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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4/03 15:35:09
Name 아난
Subject [일반] 시가 하는 것들 (수정됨)
시가 하는 것들
1999-10-09

시는 가끔 초인적인 기개를 멋들어지게 표현한다. 니체가,

언제인가 많은 것을 일러야 할 이는
많은 것을 가슴 속에 말없이 쌓는다.
언제인가 번개에 불을 켜야 할 이는
오랫동안 구름으로 살아야 한다.

라고 말할 때처럼 말이다. 시는 또 단순히 하나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그 속에 파국에 이른 세계에 대한 느낌을 깃들일 수 있다. 바로 트라클이,

하야니 차갑게 밭이 비친다.
드넓게 펼쳐진 외로운 하늘.
늪 위에 까마귀떼 날으고
사냥군들은 숲을 내려온다.

라고 읊을 때가 그렇다. 확실히 지금의 세계가 일차대전 전후의 세계에 못지않게 절망적인 세계라고 생각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은인자중하면서 대기만성하는 초인들이 많이 필요한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초인들이라고 해서 연애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연애란 일상 속에서 일상을 초월하는 행위, 세계에 대한 더 많은 관심으로 이르는 행위일 수 있으니까. 바예흐 정도의 연애시를 쓴다면 그 연애는 둘 만의 사적 공간으로 도피하는 그런 못난 연애는 아닐 것이다.

더 이상 먼 것은 생각하지 않고
종달새를 풀어놓는, 풀어놓고 우리 서로 이야기 하는,
서슬이 파란 갓 따온 상추 이파리같이
사랑스러운 여인, 여인의 말소리.

그런 연애는 물론, 네루다가,

너에게 내 말이 들리도록
내 말소리는 때때로
해변가 갈매기의 발자국처럼/가늘어진다.

라고 노래할 때처럼 고즈넉한 기운 또한 지니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연인을 잃었을 때는 오든처럼,

이제는 별들을 원치 않는다, 모두 치워라.
달을 가리고 해를 부수어라.
바닷물을 쏟아버리고 숲을 넘어뜨려라.
이제는 이 모든 것 아무런 소용도 없으니까.

라고 절규할 줄도 알 것이다. 그 연인이 자신과 동성이든 아니든.
  
시는 가끔 노골적으로 정치적일 수도 있다.

나의 할아버지는 전사하셨다
서부전선에서,
나의 아버지는 전사하셨다
동부 전선에서, 어느 전선에서
나는 죽게될 것인가?

라고 의문을 던질때, 퇴르너는 직설법의 짧고 뾰족한 쇠꼬챙이로 내 가슴을 깊숙이 찌른다. 과연 나는 전선에 내몰리기보다는 전선을 만들어 내는 이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도대체 전지구화된 후기 자본주의를 상대로 하는 싸움에서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그런 고전적 전선이 가능하기라도 할까? 과연 무슨 전선이든 전선이 형성되기라도 할까? 그리하여 빠스가,

총같은 사실과, 분노와 진흙탕같은 증오로 포위되어 있던 너를 생각한다. 너는 바위와 칠흑 속에 갇힌 파도, 너는 땅에 떨어진 번개

라고 노래한 그런, 투쟁에 자신의 온 몸을 사르는 동지들이 우리 사이에서 생길 수 있을까? 아우슈비츠 이후의 문학에 대한 프리트의 고발은 또 어떤가?

그것은 돈의 그늘 속에서 성장하면서,
딸랑딸랑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돈이 이미 너무 커져있었기에,
돈에게 목소리를 빌려주지는 않았는지.

사회적 문제들을 서사하기보다는 그 문제들의 분위기만을 연출하거나 첨단적이고 소소하고 사적인 이야기들만 재잘되는 요즘의 한국 문학, 특히 소설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시는 가끔 형이상학적일 수도 있다. 그것은 세계와 인간과 그 사이의 언어에 대해서, 혹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한 묶음으로 얘기할 수도 있다. 송찬호가,

달이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듯
정교한 말의 장치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오랫동안 말의 길을 걸어와
처음 만난 것이 인간이다
말은 이 세계를 찾아온 낮선 이방인이다
말을 할 때마다 말은 이 세계를 더욱 낮설게 한다

라고 진술할 때, 나는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말이 많아질 수록 진실은 더 희미해지는 법이 아니던가? 말이 말을 낳고 말이 말을 가리키지 않던가? 아이히의 경우는 좀 어렵다.

밭을 지나 저 쪽으로 비둘기들이 날아 간다,
날개를 한 번 치는 것이 아름다움보다 더욱 빨라
아름다움은 그것을 따르지 못하고,
나의 마음 속에 불안으로 남는다.

비둘기가 나는 모습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나 시인은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앞지르는 무언가를 느낀다. 그것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따라서 간섭할 수 없는 완전한 타자의 세계에 대한 어렴풋한 예감이다. 그런 예감이 주는 불안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더 겸손하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은 현재 너무 편안하고 오만하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인간은 아직 너무 무지하다. 릴케의 주장처럼 말이다.

고뇌는 모르고 지냈다,
사랑은 배우지 못했다,
우리를 갈라놓는 죽음은
꺼풀이 벗겨지지 않고,
오롯 땅 위에 번진 노래만이
거룩하게 축제를 올릴 뿐.    
  
시는 가끔 시 쓰기에 대해 노래할 수도 있다. 네루다라면, 시쓰기란 대변자를 요구하는 절박한 현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민감함에서 비롯된다.

어둠과 허공 사이, 치장과 처녀 사이,
낮선 심장과 음산한 꿈들을 데불고,
철이른 창백함, 이마부터 시들어서,
내 생명의 하루하루를 여윈 홀아비, 그 성난 상복을 입고,
아, 잠 속이련 듯 마시는, 눈에 안보이는 물방울들,
떨며 받아들이는 내 주위의 모든 소리에 대하여
난 항상 똑같은 목마름과 똑같은 차가운 열병을 앓는다.

그러나 모든 시인이 네루다같이 위대해질 필요도 없고 시를 쓰는 이들이 다 시인처럼 시를 잘 쓸 필요도 없다. 휴즈가 말하는 대로 별빛의 인도를 바라지 말고 약간의 고독 속에 침잠해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대는 몇 개의 낱말들의 꼬리를 붙잡는 것만으로도 누구든 그럴듯한 시를 쓸 수 있다.

창문을 통해 나는 아무 별도 볼 수 없다.
한층 더 가까운 무엇인가가
암흑 속에 더욱 깊긴 하나
고독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차가이 어둠 속의 눈처럼 살포시
여우의 코가 닿는다, 나뭇가지에 잎사귀에.
두 눈이 동작을 알려준다, 지금 막
지금 막, 지금 막, 지금 막.

어떤가 여러분들도 한번 시도해 볼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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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3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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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리송한 시의 언어를 읽으니 싱그러운 느낌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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