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형상금지는 신학적 면과 아울러 미학적 면도 지닌다. 어떤 형상도, 즉 무엇에 대한 것이든 어떤 형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동시에 그러한 형상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자연에서 현상하는 것은 예술에서의 그것의 중복을 통해 바로 그 자신 안에 있음을 박탈당하는데, 자연경험은 그것 [그 자신 안에 있음] 에서 충족된다. 예술은 풍경 자체의 부정성을 표현하는 가운데 풍경을 현재화하는 경우에만 현상하는 자연에 충실하다. 보르하르트의 '풍경소묘를 감상하며 쓴 운문'은 이 점을 독창적으로 그리고 충격적으로 알려주었다. 코로에서처럼 회화가 자연과 행복하게 화해한 것처럼 보일 때도 이 화해는 순간적인 것의 지표를 지닌다: 영원한 향기는 파라독스이다.
Das alttestamentarische Bilderverbot hat neben seiner theologischen Seite eine ästhetische. Daß man sich kein Bild, nämlich keines von etwas machen soll, sagt zugleich, kein solches Bild sei möglich. Was an Natur erscheint, das wird durch seine Verdopplung in der Kunst eben jenes Ansichseins beraubt, an dem die Erfahrung von Natur sich sättigt. Treu ist Kunst der erscheinenden Natur einzig, wo sie Landschaft vergegenwärtigt im Ausdruck ihrer eigenen Negativität; Borchardts »Verse bei Betrachtung von Landschafts-Zeichnungen geschrieben« haben das unübertrefflich und schockierend ausgesprochen. Scheint Malerei mit Natur glücklich versöhnt, wie etwa bei Corot, hat solche Versöhnung den Index eines Augenblicklichen: verewigter Duft ist parad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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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형상금지의 독특한 점은 흔한 의미에서의 우상금지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그 금지는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 금지이기만 하다면 이해가 잘 된다. 전지전능전선한 신이 인자한 인상의 털보 할아버지나 금송아지처럼 생겼을 리는 없는 것이다. 전지전능전선한 존재, 즉 무한한 존재가 특정한 유한한 사물의 외양과 조금이라도 닮은 외양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해당 존재에게 엄청난 모욕감을 야기할 것이다. 물론 신상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딱히 신이 그 상대로 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라기보다는 신의 어떤 속성을 상징하거나 유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만들 수도 있다. 신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불쾌할 수 있지만 신이 이 세계의 창조주인 한 - 신은 심지어 잠시 인간이 되기도 했다! -, 이 세계와 신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이 있고 따라서 이 세계의 사물의 어떤 외양의 재현적 이미지로 신의 어떤 속성을 나타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속성은 신의 어떤 외양이 아니므로 - 외양적/가시적인 것을 모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 그 재현적 이미지는 감각적(리얼리즘적/자연주의적)이어서는 안 된다. 어느 정도 추상적이거나 양식화되어 있어야 한다. 이 생각은 실제로 로마 가톨릭에서 성상 허용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을 때 허용 찬성론자들의 생각이었다. 특정한 유한한 사물의 외양으로 신의 '모든' 속성을 (유비적/상징적으로라도) 나타낼 수는 없으며 신의 '모든' 속성을 나타낼 수 없는 한, 여전히 신성모독적이라는 발악적 반대론이 있었지만 소수파였고 성서의 일화들을 재현한 그림/조각은 문맹자들을 위한 성서 역할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성상허용론은 대세가 될수밖에 없었다(무슬림들 사이에서는 왜 대세가 될 수 없었을까?).
같은 이야기를 더 기독교 특수적으로 할 수도 있다. 성상이 금지된 것은 구약에서 이다. 구약에서 금지된 것은 성상만이 아니다. 유태인들은 비유태 여성들과 결혼할 수도 없었다. 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토대는 구약이 아니라 인간이 된 신의 이야기인 신약이다. 게다가 애초 인간 자신이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인간이 순수 정신적 존재가 아닌 한, 인간의 가시적인 면, 즉 인간의 형상에도 신적인 것이 있다. 신적 행위를 역사 속에서, 인간의 형상을 통해서 재현하는 것은 그 두 가지 (기독교적) 사실에 비추어 볼때 전혀 이상하지 않다. 구약이 그 재현을 금지한 것은 원죄로 인해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그 인간이 왜곡/손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손상/왜곡된 수단을 통해 신을 재현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신의 형상은 인간들 사이에서 회복되었다. (죄를 짓기 전의) 아담은 신과 함께 걸을 수 있었지만 모세는 신의 뒷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사도들은 바닷가 마을에서 예수와 저녁을 같이 하기까지 했다. 신을 떳떳하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형상, 즉 재현적 이미지의 사용도 허용되었다.
