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뒷늦은 3.1절 글입니다만, 그래도 하루정도는 유효하지않을까 싶어서 적어봅니다.
목차)
1.한국에 축구가 도입되는 과정과 인기
2.베를림올림픽 선발전 겸했던 전조선축구대회
3.일본내부에서 경성의 깃발을 휘날리다
후편)
4. 선발명단을 둘러싼 경성과 평양팀간의 갈등
5. 본선에서의 쾌거
6. 베를림올림픽과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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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에 축구가 도입되는 과정과 인기
2021년 3월 1일은 3.1절 102주년입니다.
102년전 그날, 우리는 독립을 선언하고 한반도 전국토에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였죠.
일제강점기는 정말이지 괴로운 시기였고, 일본인들에게 많은 핍박과 차별을 받으면서 힘든 나날을 보냈죠. 그런 한반도에 살던 조상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달래주웠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스포츠였습니다.
마라톤의 손기정
우리에게는 UBD로 알려져 있는, 자전차왕 엄복동 역시 스포츠를 통해서 일본을 꺾어내면서 조상님들의 자존심을 세운 케이스죠.
이외에도 크게 국민들 마음을 흔들었던 경우가 있었으니, 바로 일본 본토에서, 자기들이 주최한 축구대회를 두번이나 우승한 바로 경성축구단입니다.
(경성축구단의 모습)
축구는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인기가 가장 많았던 스포츠중 하나였습니다. 그 시작은 인천에서부터였습니다.
1882년 위그림처럼 조선은 영국과 수호통상 조약을 맺었는데, 그 당시 들어온 다른 영국 군함이 심심해서 시작한 축구가 바로 시작이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축구는, 워낙 배우기도 쉽고 필요한 도구도 적어서 전국으로 쉽게 퍼져갔죠.
그리고 일제시대에도 인기가 이어졌습니다.
조선의 엘클라시코라고 할 수 있는 "경성-평양 축구 대항전" 일명 '경평전'의 인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933년 제3회 경평전의 경우 관중수가 2만명이 넘었을 정도였죠.
경평전의 사진중 한컷)
이렇게 고조되어가던 인기가 커져가는 상황, 1935년은 당시 조선에 살던 모든 축구선수들이 긴장하고 기대감을 갖던 시기였습니다. 바로 다음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있었기때문입니다.
원래대로라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올림픽을 나갈 수가 없던 상황이지만 당시 일본 '절차적 공정성'을 갖춘 다는 명목하에 식민지 선수들도 포함해서 선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총 3번의 선발전을 거쳐서 선발하기로 했던 일본은 1차 선발전은 현재까지도 그 역사를 이어나가는 일본 FA컵대회 전일본 축구선수권대회 (현: 천황배 축구대회)를 겸해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전일본대회는 일본의 6개지방을 대표하는 팀이 출전했고 이 6개 지역에 조선 역시 포함되어있어서 조선은 선발전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선발전에 나갈 팀을 급히 뽑기 위해
1935년 5월초 조선축구협회(현: 한국축구협회,KFA)는 전조선 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합니다.
올림픽 대회 일본선발전의 지역예선을 겸하는 조선축구대회를 개최한다는 당시 동아일보기사
출전팀은 서울축구단, 고려축구단,평양축구단, 경성축구단 이렇게 4팀이 나가기로 결정했습니다만, 고려축구단과 서울축구단이 기권을 한 관계로 1935년 5월 14일 경성과 평양의 단판 대결로 결승전이 치뤄졌습니다.
경기내용은 경성축구단의 채금석 선수의 패스를 받은 배종호 선수가 득점하면서 1:0, 경성축구단의 우승이였습니다.
당시 경기 내용과 라인업을 소개하는 동아일보 기사.
하지만 조선축구협회는 이왕 나가는 김에 경성축구단을 베이스로 평양축구단팀도 섞은 올스타팀으로 출전하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양팀을 섞은 라인업을 발표했죠.
