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엔 현생 사는 문제로 시간도 잘 안나고, 아무래도 생계활동 하면서 나름의 고층이 있는게, 어쩌다 휴일 같은날 시간이 나도 학술적인 책이나 논문을 보기에는 '으아~쉴때는 늘어지게 쉬자~' '이럴때 놀아야지' 싶고 이러다보니 거의 책도 못 보고 그러고 있네요.
그런데 최근에 '조선구마사' 라는 드라마 관련 화제를 들었는데... TV 안본지 오래되서 드라마는 본 적이 없습니다. 본적도 없기 때문에 드라마 자체에 대해 따로 덧불일 말도 없는데..
다만 여기서 '의주' 지역에서 음식을 먹는 장면에서 논란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당시에 한족, 명나라가 이쪽에 영향이 있었는가 여기서 사람이 살았는가 하는 부분인데, 여말 지역 요동정세 관련 부분은 원래도 제가 관심이 있던 부분이라 한번 찾아봤습니다.
홍무~선덕년간 명조가 요동도사 관할 지역에 설치한 25위에 소속된 소는 모두 127개이다. 각 소의 인구 규모를 평균잡아 1120명으로 계산한다면 총 14만 1120명의 군사가 되며, 77개의 백호소 등을 7.7개의 천호소로 계산하면 8624명이다.
이외에도 역참과 체운소 그리고 명초 20만 필의 말을 관리하는 원마사 등의 군인을 합치면 최소한 1개의 천호소가 더 필요했을 것이며, 이것을 대략 인구로 환산하면
요동 군인의 수만 대략 15만 명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위에 소속된 소의 숫자로 볼 때 명초 요동의 위소설치는 군사적 역량과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위소병의 규모를 결정하였으며 전체적으로는 1위당 평균 5소를 설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홍무연간 이후 영락시기의
최대 요동 군사수가 19만으로 기록되는 것으로 보면 명 초기 15만 정도의 군사가 있다고 계산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더구나 명 중기에 편찬된 '요동지'는 명초의 인구를 25위 115소, 군사를 13만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명초 요동 25위의 군대를 15만이라고 추산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듯싶다.
남의현 - 명대전기 요동방어와 인구변화
홍무제 주원장 시기부터 영락제 직후 시기까지 최대 19만명 정도까지 명나라군이 요동에 주둔했고, 명나라 초기 시점에서 대략 15만 정도의 부대가 요동에 주둔했다고 합니다. 이 병사들의 가족이나 여타 관계자들을 포함하면 명군 관계자들은 최대치였을때 대략 5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하는군요.
일단 숫자는 그렇게 되고, 그러면 이 15만이라는 숫자의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봅시다.
1. 내지에서 강제이주
(주로 산동 지역 등의 사람들이 강제로 이주당함)
2. 옛 원나라 군벌 잔존 세력들 포로 및 회유한 세력들
당시 요동 지역에는 여러 원나라 계열 군벌들이 난립했는데 고가노 등의 세력들이 활개치다가 명에 항복했고, 이후에 나하추도 시간이 지나 항복합니다. 아마도 그런 병사들이 상당후 분산되어 거주하게 된듯.
3. 여러 이민족 세력들
4. 중원 지역에서 끌려온 명나라 죄수들
대략 이런 잡다한 구성으로 인력이 충원되서, 이 지역의 숫자가 50만 → 10만 → 다시 50만 이런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병력 15만 ~ 19만에 달하고 50만이 달하던 명나라의 요동 인적 인프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붕괴 했다고 합니다.
