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연참하게 되었습니다.
(업로드 시 잘린 부분이 있어 마지막 부분을 추가하였습니다. 혹시라도 글이 올라오자마자 보신 분께서는 마지막 부분만 다시 정독 하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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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길엔 눈이 내렸다.
함박눈은 아니었지만, 진눈깨비도 아닌 것이 소복 쌓여 길 위를 하얗게 덮었다.
생각치 못한 풍경에 동장군도 한 발짝 물러난 듯이, 추운 겨울이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사박사박, 푹 쌓이지 못한 눈을 즈려 밟으며 집으로 가는 발자취를 만들어 나갔다.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발자국을 만드는 것도 무척 좋았다.
날씨가 많이 추웠지만, 내친 김에 생각도 정리할 겸 자취방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다.
사실 학교에서 자취방까지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기도 했고.
걷는 내내 뺨에 닿는 눈 알갱이들이 따뜻하게 녹아 스며들었다.
시원하면서도 포근한 감각이 하윤이와 겹쳤다.
투명하고 맑은, 그러면서도 따뜻한 눈빛. 사람 기분을 들었다 놨다하는 유쾌한 장난기. 시원하고 포근한 손길.
하윤이에 대한 생각 하나가 떠오르고, 떠올랐던 것이 가라앉으면 생각 둘이 솟아올랐다. 둘 다음엔 셋, 셋 다음엔 넷...
생각 숫자 세기를 까먹었을 쯤, 나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나는 하윤이에게 커다란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수 있을리 없다.
하윤이와는 갑작스럽고 황당한 시작이었지만, 돌이켜보면 하윤이와 보냈던 시간은 내게 처방약과 같았다.
머리 끝까지 스트레스를 채우고 있었고, 날을 세웠고, 가시가 돋혀 있었다.
그런 나를, 하윤이는 잔잔하게 스며들어와 적셔놓았다.
사실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이었나.
그러다가 하윤이가 혼자서 보내왔을 외롭고 긴 시간에도 생각이 닿았다.
나로써는 짐작만 할 뿐이다. 그 길고 긴, 두렵고 적막한 혼자만의 시간.
기다린다는 말을 했을 때, 하윤이는 무너질 듯 울먹였다.
도와주고 싶었다.
네가 무엇인 지 아직 다 알 수 없어도,
네가 알지 못하게 내게 닿아 스며들어 도움이 되었듯이,
나도 네게 도움이 되고 싶다.
또 , 궁금하기도 했다.
이 만남에는 우리가 모르는 목적이 있고, 결과도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봐야지.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았다.
생각에 잠겨 정신없이 걷다보니, 아무도 없는 길 위에 홀로 서 있었다.
하지만, 눈 도화지 위에 찍힌 다른 발자국들이 나 아닌 다른 누군가도 이 길을 지나갔음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혼자가 하윤이만큼 쓸쓸하고, 외롭지는 않았다.
하윤이가 느낄 수 있는 발자국이 되자. 그렇게 스스로 다짐했다.
*
오컬트 동방에서 있었던 일도 떠올렸다.
마지막에 예상치 못한 축객령 때문에 정작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물어보지 못했다.
하윤이에 대해 얘기해야하는 것이 영 아직도 떨떠름하지만축객령을 기껍게 받아 들였지만, 결국 얘기를 해야만 할 것이다.
강이훈, 아니 그 녀석 뿐만 아니라 마유미와 무녀복의 여자애까지 필연적으로 엮일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어쨌거나 내 주위에 그런 전문가들은 더 이상 없을테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대학교 오컬트 부원들이 아니었다.
홀(Hole)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려는 의지가 가득한 강이훈.
사람같지 않은 외모에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마유미.
거기에 무녀복 여자애까지. 뭐 안전벨트 역할에 대해서 목도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 강이훈 이상의 비범함은 갖추고 있겠지.
그렇다고 내멋대로 하윤이에 대해 떠들 생각은 없었다.
먼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서 그녀와 공유하고, 허락부터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려면 만나야겠지.
손을 뻗어 떨어지는 눈송이를 받쳤다.
나는 손 위에서 시원하게 녹아 스며드는 눈꽃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만날 수 있으려나..."
*
어느새 어둑해진 저녁이 다 되어서야 자취방에 도착했다.
나도 몰랐는데, 한 시간이 넘어서 도착했다. 꽤 천천히 걸은 모양이다.
자취방에 여전히 널부러져 있는 이불더미에 옷도 벗지 않고 몸을 던졌다.
하루 간 적지 않은 일이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편의점에 들렀고, 도중에 아라도 만났다.
두부를 산책시키다가 때 아닌 추격전을 벌이기도 했고... 오컬트 동아리 부원들도 만났지.
노곤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나도 모르게 스르륵 눈이 감겼다. 뻑뻑한 눈꺼풀에 억지로 저항할 필요는 없었다.
아직 새벽까지 여유가 있었으니까.
늦지 않게 일어나 하윤이를 기다리러 가야지.
그렇게 눈이 감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꺼풀을 뚫는 강렬한 빛이 느껴져 정신이 들었다.
