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늦어 죄송합니다.
연말 연초는 정말 바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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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터가이스트 현상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몇 번의 심호흡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니, 요란했던 동방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적이 스며들었다.
강이훈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강이훈이 왜 오컬트의 세계에 빠져들었는 지를.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녀석이 초자연적 비이성의 영역에 미쳤는 지를.
그것은 오컬트의 세계가 강이훈에게 '진짜'였기 때문이다.
오컬트의 실재(實在)를 이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이훈에게 오컬트란 완전한 허상이 아닌, 마땅히 탐구해야할 미지의 미개척지였다.
"어때?"
잔뜩 칭찬에 목마른 표정으로 강이훈이 내게 물었다.
솔직히 이런 비현실적인 현상을 몸소 겪으니 다소 놀랍긴 했다.
하지만, 단순히 폴터가이스트를 겪은 것 자체가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하윤이를 만나면서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무엇가가 있다는 걸 깨달은 상태였다.
"이거 뭐야?"
"말했잖아. 폴터가이스트. 알 수 없는 이유로 이상한 소음이 들리거나 물건이 움직이는 현상."
"내가 말하는 건... 어떻게 벌건 대낮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냐는 거야."
귀신이라던가, 유령이라던가, 아무튼 이런 괴현상이 밤에 일어난다는 것은 모두에게 알려진 당연한 상식 아닌가?
나는 이 부분에 집중했다.
"흐음. 그렇게 안 보였는데, 나름 예리한 구석이 있네요. 궁금해요?"
잠자코 있던 마유미가 불쑥 끼어들었다.
강이훈과 장난칠 때와는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는데, 표정없는 얼굴이 깍아놓은 조각상처럼 느껴졌다.
완벽하게 아름답기도 했고, 감정없이 차가워 보이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긴장되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유미 거기까지 해! 설명은 내가 하겠어."
긴장이 무색하게 강이훈이 재차 푼수기를 자랑하며 끼어들었다.
다시봐도 강이훈의 이런 모습은 적응이 안 된다.
어쨌거나 마유미는 네가 할테면 하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후배가 선배에게 하는 행동치고는 꽤 건방진 행동이지만, 건방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으레 당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유미의 허락(?)을 받은 강이훈이 신나서 말을 이었다. 이래서야 누가 선배고 후배인지 모르겠다.
"오컬트적인 현상이나 존재의 목격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밤에 많이 일어나는 것은 맞아."
아무래도 그렇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포영화만 보더라도 대부분의 귀신은 스산하고, 어두운 밤에 활동한다.
다 이유가 있어서 영화에서 조차 그런 게 아닐까?
"하지만, 너도 겪었다 시피 꼭 밤에만 일이 벌어지지도 않지. 왜냐하면, 사실 낮과 밤이 이런 현상에 있어 중요한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야."
이럴 수가, 그렇다면 무덤가에 잠든 선비가 동이 트는 덕에 귀신으로부터 살았다는 이야기는 다 뻥이었나?
사실 구전되는 전통괴담에 근거를 운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강이훈의 이야기는 실로 흥미로웠다.
"후, 이거 정말 1급 비밀인데. 그렇게 궁금해 하니 어쩔 수 없군."
강이훈이 안경을 고쳐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였다. 그 와중에도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걸 보면...
그냥 네 덕력을 자랑하고 싶은 거 아냐?
입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꾹 참았다.
"중요한 건, 홀(Hole)이야."
"홀...?"
"그래. 홀. 혹시 너 음양오행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알아?"
"자세히는 모르지만, 들어는 봤어."
뭐, 그것도 무협지 같은 걸 통해 아는 수준이지만.
"다행이네. 얘기가 편해지겠어. 세상 만물은 다 기(氣)를 가지고 있지. 사람도 마찬가지고. 남자는 양기가 강하고, 여자는 음기가 강하다 이런 말 들어봤지?"
끄덕끄덕.
물론 무협지에서다.
"그렇다고 어떤 물체가 한가지 기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야. 물체의 성격, 성향에 따라 음양이 공존하기도 하고, 거기에 수금토화목 같은 오행의 기운이 적절히 섞여있지. 그런데, 귀신같은 이면의 존재들은 오직 한 가지 기로만 이루어져 있어."