물론 신이 정말 존재하는지도 불확실한 마당에 신이 형상금지 명령을 취소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신의 존재 여부, 따라서 그 형상금지 명령의 실재성 여부와 무관하게 의문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다. 구약이라는 전래설화에 등장하는 유태인들의 신은 애초 왜 우상만이 아니라 일체의 형상을 금지했을까? 그 자신이 신의 왜곡된/손상된 형상인 인간이 그리거나 만든 형상이라면 어떤 것에 대한 형상이든 그 어떤 것을 바로 나타낼 수 없다는 생각에서 였을까? 아니면 애초 인간의 그 죄지음과 더불어 인간만이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이 다 왜곡/손상되어 그 사물들의 형상이 그 사물들의 본래적인 존재방식 (그 자신 안에 있음) 을 바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일까? 그런데, 그렇게 두 이유 중 하나라면, 화육을 통해 '신의 형상이 인간들 사이에서 회복'된 후라면, 사물들의 형상 또한 허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도르노의 생각은 '아니면'에 해당하는 데다가 아직 '신의 형상이 인간들 사이에서 회복'되지 않았다는 생각이기도 한 것 같다. 실제로도, 기독교적 의미에서도, 문제의 그 회복은 약속이지 사실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약속을 사실로 착각해 성급하게 형상을 그리고 만드는 즐거움을 누리는 일에 달려든 것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자연경치로 현상하는 것은 지배되는 자연의 일부로서의 그 자연경치의 사실성 이상의 것, 자연이 인간을 위해서만/인간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자연은 인간적 목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존재 속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사실적이지 않다. 현재 자연은 마치 인간을 위해서만/인간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것인양 지배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은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당위와 가능성으로만 자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자연경치의 아름다운 [외양 = 현상]은 그 사실의 [외양 = 현상]이다(독일어 Erscheinung 에는 외양, [본질적인것, 초감각적인 것, 신적인 것의] 현상/현현, 일반적 의미의 나타남이라는 뜻 셋 다 있다). 그것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감옥 속에 갇힌채 입을 악물고 고문당하는 독립지사의 모습에서 피와 상처와 찡그린 표정이라는 지각적 사실만이 아니라 어떤 독립정신의 빛남을 일별 - 일본 군경조차도 할 수 있는 일별! - 하는 것과 같다.
풍경화로 그 자연경치를 대상화하는 것은 그 자연경치에서 현상하는 것에 불의를 가하는 것이다. 잘 그려진 풍경화에서는, 자연지배연관 밖에 있는 자연이라고 부정적으로만 규정할 수 있는 것의 현상을 접하는 경험은 그 현상을 잘 모방한 인공품을 접하는 경험으로 대체된다. 그런 그림은 키치 (이발소 그림) 취급 당하기 시작한 지 오래이지만 그것이 주는 피상적 즐거움에 대한 욕구는 막대한 풍경사진들을 생산한다. 꼭 풍경화를 그려야겠다면, 그 풍경화는 "풍경 자체의 부정성을 표현하는 가운데 풍경을 현재화하는 경우에만 현상하는 자연에 충실"할 수 있다. 현상하는 자연에 충실하다는 것은 현존하지 않는 자연에, 즉 지배되지 않은 자연의 소망스러움과 가능성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그 충실은 '현재' 자연이 처해있는 지배받는 상태에 대한 가감없는 인식을 필요조건으로 해서만, 어떤 자연은 아직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어떤 자연도 아름답(게 현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직시를 필요조건으로 해서만 실현된다. 관광산업과 풍경사진에 닿아있는 경험으로서는 자연미 경험은 '자연이 생동하고 있다'는 이데올로기의 산실일 뿐이며 자연미 자체를 모방하는 예술작품만이, 지배되지 않는 자연의 소망스러움과 가능성을 현재 자연이 처해있는 지배받는 상태를 통해 표현하는 예술작품만이 자연미 경험을 구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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