔는데 이만하고 봐주면 안 될까?"
강이훈이 마유미를 향해 두 손을 들어보였다. 어쩐지 어깨를 부르르 떨고 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 이겠지?
"좋아요. 오늘은 이만하고 봐 주도록 하죠."
강이훈에게 하는 말이 분명한데, 어쩐지 마유미의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마유미가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오한이 들었다.
강이훈이 떨었던 게 기분 탓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
계속해서 마유미와 눈을 마주치고 있기가 힘들어져 강이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도움이 필요하다고?"
"그래, 주변에 오컬트 전..."
순간 느껴지는 강렬한 기시감에 멈칫했다.
이거 몇 분전에 했던 대화다.
설마 도돌이표 마냥 같은 전개가 반복되는 클래식 클리셰는 아니겠지?
"...문가가 너 뿐이라서."
나는 마유미의 눈치를 보며 간신히 말을 마쳤다.
다행히도 그녀는 지루하게 같은 전개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는 지 손깍지를 무릎에 모은 채 얌전히 앉아있었다.
그나저나 미소지은 얼굴로 왜 이렇게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까? 진짜 얼굴에 구멍이 날 것 같다.
진짜 나지는 않겠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그만큼 강렬한 시선이었다.
"하긴 오컬트가 워낙... 마이너하고... 깊게 파 사람은 드물지."
말 하면서 슬쩍슬쩍 마유미 눈치를 보는 게, 아무래도 강이훈도 나랑 같은 생각이 든 모양이다.
다행히 이번에도 마유미는 가만히 미소 짓고만 있었다.
나는 혹시나 또 대화가 엉망진창 레파토리에 빠질까 싶어 본론보다는 곁가지를 건드리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부원은 몇 명이야?"
"글쎄 6명 쯤?"
생각보다 부원 수가 얼마 안 됐다.
인정하긴 싫지만, 강이훈은 씹덕이라는 것만 빼면 인물은 훤한 편이다.
거기에 마유미는... 뭐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을 보고 가입한, 오컬트의 오자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부원들이 북적북적 많을 줄 알았다.
"뭐 가입하고 싶다고 다 시켜주는 건 아니기도 하고, 또 알아서 나가기도 해서 말이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다 표정에 씌여있었는 지, 강이훈이 웃으며 말했다.
"알아서 나가? 왜?"
딱히 마유미에 대해 연정을 품을 생각은 없지만, 이런 미모라면 그저 보기 위해서라도 남을만한 남자들은 넘쳐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의아했다.
"그게...뭐 무서워서 나가는 거지."
"무섭다고?"
"뭐 대개 두 부류야. 마유미가 무섭거나."
이건 인정. 나는 살짝 마유미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유미는 강이훈이 뭐라고 떠들어도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는데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동아리 활동이 무섭거나... 이를 테면 귀신이나 유령같은걸 만나면 넌 어떨 것 같아?"
음. 이건 인정...은 바로 못하겠다.
솔직히 하윤이가 아니었더라면, 믿지 않고 웃어 넘겼을 얘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애초에 강이훈을 만나려고 했던 이유가 이런 불가해한 존재들에 대해 듣고 싶어서 였다.
곁가지를 건드렸는데 원치 않게 쑥 본론이자, 목적이 딸려나와 버렸다.
"글쎄, 무서우려나? 신기할 것 같기도 하고."
대답하는데 하윤이의 예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맑고 투명한 미소, 익살스러운 웃음 소리, 포근하고 시원한 손의 감각 같은 것들도 떠올랐다.
"진지하게 들어줄래?"
이런, 나도 모르게 하윤이 생각에 웃었나 보다.
아무래도 강이훈은 오컬트에 대한 나의 진정성이 의심스러웠는 지 진지한 태도로 내게 핀잔을 줬다.
대화에서 마유미가 사라지니, 내가 알던 과거의 강이훈이 얼핏 보였다. 오 강이훈이 돌아왔구나?
"미안, 진지하게 듣고 있었어. 웃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야."
나는 재빨리 머리속에서 하윤이를 슥슥 덜어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하윤이의 실루엣 마저 덜어내고
진지한 표정으로 강이훈을 바라봤다.
솔직히 지금 내게 귀신이나 유령을 믿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다.
지금도 믿기지 않는 게 내 마음이지만, 과학이나 말로 설명될 수 없는 일, 하윤이를 겪은 것도 현실이었다.
"좋아. 진지하군. 계속 하자면, 보통 사람들은 그런 오컬트한 존재들을 무서워 해."
아무래도 그렇겠지.
정상적인 인지력이나 이해력으로는 닿을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해."
대충 내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나는 강이훈의 말에 동의했다.
"확실히 그렇지."
그러고보면 나도 하윤이 때문에 잠깐 감정이 격해지고, 초조했던 적이 있다.
하윤이가 꿈에서 나를 찾아왔던 그 날이었다.
알지 못하는 뭔가를 대면한다는 것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누군가에게는 무서울만 했다.
"어쨌거나 믿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동아리는 오컬트 복이 있어서 꽤나 그런 존재들을 잘 만나고, 찾아내."
"그리고 대개 대추 밭에 마음가 있던 신입 부원들이 그런 걸 보면 겁에 질려서 도망가고?"
"대충 그렇지. 뭐 실체를 만나는 게 아니라 폴터가이스트* 현상만 겪어도 혼비백산 하던 걸."
*이유없이 이상한 소리나 비명이 들리거나, 물체가 스스로 움직이거나 파괴되는 현상
강이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보였다.
폴터가이트를 처음 겪는 신입 부원들이 혼비백산하며, 도망가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게 틀림 없었다.
이 녀석 빈틈없어 보이는 가면 아래 푼수기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의 음흉함도 숨겨 놓은 것 같다.
"아쉬워. 사실 대부분의 그런 존재들은 사람한테 딱히 해를 끼치지 못 하거든. '진짜' 오컬트의 재미를 느끼고 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어도
도망가버리는 꼴이라니."
진짜 오컬트라...
내가 번지수는 잘 맞추어 찾아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진짜' 오컬트 정보는 너무 적었다.
하지만, 이 씹덕, 아니 강이훈이라면 내게 중요한 것을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폴터가이스터를 어디서 겪어?"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폴터가이스터라는 현상이 그렇게 쉽게 벌어지는 현상이었나?
내 대답은 노. 나조차 내 인생에서 그런 걸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었다.
내 의문에 강이훈이 자랑스럽다는 듯,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보이며 웃었다.
"여기!"
"여기...?"
"응."
503호 오컬트 동아리실?
그 순간,
휘오오.
쿠구구.
처음에는 작게, 그리고 점차 크게 동아리실의 공기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땅이 아주 작게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툭. 툭.
가지런히 꽂이에 꽂혀있던 책들이 하나 두개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이게 바로... 폴터가이스트?
"운이 좋네. 한세건."
"뭐?"
강이훈이 낯설다는 감각이 들었다.
마치 내가 알던 예전의 강이훈이 아니야...는 아니고,
오컬트 동아리의 전대 회장쯤 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기이한 현상 덕분일까? 강이훈이 신비로워 보였다.
그러면서도 무섭고 오싹한 마음도 들었다.
늦은 오후기는 하나 해가 버젓이 떠 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도 되는 걸까?
설마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장치같은 걸로 놀래키고 나 도망가는 꼴을 보려고?
살짝 헛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나는 이미 이게 '진짜'벌어지고 있는 현상 임을 잘 알고 있었다. 육감으로.
"'진짜'! 오컬트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한세건."
강이훈이 활짝 웃으며 나를 바겼다.
마유미는... 요란한 주변에도 여전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13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