합리적으로 추론해보자면,
"음기?"
"이해가 빠르네. 맞아. 내 추측으로는, 우리 세상의 존재들은 절대 한 가지 기만 가질 수 없어. 하지만, 홀을 통해 우리 세상으로 건너온 이면의 존재들은 달라. 그들은 네가 말한 대로 음기로만 이루어져 있는 존재들이야. "
"..."
"우리 세상에 간혹 이런 일이 벌어져.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음기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한 곳에 뭉치는 거지."
"아."
그렇게 음기가 뭉쳐져서 생기는 게, 바로 홀이란 소리구나.
"대충 이해한 것 같네. 음기가 뭉치면, 그 곳에 홀이 생성되고, 그 홀은... 나도 추측일 뿐이지만, 음기로만 이루어진 이면의 존재들이 우리 세상으로 넘어올 수 있는 통로가 되는거지."
순간 등에 식은땀이 났다. 흥미롭게 듣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엄청난 얘기를 들어버렸다.
강이훈 이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는거지?
"그리고, 그 음기라는 것이 낮에도 잘 뭉쳐서 홀이 유난히 잘 생성되는 공간들도 존재하는 데 이 동방이 바로 그런 장소 중 하나지."
"벌건 대낮에 폴터가이스트 같은 드문 현상을 신입 부원이 겪을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구나."
내가 겪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와 동시에 다른 의문도 풀렸다.
왜 강이훈이 전 회장 소리를 들어먹으면서도 아직 학교에 나와 동아리 활동을 하는 지.
잦은 횟수로 홀이 열리는 이 동방이야말로 강이훈에게 있어서는 오컬트에 대한 최고의 연구실이나 다름 없었다.
떠밀려 나가기 전까지 녀석은 여길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뭐, 일반적으론 낮보단 밤에 음기가 훨씬 충만해지니 보통 밤에만 귀신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대강 덕력 자랑을 마쳤는 지, 강이훈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 생각보다 강이훈은 이 쪽 분야에 해박했다. 유령이나 귀신 같은 것의 특색이나, 확인 방법 정도나 물어볼 심산이었는데,
생각치도 못하게 엄청난 사실을 알아버렸다.
"넌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아는거야?"
"글쎄, 끈기와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고, 우수한 부원들의 협력 덕분이기도 하지."
강이훈이 말하면서 슥 마유미를 곁눈질 했다. 우수한 부원'들' 덕분인 걸 보면 마유미 뿐 아니라 다른 부원들의 도움도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여긴 단순한 대학교 오컬트 동아리가 아니라 거의 오컬트 전문가 집단 아닌가?
녀석의 협력과 조언을 잘 구한다면... 어쩌면, 하윤이 일에 대한 실마리가 풀릴 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에 살짝 심장이 두근거렸다.
"근데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나한테 말해줘도 되는거야?"
심지어 나는 동아리 부원도 아니었다. 또, 이런 사실을 친절히, 자세하게 설명해줄 정도의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복기해봐도 녀석과 나는 그저 지나가며 인사 정도나 하는 과동기였을 뿐 이었다.
의심많은 성격이 다시 도졌는 지, 나는 혹시 강이훈이 내게 뭔가를 바라고 이런 얘기를 꺼낸 게 아닐까 싶었다.
"상관없어. 하하. 어차피 보통 신입부원들은 이 얘기를 듣기도 전에 도망가던가, 아니면 들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않거든."
하긴. 들어도 무슨 괴담 정도의 취급이나 하겠지.
중요한 사실도 듣는 사람이 경청해야 의미가 있는 법이었다.
그럼 설마 이 녀석, 자기 덕력을 자랑하고 싶어서 이 사실들을 알려준 건가?
그런 것 같기도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애써 그런 기분을 털어내고, 강이훈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홀이나 이면의 존재들이란 거 위험하지 않아?"
음기가 뭉쳐져 만들어진 이면 세계의 통로인 홀, 그 홀에서 나온 음기로만 이루어진 존재들이
과연 세상에 이로운 존재들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결코 이롭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공포물들이 구전 또는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라 가정해보면, 그런 존재들은 사람에게 해를 끼쳤다.
"흐음. 역시 예리해."
