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odor Wiesengrund Adorno, Negative Dialektik (1966), S. 51.
테오도르 비젠그룬트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1966), 국역본, 100-101 쪽, 번역 수정함.
논변은 민주주의적 제스쳐를 취하지만, 관리되는 세계가 그것의 강압받는 구성원들을 어떻게 만들어 놓는지 무시한다. 그것이 완전히 성형하지 않은 이들만이 그것에 정신적으로 대적할 수 있다. 특권에 대한 비판이 특권으로 된다: 이처럼 세계의 진행은 변증법적이다. 사회적 조건들 아래서, 특히 정신적 생산력을 조종하고, 반듯하게 잘라놓고, 여러모로 불구화하는 교육조건들 아래서, 또 이미지의 빈곤이 지배적인 상황 아래서, 그리고 정신분석학이 진단은 하지만 현실적으로 전혀 바꾸어놓지 못한 유아기의 병리적 과정들 아래서, 모두가 모든 것을 파악하거나 단지 알아차리기만이라도 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허구일 것이다. 그것을 기대한다면, 경험들을 쌓을 가능성을 어쨌든 갖고 있더라도 항등성의 법칙에 의해 그 가능성을 빼앗기는 인간의 병리적 특징들에 따라 인식을 정돈할 것이다. 주관적 이성 개념의 궁극적 귀결인 일반의지의 유추에 따른 진리구성은 모두의 이름으로 모두로부터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속여 빼앗는 것이다. 정신구성상, 통용되는 규범들에 속속들이 순응하지는 않은 행운 - 주변환경과의 관계에서 대가를 종종 충분히 치러야 하는 행운 - 을 누릴 자격도 없이 누렸던 이들에게는 도덕적으로 노력하여, 자신들이 대변하는 이들 대다수가 볼 수 없거나 현실적 정의 때문에 보지 않으려는 것을, 말하자면 그들을 대리해서, 발언할 의무가 있다.
Während das Argument demokratisch sich gebärdet, ignoriert es, was die verwaltete Welt aus ihren Zwangsmitgliedern macht. Geistig können nur die dagegen an, die sie nicht ganz gemodelt hat. Kritik am Privileg wird zum Privileg: so dialektisch ist der Weltlauf. Fiktiv wäre es, zu unterstellen, unter gesellschaftlichen Bedingungen, zumal solchen der Bildung, welche die geistigen Produktivkräfte gängeln, zurechtstutzen, vielfach verkrüppeln; unter der vorwaltenden Bilderarmut und den von der Psychoanalyse diagnostizierten, keineswegs indessen real veränderten pathogenen Prozessen der frühen Kindheit könnten alle alles verstehen oder auch nur bemerken. Wurde das erwartet, so richtete man die Erkenntnis nach den pathischen Zügen einer Menschheit ein, der die Möglichkeit, Erfahrungen zu machen, durchs Gesetz der Immergleichheit ausgetrieben wird, sofern sie sie überhaupt besaß. Die Konstruktion der Wahrheit nach Analogie einer volonté de tous - äußerste Konsequenz des subjektiven Vernunftbegriffs - betröge im Namen aller diese um das, dessen sie bedürfen. An denen, die das unverdiente Glück hatten, in ihrer geistigen Zusammensetzung nicht durchaus den geltenden Normen sich anzupassen - ein Glück, das sie im Verhältnis zur Umwelt oft genug zu büßen haben -, ist es, mit moralischem Effort, stellvertretend gleichsam, auszusprechen, was die meisten, für welche sie es sagen, nicht zu sehen vermögen oder sich aus Realitätsgerechtigkeit zu sehen verbie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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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 대깨문, 태극기 부대, 메갈은 여러분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대화가 안 되는 이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자기들에게 좋은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 (자신들의 객관적 이해관심에 배치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주체적인 공부와 성찰을 통해 갖게된 것들이 아닌 믿음들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이 그런 사람인 것은 그들 자신의 탓보다는 그들이 더 깨어 있는 사람들이 되는데 필요한 기회와 자원을 그들에게 제공하지 않은 사회적 조건 탓이 더 크며 내가 조금이라도 그들보다 더 깨어있는 사람이 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좋은 운(행운)이다라고, '나는 특권을 누렸고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들 자신도 목표로 하는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이 1초라도 더 빨리 만들어지려면, 그들의 믿음이 옳고 그른 것과 사회의 향방을 결정하는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지점에서 가능한 - 물론 합법적인^^ -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들의 목소리를 막고 여러분 자신이 그들을 (그들의 객관적 이해관심을) 대리해야 한다고 믿지 않나요? 여러분과 그들 사이의 관계는 대자적 계급의식에 도달하지 못한 노동자 계급과 그 계급의식을 대변하는 레닌주의?식 전위정당 사이의 관계에 유비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리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위의 아도르노의 글을 엘리트주의적/권위주의적이라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아도르노와 여러분 사이에는 큰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아도르노 눈에는 여러분 상당수도 '그들'로 보인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