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1/03/24 13:03:27
Name Albert Camus
Subject [일반] [13] 포항을 뭐하러 가
해파랑길을 떠올린 건 우연한 계기였다. 때마침 즐겨보던 여행유튜버 채널에 나왔던 것 해안을 따라 길게 놓인 산책로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바다는 영상 속 모습처럼 새파란지 궁금해졌다.

알아보니 그 구간은 포항이었다. 특별한 것이 없다는 후기를 두번이나 듣긴했지만 그래도 가보기로 했다. 시시한 곳에서도 나만의 즐거움을 찾는 재미가 있다. 항상 성공하지는 않지만.

퇴근길에 올라탄 야간버스는 예상과 달리 만석이었다. 우리를 제외하고 전부 고향을 방문하는 포항사람들 같았다. 옆자리에는 작은 고양이도 함께 타고 있었다. 이따금 울어대는 이동가방 속 고양이를 구경하기도 하고 괜히 이북을 다운받아 보기도 했다. 모든 것이 다 설레었다.

여행이 끝나고 드는 허무함이 참 싫었다. 다시 퍽퍽한 일상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압박감이 여행이 끝나기도 전에 들곤했다. 캄캄한 버스안에서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걱정은 내려놓고 모든 시간을 온전히 즐기기로.

영일대에 위치한 숙소에서는 해수욕장과 포스코 공장의 불빛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창에서 보이는 모래사장과 바다와 하늘의 비율이 아주 좋고 우리가 있는 층에서만 볼 수 있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남편에게 신나게 떠들었다. 해변에서 사람들이 터트리는 불꽃놀이를 공짜로 구경하며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숙소 주변은 상권이 발달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정갈하게 정비되어 있으나 가게도 사람도 드문드문 있었다. 우리는 해수욕장 일대를 샅샅이살폈고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루프탑에서 보이는 바다 풍경이 우리를  단번에 사로잡았고 그곳을 인생 카페로 정하고 영일대에 머무는 내내 찾았다.

해파랑길은 넷째 날 가볼 수 있었다. 우리가 간 곳은 호미반도 해안 둘레길로 해파랑길 16코스의 일부 구간이다. 산책로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것이란 기대와 달리 중간이 뚝 끊겨 있었다. 그곳에선 사람들이 자갈을 주워 물수제비를 띄우거나 큰 바위의 움푹 팬 곳에 던져 넣고 있었다.

여전히 산책로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 자갈밭을 지나 조금 더 가면 길이 이어져 있을 것 같았다. 다음번에는 배낭을 메고 16코스를 제대로 걸어봐야겠다. 그날의 하루는 마라도 횟집에서 반주를 하고 우리가 정했던 인생카페에서 커피를 마셔야지.

돌아오는 길은 걱정한 것처럼 괴롭지는 않았다. 영일대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당분간은 일상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 같았다. 국내 어딘가에 우리가 즐겨 찾던 카페가 있다는 것으로 위안이 된다. 언제든 배낭을 싸고 고속버스 티켓을 끊으면 갈 수 있다.

특별함은 어디에나 있다. 길을 물어본 가게 주인이 일을 팽개치고 멀리까지 따라나와 동행해 주었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따듯한 기억이다. 여행지에서 예상하지 못한 값진 경험들을 하다 보면 행선지는 아무렴 어디라도 어떤가 하는 생각이다.

돌아가는 버스는 고요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나도 그 틈에 섞여 조용히 집으로 돌아와, 포항에서 산 마그넷을 냉장고에 붙이는 것으로 여행을 마무리했다.

‐‐--------------------------------------------------------------------------------------

아내의 글을 대신 올려봅니다 :) 좋은 하루 되세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세인트루이스
21/03/24 14:49
수정 아이콘
피지알 글쓰기 이벤트중에서 이번 여행 글들만큼 열심히 읽은 적이 없네요. 글 감사합니다.
Albert Camus
21/03/24 21:40
수정 아이콘
즐겁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다크나이트웨이터
21/03/24 21:33
수정 아이콘
포항 마그넷은 어떤건지 궁금하네요 크크
Albert Camus
21/03/24 21:40
수정 아이콘
영일대 해상누각이 양각으로 표현된 사각 마그넷입니다~
Energy Poor
21/03/24 22:45
수정 아이콘
포항은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포스코(당시 포항제철) 견학 이후로 가본 적이 없는데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네요.
Albert Camus
21/03/25 07:51
수정 아이콘
영일대가 아주 멋지게 바뀌었더라구요. 거리 정비도 잘되어 있어서 놀다가기 좋았습니다. 본문의 해파랑길도 좋았구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1072 [일반] "동맹국에 미중 택일 강요 않겠다" [72] 러브어clock16297 21/03/25 16297 18
91071 [일반] MSI: 그래픽카드 가격 인상 [94] SAS Tony Parker 17814 21/03/25 17814 1
91070 [일반] 대법 "기레기, 모욕적 표현이지만 모욕죄 성립 안돼" [69] 맥스훼인14316 21/03/25 14316 4
91069 [일반] 백신 접종하였습니다. -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관련 업데이트 [68] 여왕의심복15799 21/03/25 15799 67
91067 [일반] [저스티스리그]웨던 컷을 안 본 사람의 스나이더컷 감상기 [38] 도뿔이10017 21/03/25 10017 7
91066 [일반] 여기서 멈추면 그들만 좋아지는 겁니다 [128] 실제상황입니다19399 21/03/25 19399 54
91065 [일반] [직장생활] '야근문화'가 문제인 이유 [51] 라울리스타15015 21/03/24 15015 35
91064 [일반] 눈에는 눈, 광기, 대의를 위하여, 솔직함. [109] kien18838 21/03/24 18838 11
91063 [일반] 분재|독신생활에 끼얹는 가니쉬 한 그루 [30] 한뫼소9296 21/03/24 9296 9
91062 [일반] 차량 테러 범인을 찾았습니다. [76] Lovesick Girls19877 21/03/24 19877 108
91061 [일반] 영탁 - 찐이야 [10] 포졸작곡가8476 21/03/24 8476 8
91060 [일반] 래디컬페미가 아무리 싫어도 이딴 짓을... [164] Fim20709 21/03/24 20709 11
91059 [일반] 중국 이슈 앞에서는 쿨하지 못한편 [112] 마늘빵17146 21/03/24 17146 44
91058 [일반] 중국에서 한류에 집착하는 건 한반도 점령 위해서입니다. [40] 니그라토12368 21/03/24 12368 14
91056 [일반] [13] 포항을 뭐하러 가 [6] Albert Camus5836 21/03/24 5836 5
91054 [일반] 게시판 도배 저만 불편한가요. [106] bifrost16531 21/03/24 16531 48
91053 [일반] 예언들과 부록 [54] toheaven13273 21/03/24 13273 2
91052 [일반] 수렵채집사회들의 한 본질적 특성으로서의 평등주의 [14] 아난10964 21/03/24 10964 1
91051 [일반] 대체로 야만인과는 거리가 멀었던 수렵채집인들 3 (번역) [4] 아난11354 21/03/24 11354 2
91050 [일반] 대체로 야만인과는 거리가 멀었던 수렵채집인들 2 (번역) [16] 아난8189 21/03/24 8189 3
91049 [일반] 관심법으로 접근한 중국 지도부의 속내 [61] 아스라이13004 21/03/23 13004 0
91048 [일반] [13] [픽션] 여행. [6] aDayInTheLife6182 21/03/23 6182 3
91046 [일반] 대체로 야만인과는 거리가 멀었던 수렵채집인들 1 (번역) [8] 아난9589 21/03/23 9589 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