대답은 강이훈이 아닌 마유미가 대신했다.
건조하게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에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보기가 힘들어 고개를 돌렸다.
"어머 쑥쓰러움에 제게서 고개를 돌린 건가요? 제게 벌써 반하면 곤란한데요."
마유미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동시에 건조한 압박감이 사라지고, 약간의 해방감이 들었다.
나는 그제야 마유미를 다시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럴 일 없으니, 걱정마..요."
강이훈의 후배기도 해서 반말을 하려다가, 선뜻 그러기는 힘든 마유미의 분위기에 존대말미를 붙였다.
"장난은 그만해 마유미."
"앗! 전 회장 친구 분도 반응이 너무 재밌을 것 같아서 그만!"
마유미가 능청스럽게 우는 척을 해보였다
뭐지? 이 이상한 기분은. 분명 여신같은 외모인데, 능청스러운 마유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껄끄러웠다.
"뭐 위험하긴 하지 보통 같으면. 그래도 우리가 보통 오컬트 동아리는 아니라서 괜찮아."
"...?"
"안전벨트가 있달까?"
위험한 게 맞다는 데, 강이훈의 표정은 평안해보였다. 정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대책이 있는 모양이다.
"얘기가 많이 돌았는데, 오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지?"
확실히 강이훈의 얘기를 듣다보니, 얘기가 많이 새긴했다.
원래는 유령 같은 것들의 특징이나 특색에 대해서나 알아볼 참 이었는데...
고민이 됐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하윤이의 얘기를 하고 조언을 구할 지, 아니면 숨길 지.
그 때였다.
덜컥.
"센빠이. 비상이다."
왠 일본 무녀복을 입은 자그마한 여자애가 동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말투는 마치 기계처럼 무뚝뚝했다.
무녀복이라니... 일본인인가? 아니면 혹시 혼혈?
"걍 코스프레야."
표정에 생각이 다 씌여있었나 보다. 강이훈이 피식 웃으며 얘기해줬다.
아 그냥 코스프레였구나... 그런데 센빠이라니... 원래라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게 마땅한 말투였지만,
무녀복 여자애의 작고 귀여운 외모와 건조한 말투가 대비되어 신기한 인상만 주었다.
강이훈은 신기하기보단 익숙한 지 평온한 표정으로 여자애에게 물었다.
"무슨 일 인데?"
"비상이다. 그런데... 낯선 손님이 있군."
다급한 표정으로 강이훈에게 얘기를 늘어놓으려던 무녀복 여자애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명백히, 내가 있어서 얘기를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음. 세건아. 미안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안 될 것 같다. 다음에 더 얘기해도 괜찮지?"
졸지에 강이훈으로부터 축객령을 받았다.
나도 껄끄럽게 드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어떤 점에선 반가운 축객령이었다.
당장 오늘이 아니어도 시간은 있었다.
"어쨌거나 오늘 얘기 아주 흥미로웠어. 또 연락해도 되지?"
"물론이지. 언제든 환영이야. 내가 시간만 된다면."
강이훈과 나는 서로 어깨를 툭 치고 작별 인사를 나눴다.
마유미와는 살갑게 작별하기가 뭐해서 가볍게 목례했다.
그리고 잠시 무녀복 여자에와 시선이 마주쳤다.
행색을 보면 영락없는 오덕 꼬맹이였다.
따지고 보면 강이훈이 아니고, 얘가 나에게 축객령을 내린 셈이다.
"꼬맹이 아니다. 안전벨트다. 잘 가라. 센빠이 친구."
순간 속으로 뜨악 했다.
독심술이라도 익혔나? 도대체 이 동아리 부원들은 어떻게 되먹은 걸까?
거기에 안전벨트라니... 강이훈이 말한 그 안전벨트가 설마 얘인가?
"으응..."
나는 차마 그것까진 묻지 못하고, 무녀복 여자애의 시선에 떠밀리 듯 동방에서 퇴장 당했다.
"꼬맹이 아니다. 마유미 내 친구다."
무녀복 여자애는 작지만 단단한 뒤 끝을 지녔는 지 동방을 빼꼼 얼굴만 내놓고, 귀가하려는 내게 말했다.
이거... 제대로 밉보인 것 같다.
14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