▲감독=현정주 ▲매니저=이영선 ▲주장=이영민 ▲선수=이혜봉 정용수 박규정 김용식 김병희 이유형 최성손 김경한 배종호 박효제 이봉호(이상 경축단) 박형렬 염기순 박인식 이정현 김영근 박의현(이상 평축단) ▲후보=김성간 이치순(이상 평축단 )제금석 고홍관(이상 경축단) 등
총 18명중 12명이 경성축구단이었고 6명이 평양축구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각 팀에서 2명씩 예비멤버를 뽑았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라인업에 대해 평양축구단측에 불만이 많았던 것입니다. 평양의 우수선수가 빠지고 선발이 불공평했다는 것이죠.
거기다가 일본 축구협회 역시 이러한 올스타팀을 인정하지않고 우승팀이 바로 넘어와라고 요구했습니다.
“조선을 일구로 예선전에 뽑힌 경축을 중심으로 그동안 두 번이나 픽업팀을 편성하였으나 그 본부격인 일본축협으로부터 차를 인정치 않는다 하여 결국 경성서 우승한 경축 멤버만으로 가게 되었다.” (<동아일보> 1935년 5월 25일)
그래서 선발팀은 대다수가 경성축구단 선수에다가 경성으로 학교를 다니는 일부 평양축구선수, 강기순과, 후보인 김성우만을 평양축구선수단으로 포함시키고 대회에 나갔습니다.
본선 라인업
본선은 문리과대학(간토), 북해도제대(홋카이도), 센다이축구클럽(도호쿠), 관서대학클럽(간사이), 나고야고등상업학교(도카이), 여기다가 경성축구단이 포함된 6개팀이였습니다.
추첨으로 결정된 대진표에서 경성축구단은 부전표를 뽑았고 6강 경기에서 경성축구단은 부전승을 거뒀습니다.
그렇게 올라간 4강에서는 나고야 고상을 만났고 전반에 2골 후반에 4골을 몰아치며 6:0으로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1973년 <월간축구>(현 <베스트일레븐>) 기사엔 스탠드 절반가량을 채운 조선인들이 경성축구단의 활약에 환호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김성간의 헤딩이 네트에 꽂혔다. 스탠드의 절반을 차지한 조선인들이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16분 문리대 라이트 인사이드 포워드의 슛이 경성 풀백진의 허를 찔러 골이 되었다. (…) 그러나 18분 레프트 인사이드 포워드 최성손, 44분 라이트 인사이 포워드 배종호가 각각 한 골씩을 빼내고 말았다. 20분, 화이팅의 라이트 윙 박효제는 수차 적 문전에 돌입했다. 골키퍼 나까 가끼우찌의 발에 얼굴을 다치기도 했지만 곧 일어나 다시 뛰었다. 문리대는 30분경 단 한 번 경성진 페널티 에어리어에 진출했다. 전반 3대 1.” (<월간축구> 1973년 4월)
경성은 후반전 역시 전술적으로도 압도하며 더 완벽한 승리를 가져갔습니다. 최성손의 강슛이 추가골을 만들어 냈고, 김성간이 두 골을 더 터뜨리며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후반 11분에 이미 승부는 결정이 돼 있었고 문리대는 오히려 자기 진영에 웅크리고 수비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경성축구단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대회 총전적이 12득점 1실점 그야말로 압도적인 우승이였습니다.
그 당시 축구대회에 골키퍼로 참여했던 이혜봉선생님은 그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주장인 이영민은 그 때 국내의 실업야구대회가 있어서 함께 가지 않았으니 이 일본 원정을 얼마나 우습게 봤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이 경축단은 4개「팀」만이 출전한 이대회의 준결승전에서 관서의 명고옥상고를6-0,결승에서 관동의 문리대를 6-1로 크게 이겨 우승했으니 한마디로 말해 당시의 일본 축구는 보잘 것 없었다 하겠다.”
[출처: 중앙일보] (575)<제27화>경·평 축구전(20)이혜봉<제자 이혜봉>
이러한 경성축구단의 우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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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대회를 우승한 기쁨도 잠시, 일본은 바로 2차 선발전을 개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차선발전은 당시 전국체전이였던, 메이지신궁대회였습니다.
여기서도 한국은 선발팀을 뽑으려고 하는데 이과정에서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로 평양과 경성팀간의 라이벌 의식때문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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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한큐에 후루룩 읽힐정도로 잘 쓸 자신이 없어서 일단 여기서 짜릅니다.
타사이트에는 2편올리긴 했는데 pgr에 연속글은 쓰기 그러니 낼 마저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