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 모두 국역본 번역을 수정했습니다. 축약적이고 아리송하게 쓰는 걸로 유명한 두 양반 글치고는 다소간 독해가 잘되는, 내용적으로나 구문적으로나 평이한 편에 속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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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터 벤야민 선집 1 -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길, 2007), p. 78.
장갑
동물에 대한 인간의 혐오에서 두드러진 감정은, 동물을 만질 때 그 동물이 자신을 알아차릴지 모른다는 불안이다. 인간 깊숙한 곳에서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치켜드는 것은 혐오를 일으키는 동물에게는 그다지 낯설지 않아서 그 동물이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자신 안에 살아 있다는 희미한 의식이다. - 모든 혐오는 원래 접촉에 대한 혐오이다. 이 감정을 지배할 수 있을 때조차도 그 지배는 급작스러운, 과도한 거동으로만 이 감정을 뛰어 넘는다: 그 혐오스러운 것을 거칠게 움켜쥐고 먹어치우는 것이다. 이 때 가장 부드러운 피부에 접촉하는 것은 금기가 된다. 이렇게 해서만 혐오감을 극복하는 동시에 혐오감을 최고로 세심하게 육성하라는 도덕적 요구의 역설이 충족될 수 있다. 그는 피조물과의 그의 짐승적 친족관계를 부인해서는 안 되지만, 그 피조물의 부름에 그의 혐오가 응답한다: 그는 자신을 그 피조물의 주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Beim Ekel vor Tieren ist die beherrschende Empfindung die Angst, in der Berührung von ihnen erkannt zu werden. Was sich tief im Menschen entsetzt, ist das dunkle Bewußtsein, in ihm sei etwas am Leben, was dem ekelerregenden Tiere so wenig fremd sei, daß es von ihm erkannt werden könne. – Aller Ekel ist ursprünglich Ekel vor dem Berühren. Über dieses Gefühl setzt sogar die Bemeisterung sich nur mit sprunghafter, überschießender Geberde hinweg: das Ekelhafte wird sie heftig umschlingen, verspeisen, während die Zone der feinsten epidermalen Berührung tabu bleibt. Nur so ist dem Paradox der moralischen Forderung zu genügen, welche gleichzeitig Überwindung und subtilste Ausbildung des Ekelgefühls vom Menschen verlangt. Verleugnen darf er die bestialische Verwandtschaft mit der Kreatur nicht, auf deren Anruf sein Ekel erwidert: er muß sich zu ihrem Herrn machen.
2
테오도르 W.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 (길, 2005), pp. 143-144.
68
인간들이 너를 보고 있다. - 저질러진 잔인한 행위들에 대한 분개는, 피해자들이 일반 독자들과 닮지 않을수록, 그들이 거무스름하고 '누추'하고 이탈리아 사람 같을 수록 경미해 진다. 이것은 목격자에 관해 못지 않게 잔인함 자체에 관해서도 말해준다. 아마도 반유대주의자들에게서 지각의 사회적 도식 또한 그러한 것이 되어서, 그들은 도대체 유대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흔히 접하게 되는 견해, 즉 야만인들, 흑인들, 일본인들은 동물, 예를 들어 원숭이 같다는 견해는 이미 유대인 학살의 열쇠를 담고 있다. 유대인 학살의 가능성은 치명적 상처를 입은 동물의 시선이 인간에게 던져지는 순간 결정된다. 인간은 '저건 동물일 뿐이야' 라며 완강하게 그 시선을 뿌리치는데, 그 완강함은 인간들에게 자행되는 잔인한 행위들에서 부단히 되풀이 된다. 잔인한 행위를 하는 이들은 이 ‘동물일 뿐이야’를 거듭 자신에게 확신시켜야 하는데, 동물들에 대해서 조차도 그것을 결코 완전히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억압적인 사회에서는 인간 개념 자체가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패러디이다. ‘병리적 투사’의 메커니즘은 권력을 쥔 이들이 그들 자신의 거울상만을 인간들로 지각한다는 것 - 인간적인 것을 정확히 다양한 것으로서 반영하는 대신 - 을 말해준다. 살인은 따라서 그러한 허위적 지각의 광기를 더 큰 광기에 의해 이성으로 꾸미려는 거듭되는 시도이다: 인간처럼 보이지 않지만 인간인 것은 어떤 충동으로도 광기어린 시선을 거역할 수 없도록 사물로 만들어 진다.
