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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15:57
에세이 형식의 철학, 읽기 쉬운 철학은 그 자체로 반갑긴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철학 에세이와 문학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철학의 대중화를 위해 풀어쓴 철학글이 많아지는 것은 환영하지만, 학술적으로 가치있는 철학문헌을 에세이 형식으로 작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네요.
21/01/28 16:20
재밌고 어려운 문제인데, 사실 원래 철학의 모습은 문학적이었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과 어거스틴의 고백록부터 시작해서요. 위 글에 따르면 30년전까지는 미국 철학자들 중에서도 에세이 스타일로 쓰는 이들이 있었다고 하죠. 유럽 대륙 철학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거기서는 지금도 적잖죠. 물론 에세이 스타일이라는 것이 딱딱하지 않다고 해서 반드시 잘 읽히기도 하는 스타일인 것은 아니죠. 에세이 스타일은 아마 '미문'이라는 속성을 반드시 갖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정말이지, 딱딱하지 않다, 전문 지식이 없어도 읽을 수 있다 - 요 정도 만으로 에세이 스타일을 정의하는 것은 너무 빈약합니다. 아도르노의 아주아주 유명한 '형식으로서의 에세이'라는 글이 있는데, 에세이라는 글의 형식에 관심이 깊은 분들은 그 무지 읽기 어려운^^ 에세이를 반드시 읽어야 할 것입니다.
21/01/28 16:42
저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발달하면서 철학 고유의 영역도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과학철학과 같이 새롭게 발전한 분야도 있지만, 오히려 "인식론"이라는 광대하였던 철학분야가 과학철학으로 쪼그라들었다고 볼 여지도 있죠. 본문에서 언급한 분석철학이 유행한 것도 과학적 지식의 근간에 있는 언어와 논리를 철저히 탐구하여, 과학적 지식의 기반을 다지려는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과거에 철학이 다루던 것들을 대부분 과학에 넘겨주고, 이제는 철학이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축소된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의미있는 철학은 정치철학/법철학/윤리학과 같은 "가치"를 다루는 것들, 분석철학과 같이 학문의 기반을 탐구하는 것들, 심리철학과 같이 인간의 의식을 다루는 것들 정도라고 생각합니다.(당장 떠오르는 것만 적어서 더 있을 수도 있겠죠.) 그 중에서도 "가치"를 다루는 것 이외에는 모두 과학적 지식과 모순되는 철학적 사유는 잘못된 것이겠죠. 만약 철학이라는 학문의 상황이 이렇다면, 에세이 형식의 철학문헌이 갖는 가치는 매우 낮을 것 같습니다. 인간 지식의 근간을 매우 엄밀한 논리로 촘촘하게 탐구하는 것은 여전히 가치있는 활동이지만, 칼럼이나 수필과 같은 형식의 철학글은 어디서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지혜로운 작가의 소설/수필이나 철학자의 에세이는 모두 삶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니까요.
21/01/28 17:13
칼럼이나 수필과 같은 형식의 철학글은 어디서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 예술의 의미와 가치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라는 문제제기도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로 문학의 의미와 가치라고 말해도 마찬가지죠. 따로인 것은 문자가 매체인 문학과 다른 예술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으니까.. 다만 문학도 다른 예술들과 마찬가지로, 사실을 재료로 쓸 수는 있어도, 하나의 작품 전체로서는 가상적/허구적입니다. 우리는 한편에서는 그런 (가상적/허구적) 문학과 예술을 섬씽 스페셜한 것으로, 특별한 인지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보는 전통이 아직까지도 남아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것들의 가치에 대해 말하기 어렵거나 그런 것들의 가치를 회의하는 합리주의/주지주의/과학주의적 전통도 유유한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어떤 인식론 저술로도 예술작품과 문학작품의 인지적 가치를 논할 수 없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컬럼이나 수필과 같은 형식의 철학글은 경우가 좀 다를 듯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을 거론하거나 그 사실에 대한 인지를 전제로 해야만, 그리고 기호논리학 따위도 구사해야만 충실한 논의가 가능한 주제를 그런 철학글 가지고 다루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은 많은 주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가치를 다루는 분야에 그런 주제들이 널려 있습니다. 사실 철학은 원래 그런 주제들을 일차적으로 다루는 학문이었습니다. 즉 옛날에는 제1철학은 윤리학/정치철학이었습니다. 근대 이래는 인식론이, 그리고 다시 이차대전 이래는 과학철학/인식론/논리철학 같은 것이 눈부시게 발전하거나 주 관심사가 되었지만 그 추세가 계속 되어야 할 필연성은 없습니다. 실제로 롤스 이후 윤리학/정치철학은 다시 제1철학이 되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롤스의 책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좀 딱딱하기는 해도 국어 실력 좋은 고등학생만 되어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샌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컬럼이나 수필과 같은 형식의 철학글은 롤스의 글과는 좀 차이가 있지만 아주 멀지는 않고 샌델의 대중적 저작과는 꽤 가깝습니다. 물론 윤리학/정치철학에 해당하는 주제라고 해도 대중은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구문을 구사하며 글을 쓸 수 있고 써야 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쓰는 학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어떤 그쪽 주제들을 대학 교육 받은 정도의 일반인이 흥미가 생기고 이해도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분명히 가능합니다.
21/01/28 16:21
대중이 쉽게 읽고 다가갈 수 있는 철학잡지가 생기는 건 반길만한 일이네요.
이런 잡지의 한국어판을 바란다는건 너무 욕심이겠지요?
21/01/28 16:28
철학만이 아니라 모든 학술 분야에 그리 피상적이지 않으면서도 대중의 독해를 허용하는 훌륭한, 곱씹을 만한 글들을 쓰는 분들이 있어야 하고 그런 분들 글들이 널리 추천되어야 합니다. 사실 영어권에는 그런 분들이 적잖고 그런 분들이 그런 글을 정기적으로 싣는 매거진, 저널들을 이거다라고 딱 찍을 수도 있습니다. 대중들이 다른, 더 쉬우면서도 더 즐거운 거리들이 더 많고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니 그렇게 많아도 극히 일부의 대중만이 읽을 뿐이죠. 한국은 인구비례로 따질 때 그런 글을 쓰는 식자들이 미국의 10분의 1도 안되는 것 같습니다. 전문적 식견이 없는 이들이 얄팍하지만 극적으로 포장된 지식으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끄는 현상이 가끔 벌어지는 것이 바로 그 사실을 말해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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