일단 둔전을 시키는데 농사 짓기가 쉽지 않은 땅들이라 도망치는 사람들이 많았고, 워낙 벽지라 윗사람들이 마음대로 군사를 자기 사적인 노비처럼 써버리는 통에 안그래도 아쉬운 생산력도 줄어들고, 한족 출신 사람들은 자꾸 산동으로 도망치고,
명나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공세적인 방어전선 대신에 수비라인을 '땡겨서' 웅크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더 이상 몽골이나 여진 지역의 인구를 흡수하기도 어려워졌으며, 이런 점 떄문에 요동 방위를 약하게 만들어 훗날의 파국이 초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좀 재밌는 부분인데,
요동 지역에서 명나라의 영향력은 명이 개국하고 난지 얼마 안된 그 시점이 가장 거대했습니다. 그냥 생각하면 얼마전까지 몽골 영향력이 컸고 명이 개국한지 얼마 안되었기 떄문에 그 시점에 명나라의 그림자가 얼마나 요동에 있었을까 싶기도 한데, 이 초창기가 가장 병력 자체도 그렇고 병력에 딸려온 다른 잡다한 인구 숫자도 가장 많았습니다.
그 뒤로는, (명나라 말기야 말할것도 없지만) 영락제-선덕제 시절만 지나면 이런 직접적인 영향력은 확 떨어지는 모습이 보이구요.
그러면 당시 주둔해 있던 명나라 관련 군사세력의 숫자는 이 정도였다고 확인하고, 주둔한 위치를 확인해보면...
(이하 남의현 명초기 요동도사와 요동팔참 점거 中)
명나라 초창기 시절 영향력은 '요동도사' 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연산관, 북으로는 개원, 서쪽으로는 광녕(廣寧)으로 하여 대략 교두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길공구님이 올려주신 이미지를 참조했습니다. 요양 중심으로 북쪽으로 개원, 서쪽으로 광녕의 위치가 보입니다.
동쪽 경계라고 나온 연산관. 저 요동반도 쪽으로 들어간 금주 개주 등도 명나라 영향권. 나하추가 이 지역을 공격했다가 명군에게 대패한 이야기는 일전에 제가 언급한 적 있으니 기억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연산관 남쪽, 요동팔참(遼東八站) 지역은 명나라의 영향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기록상에서 특별히 명군이 주둔한 영향력이 보이지 않고, 그 인근 지역 역시 한인들보다는 고려인들이나 여진족들이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요동의 군벌인 나하추 등이 무너지자 명군은 당장의 적인 북방 몽골세력 견제를 위해 요동도위 중심으로 더 올라가면 올라갔지 직접적으로 내려가는 곳엔 간접적인 영향력 이상으로 직접적인 투시는 하지 않았구요.
요동팔참이라는 것은, 저 요동 방위 중심인 요동도사로부터 압록강까지 이어지는 여덞개의 참을 말하는 것입니다. 첨수(甛水)·두관(頭館)·연산(連山)·용봉(龍鳳)·사열(斜烈)·개주(開州)·탕참(湯站)·역창(驛昌) 이렇게 이어지는 곳입니다.
즉 고려-조선에서 육로로 중국으로 사신이 간다고 하면 지나가는 길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신들이 왕래하는 길이니 나름 공식적인 루트인데, 명나라가 연산관 아래쪽으로는 손을 놓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은 그야말로
'무법지대' 가 되어버려서, 사람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길도 다져지지 않아서 그냥 미개척지대를 헤치고 나가는 수준이라 명색이 국가의 사신단이라는 따지고 보면 그렇게 먼길 가는것도 아니건만 동상 걸리고, 얼어죽고, 심지어
호랑이까지 출몰해서 사람을 공격하는 판이었습니다.
또한 이렇게 강과 산으로 이루어졌다보니
무려 수백명이 넘는 도적떄가 숨어서 사신들을 습격 하는 판이었다고 합니다.
즉 사실상 이 시기 명과 조선은 국경이 안 붙어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아무래도 과거를 다룬 세계지도에서는 이런 '공지' 를 표현하기 애매해서 걍 적당히 영향력 있는 지역을 색칠하곤 하는데... 여하간에 그래서 저 지역을 뚫고 가는건 야만인 지대 뚫고 가는것마냥 상당한 수고가 필요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태가 계속 지속되었는가?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1400년대 중반 무렵, 북방 오이라트부의 세력이 갈수록 강해지고, 정통제의 실책으로 명나라 황제가 포로가 되는 '토목의 변' 이라는 초유의 일까지 생길 정도였습니다. 한편 오이라트의 세력은 요동 지역까지 영향력을 끼쳤고, 실제로 오이라트의 동부군이 침공하는 일까지 생기자 명나라 입장에선 요동의 방위에 고심하게 됩니다.