Menschen sehen dich an. - Die Entrüstung über begangene Grausamkeiten wird um so geringer, je unähnlicher die Betroffenen den normalen Lesern sind, je brunetter, »schmutziger«, dagohafter. Das besagt über die Greuel selbst nicht weniger als über die Betrachter. Vielleicht ist der gesellschaftliche Schematismus der Wahrnehmung bei den Antisemiten so geartet, daß sie die Juden überhaupt nicht als Menschen sehen. Die stets wieder begegnende Aussage, Wilde, Schwarze, Japaner glichen Tieren, etwa Affen, enthält bereits den Schlüssel zum Pogrom. Über dessen Möglichkeit wird entschieden in dem Augenblick, in dem das Auge eines tödlich verwundeten Tiers den Menschen trifft. Der Trotz, mit dem er diesen Blick von sich schiebt - »es ist ja bloß ein Tier« -, wiederholt sich unaufhaltsam in den Grausamkeiten an Menschen, in denen die Täter das »Nur ein Tier« immer wieder sich bestätigen müssen, weil sie es schon am Tier nie ganz glauben konnten. In der repressiven Gesellschaft ist der Begriff des Menschen selber die Parodie der Ebenbildlichkeit. Es liegt im Mechanismus der »pathischen Projektion«, daß die Gewalthaber als Menschen nur ihr eigenes Spiegelbild wahrnehmen, anstatt das Menschliche gerade als das Verschiedene zurückzuspiegeln. Der Mord ist dann der Versuch, den Wahnsinn solcher falschen Wahrnehmung durch größeren Wahnsinn immer wieder in Vernunft zu verstellen: was nicht als Mensch gesehen wurde und doch Mensch ist, wird zum Ding gemacht, damit es durch keine Regung den manischen Blick mehr widerlegen k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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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만연한 혐오풍조(?)와도 일맥상통하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가 동물 중에서도 특히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종류가 벌레인데, 인터넷에서 ~충 이라는 용어는 이미 혐오대상에 대한 일반명사화 돼버렸죠.
상대를 벌레취급 하는것은 자신의 혐오감정을 정당화 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방안에 들어온 모기나 바퀴벌레를 잡는데 있어서 어떤 연민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듯이, "벌레"로 지칭한 대상을 혐오대상으로 삼고, 심지어 "박멸"해야 한다는 논리는 펴는 것은 참 쉬운 일이 되죠. 상대가 인간이나 하다못해 개, 고양이 같은 존재만 돼도 그런 감정을 품는데 머뭇거리게 되는데 말입니다.
(수정됨) 크기를 포함해서 인간과 덜 닮은 생물체일 수록 자신한테 직접적으로 피해주는 것이 없어도 징그러워 하고 막대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이 있죠. 꽤 사람같이 생겼고 표정, 소리, 거동에서 인간적 감정들까지도 느껴지는 일부 표유류에 대해서도 아무런 '정감'도 못 느끼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 사람들이 왜 있는지 진화심리학에서 하는 말이 있을 것도 같은데, 진화심리학만으로는 다 설명이 안될 것 같습니다. 측은지심이랄까 인간 아닌 생물체의 고통에까지 공감하는 능력이랄까 - 이런것은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것이고 사람마다 타고나는 정도가 다를 것 같기는 하지만 분명 우연히 그 속에서 살아가게 된 주변환경, 하나의 전체로서의 사회(의 발전 수준), 교육의 질이 형성하는 몫도 있을 것입니다. 제 경우, 아주 어릴 때 여름날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개미들한테 물총을 쏘았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많이 타고났다면 어릴때라도 안 그럴 수 있는 것인데, 많이는 타고나지 못했던 것이죠. 지금은 모기 외의 거의 모든 생물체들에 대해서 애뜻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 대해서는 애증병존이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