헉, 설마 저녁부터 대낮까지 잠든건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
자취방이 아니었다.
낯선 세계가, 강렬한 빛의 세계가 눈 앞을 채우고 있었다.
볼이며, 허벅지를 멍이 들정도의 세기로 꼬집어 보았다.
아프지 않았다.
꿈인가...?
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열기를 뿜으며 붉으스름하게 빛나는 땅.
그 땅 위에서 다이아몬드와 같이 빛나는 바위들. 생기 넘치게 초록빛으로 넘실거리는 풀들.
그리고 빛을 발하는 그 모든 것들을 초라하게 만드는 환한 태양.
아니, 저런 걸 태양이라고 부를 수 있는건가?
이게 꿈이 아니었다면, 사람이 '저것'을 마주한다면 설사 눈을 감고 있다하더라도 실명하리라.
그래서 나는 이것이 꿈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런 걸 자각몽, 루시드 드림이라고 하지 않나?
'으얍!'
'...'
기합과 함께 땅이 솟아오르는 상상을 하며 두 손을 모아 뻗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흔히 자신의 꿈을 깨닫는 자각몽이라고 하면, 꿈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얍! 으랏챠! 같이 기합소리를 바꾸어 몇 번 더 시도해봤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나도 모르게 꿈인 걸 알면서도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뒤늦게 쪽팔림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무도 없군. 하하. 아주 어렸을 때나 했을 법한 유치한 놀음도 오랜만에 하니 유쾌한 기분도 들었다.
'아이야. 아서라. 네 꿈이 아니니라.'
어디선가 울려오는 소리에 내 마음이 봉숭아 물들 듯, 창피함이 번져왔다.
혼자가 아니었어? 나는 요란하게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안력을 집중해 요란한 빛들을 헤집어봤지만, 여전히 사람 형상을 한 무엇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뭐지?'
'...'
내가 환청을 들었는가 보다.
근데 꿈에서도 환청을 들을 수 있는건가? 하하.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보면, 자각몽이 처음은 아니었다.
일전의 불쾌하고, 무서운 꿈도 하나의 자각몽이었으니까.
'따뜻하고 좋다.'
지금 꿈꾸고 있는 세계는 너무 넓어 황량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쩐지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도 들었다.
꿈을 꿀 때 이런 곳에 올 수 있다면, 나쁘지 않겠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자각몽이지만, 기왕 배경으로 등장할 거면 어둡고 갑갑한 터널보단,
이런 곳이 훨씬 나았다.
'아이야...'
붉게 빛나는 땅의 온기를 만끽하는 중 다시 한 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굴까...? 신기한 점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이 없었다.
마치 내 뇌속에 직접 속삭이는 느낌이다.
낯선 목소리였지만, 경계심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련하게 간지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
눈에서 뭔가 투둑 떨어지는 감각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울고 있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눈물이 났다.
'피하길 바랐던... 다시... ...하기 바라느냐...?'
화난 것 같기도 했고,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며 내는 소리 같기도했다.
걱정하는 마음이 사무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어어어엉.'
누구시냐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냐고 되물으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나는 어떤 것도 묻지 못하고 그대로 마닥에 주저 앉아 펑펑 울었다.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 내가 왜 이러는 지 모르겠다. 하지만 울어야할 것 같다.
울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
마침내 눈물이 메말랐을 때, 나는 잠에서 깼다.
"흐으으..."
가끔 슬픈 꿈을 꾸면, 울면서 잠에서 깬 적이 있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들어는 봤지만, 나는 단연코 태어나서 처음이다.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울었는데, 어떤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무거운 슬픔이 눈물에 남아있었다.
나는 마저 훌쩍거리고, 눈물을 닦아냈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2시 반이었다.
몸을 늘어지게 붙잡고, 잠을 억지로라도 재우려는 자장가처럼 느껴지는 원인 모를 슬픔을 툭툭 털어냈다.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윤이를 기다려야 했다.
"하아."
간신히 몸을 일으켜 간단히 씻고 옷을 챙겨 입었다.
기왕이면, 잘 기다릴 수 있도록 장갑이며 목도리도 챙겨 제대로 추위 대비도 했다.
"요즘 내가 어떻게 되어가나..."
이상한 꿈들을 자꾸 꾸는 것도 그렇고,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그렇다.
물론 그 이상한 사람들에서 하윤이는 제외다.
"어떻게든 되겠지."
나도 놀랄 정도로 낙천적인 말을 내뱉으며,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편의점으로 향했다.
소복히 내려준 눈 덕분인지 하윤이가 벌써부터 나와있었다.
멀리서 실루엣만 보아도 나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기쁜 마음이 들어 눈 쌓인 날 강아지처럼 발걸음을 폴짝였다.
저번도 그렇고, 이번에도 안색이 좋은 걸 보면, 분명 눈이 내리는 게 하윤이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 이렇게 하나씩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자.
"하윤아!"
내가 하윤이를 불렀다.
"안녕? 아저씨? 오늘도... 걸을래요?"
그리고 하윤이가 웃었다.
나는 하윤이가 내민 손을 자연스레 붙잡으며, 그녀를 따라 환히 웃었다.
15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