오이라트의 준동도 그렇고 여기에 영향을 받은 여진인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아서, 명나라는 결국 요동 팔참 지역에 성을 쌓기로 결정합니다.
당시 조선은 세조 시절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되자 양성지라는 인물이 올린 상소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중국 조정에서 장차 개주(開州) 등지에 위소(衛所)를 세우려고 하니, 이것은 국가 문정(門庭)의 걱정입니다.
평안도(平安道)의 백성들은 다만 방수(防戍)에만 시달릴 뿐 아니라 또한 중국에 입조(入朝)하는 사신의 영접과 전송을 하는 데에도 매우 시달리게 되어, 태반이 동팔참(東八站)과 해주(海州)·개주(蓋州) 등 여러 주(州)에 유입(流入)하게 되므로,
한편으로는 토병(土兵)이 모두 없어지게 되고, 한편으로는 저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알게 되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비록 후일 우리의 이익이 된다 하더라도 또한 후일 우리에게 해가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개주 지역에 새로 위소를 만드는게 큰 위협이 된다는건 그걸 만들기 전까지는 거리적 문제로 큰 위협이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제 개주 지역에 새로 위소가 생기면 평안도 백성들이 사신 영접이 힘들어서 도망갈테고, 이렇게 되면서 병사들이 사질것이며, 동시에 압록강 하나만을 놓고 서로 마주보는 상황이 되니 이쪽의 정보가 노출되기도 쉽다는 우려입니다.
조선에서는 상황이 어찌될지 모르겠으니 성곽을 짓고 대비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지만 흉년 때문에 제대로 성곽을 만들진 못합니다.
생각나는대로 쓰여지다보니 다소 내용이 두서가 없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두 가지 정도가 되겠네요.
1. 여말~조선초 무렵, 요동 지역에 명나라의 세력이라던가 명나라 쪽 인적 자원은 별로 없었는가?
→ 아니다. 있었다. 심지어 깜짝 놀랄만큼 많았다. 전투병력은 15만 ~ 19만 사이에 이르렀고 이에 따른 관계자만 50만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이때가 가장 많았고 초기 이후로 더 줄어들게 된다.
2. 그럼 의주 근처에서 그 많은 명나라 관계자가 득실득실 했는가?
→ 아니다. 요동도사 중심의 명나라군은 연산관 이남으로는 조선 세조 이전까지는 물리적인 영향력을 보이지 않았고, 떄문에 의주에서 연산관까지 가는 길은 맹수에 도적떄가 출몰하는 곳이라 험하기 짝이 없었다. 한족이 아예 없지는 않았겠지만 애초에 인구밀도가 매우 적은 곳이었고, 그나마 있는 인구도 한족 보다는 여진족-조선인이 많았다.
3. 그럼 아예 명군이 근처에 간적도 없는가?
→ 있긴 있는데 초창기에서 좀 뒤로 간 무렵에 있었다.
저는 최근에 논란이 된 드라마를 아예 보지 않아서 뭐라고 이야기는 못하겠고, 제가 원래 요동 무주공산론 비판론 관련 글을 전부터 왕왕 쓰기도 해서 흥미를 느낀 주제라 두서없이 정리를 좀 해봤습니다.
사실 가장 큰 고증 오류는
앉아서 뭘 먹었냐도 아니고 그 근방에 편하게 먹고 쉬면서 기녀들 춤추는거나 보는 주점이 있는거...
실제로는 호랑이에 도적 수백마리가 출몰하는 무법지대라
국가간의 공식적인 사절도 천막 치고 벌벌 떨면서 발가락 동상 걸리며 잠자던곳..
제대로 쉴만한곳이 있다면 이제 막 출발하거나 도착하는 사신들 묵게할 관청 숙소 정도지
좀 떨어진 근방에 그런 집 지었다간 바로 영혼까지 털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