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우리... 사귀자..."
- 음... 사귀는게 뭔데??
"어? 사귀는 거?? 어... 그게... 그게..."
'아.. 사귀는게 뭐였지? 뭐라고 얘기해야 하지??'
1.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첫눈에 반한 아이가 있었다.
사실 국민학교때부터 한 3년간 짝사랑하던 아이도 같은 반이 되었기에
적어도 1년은 더 그 짝사랑을 이어갈 줄 알았는데,
봄이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짝사랑을 시작하고 말았다.
동그란 안경으로 가려진 갈색 예쁜 눈동자를 알아차린건, 나뿐만은 아니었을거다.
작은 콧잔등으로 자꾸 미끄러지는 안경을 고쳐쓰며 턱을 괴고 칠판을 응시하는 모습은,
천둥벌거숭이같던 중학교 1학년 꼬마의 뇌리에 꽤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2.
그 친구와 앞뒤자리로 붙어있는 짝궁이 하나 있었다.
신기하게도 붉은 색 머리칼이 듬성듬성있는 아이었는데
그 시기의 사내아이가 그러하듯 유치찬란했던 나란 녀석은,
짝사랑하는 아이에게는 아무 표현도 못하고
애꿎은 그 짝궁만 괴롭혔다.
얼굴에 가득한 점들로 놀리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으로 놀리고...
그냥 이유도 없이 거리낌없이 놀려대며 장난을 걸고 괴롭혔다.
3.
2학년이 되고, 학급 하나가 통채로 날아가서
같은 반이 될 확률이 훨씬 높았을텐데도...
짝사랑하는 그 아이와는 반이 갈려버렸다.
게다가
친한 친구 한 녀석에게
그 아이를 좋아하고 있노라고 말한 다음날 학교에 가보니
젠장할! 벌써 반 전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XX이 이 나쁜 넘 ㅠㅜ)
4.
당시 우리집 욕실에는 거울이 없었다.
아니 아마 있었겠지만,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같이 몰려다니는 친구들의 인물이 나름 괜찮았기 때문에
나 스스로도 대충 비슷할꺼라 생각했었나보다.
그런데 어느날, 짝꿍이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영민아... 너 정말 못생겼다..."
대수롭지 않게 들었지만
다음날 안방 화장대에 비추어본 내 모습을 보고 난 이후,
난 좌절했고, 그대로 사춘기 아닌 사춘기를 맞고 말았다.
5.
아직 사춘기가 아니면서도, 내가 사춘기인듯한 생각에 빠져
암울하게 지내던 그 시기에도
예의 그 점순이는 늘 주위에 있었다.
3년내내 같은 반인데다가,
번호로 짝을 바꾸고, 키 순서로 짝을 바꿔도, 참 자주 같이 앉아 있었다.
여전히 짝사랑 그녀와 한동네 친구인 그 아이는
여전히 내 짝사랑을 이어줄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그래서
여전히 그 아이를 괴롭혔다.
무던한 성격의 그 아이가, 가끔 짜증을 낼 만큼 말이다.
6.
그 시절 내 이상형은 "카르멘" 이었다.
카르멘이 누구냐고?
'천사들의 합창'이라는 어린이 드라마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대게 히메나 선생님이나 마리아 호와키나 정도를 기억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멕시코계 아이가 하나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까만 흑발을 하얀색 머리끈으로 묶고 다니는...
아무튼, 2002년 '네 멋대로 해라'의 전경을 만나기 전까지,
내 이상형은 항상 그 카르멘이었다.
그래서, 하얀 곱창밴드로 묶여있는 까만 흑발에 대한 패티쉬도 있었...
봄이었는지 여름이었는지,
아직 새 교실 냄새가 나는 그 2층의 한 교실 창가에서
예의 그 빨강머리 점순이가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해를 등지고 있어서일까?
순간 그 아이의 목덜미가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고,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뭐, 그리곤 금새 그 아이를 다시 놀리고 괴롭히곤 했다.
7.
나름 힘겨웠던 2학년이 끝나고, 세상 거칠 것 없는 3학년이 되었다.
반배정을 받고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짝사랑 그녀와 한반이 된거다!! 으하하하~
그런데,
다시 한반이 되었음에도... 희안하게 눈길이 잘 안갔다.
외려, '점 뺀 점순이'가 더 눈에 밟히는 거다.
다시 생각하니, 짝사랑 그녀보다 이 녀석과 같은 반이 된 사실에 더 기뻐했던 것 같다.
몇년을 좋다고 두근거리던 그녀 옆에 그 아이가, 내 맘을 두근거리게 했다.
8.
내 맘을 깨닫는 데 까지 시간이 걸렸을 뿐,
조급한 소년은 별다른 마음의 준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여러 친구들과 텐트를 치고 놀러갔던 그 날 밤에 말이다.
뭐랄까.. 짝사랑했던 그녀와는 달리,
얘기하면 받아줄거라는 대책없는 자신감이었을 수도 있다.
32-2941.
(아직도 기억나는 그 친구 집 전화번호)
"우리... 사귀자..."
- 음... 사귀는게 뭔데??
"어? 사귀는 거?? 어... 그게... 그게..."
......
ps.
전학생이 왔다.
수도권에서 왔다고 한다.
잘생겼다.
옷도 잘 입고, 무엇보다 여자아이들에게 대하는 매너가 다르다.
온지 얼마 안되,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 아이와 무언가를 주고 받는다.
'사귄다'는 말의 뜻은 여전히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제 내 여자친구 하기로 했는데!
왜 쟤랑 단둘이 얘기하는건데??
소심대마왕인 나는 잔뜩 삐쳤지만, 내색할 순 없었다.
뭔지 넌지시 물어봤다.
아니, 넌지시는 무슨... 뺏듯이 낚아채서 봤다.
다음날, 읍내 레코드점에서 그 '푸른하늘'의 3집 테이프를 샀고,
고등학교 내내...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살았다.
아직도 유영석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아이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