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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4/14 18:11:55
Name 쉴더
Subject [일반] [13] 오동도 전세낸 이야기
오랜 벗 p님에게

오랜만입니다. 얼마 전 아프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뻔한 소리지만 역시 건강이 최고입니다. 늘 건강하시길 멀리서 염원하는 저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가끔은 떠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신과 보낸 겨울이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이렇게 계절이 변했군요. 다름이 아니라 며칠 전 꽃이 떨어진 벚나무를 보는데 새끼 잎사귀들 사이로 놀랍게도 옛 추억이 빼꼼 고개를 드는 게 아니겠습니까. 동시에 문득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설프게나마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님이 평소 관심을 가지는 명사들의 이야기에 비하면 보잘 것 없어서 좀 부끄럽네요.

그니깐 이맘때쯤, 지금보다는 좀 더 춥고 꽃이 덜 피었을 때입니다. 당시에 저는 a라는 친구를 만나고 있었지요. 발랄하고 솔직하고 좀 엉뚱한(4차원) 면도 있는, 제 마음속에서 음침하게 숨 쉬던 그늘을 밝혀주던 친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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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에 우리는 함께 봄 유람을 떠나기로 했어요. 그래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둘이 목, 금 연차를 잡게 된 겁니다. 막상 일을 벌이곤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나름 비밀스러운 관계였거든요. 그래서 목, 금 연차는 굉장히 과감한 도전이었죠. 안 그래도 창밖의 봄 구름처럼 의혹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사방에서 조여오는 의심의 눈초리 때문에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였지만 그래도 여행의 설렘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더군요. 뭐랄까, 우짜겠노 여까지 왔는데... 랄까. 둘 다 될 대로 되라 하고 유람을 계획했습니다.

그때 a가 자신의 스무 살 무렵의 이야길 하더군요. 친구랑 단둘이 서울에서 밤 기차를 타고 간 부산 여행이 그렇게 좋았다고요. 그 친구가 동성 친구였단 걸 덧붙이는 것도 빠뜨리지 않고요. 뭐, 누구랑 갔는지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어쨌든 a는 다시 한 번 그때의 추억을 재현하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무척 염려스러웠지만 a는 팔뚝을 보이고는 자신은 여전히 왕성한 체력을 자랑하고 있으며 밤을 새워도 다음날 유람 일정에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부족한 잠은 찻간에서 보충할 수 있으며, 부산 여행 당시엔 긴 여로에도 끄떡없는 체력으로 태종대 언덕을 누볐다고 하더군요. 거기까지 듣고 보니 처음엔 ‘굳이 그 생고생을?’이라고 했던 저도 뭐, 나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습니다. 당시 저희는 함께라는 것 자체가 중요했지 뭘 하느냐는 부수적인, 그야말로 풋풋한 사이였거든요.

저희는 각자 귀가했다가 어둑한 밤 영등포역 앞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목적지는 무려 여수였습니다. 여수 1일 순천 1일의 일정이었는데 여수부터 가기로 한 거죠. 퇴근 후 여수까지 새벽 열차라니 지금 생각하면 지옥의 여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친 짓이었죠.

그리고 앞으로 닥칠 고난은 상상도 못한 채 영등포역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나 사 먹으며 무궁화를 기다렸습니다. 짙은 어둠이 가득 내려앉은 시간임에도 여행의 시작은 설렜고, a와 함께여서 더 기분이 좋았습니다만... 사실 저는 조금의 불안감도 함께 느끼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나한테 다 맡겨! 라고 허세를 부렸지만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거든요. 나름 변명을 하자면 당시 매일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는 건데 당장 확실한 건 미리 구매한 호텔+해상케이블카+레일바이크 3종 세트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기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고, 새벽에 도착하면 보통 역 앞에 있기 마련인 24시간 국밥집이나 카페, 패스트푸드, 찜질방 등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할 수 있을 테니 문제는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차 탑승 후에도 머리 아픈 고민은 뒤로 미루고 이것저것 딴 짓을 하다 곯아떨어졌습니다. 나중에 a가 사라져서 찾다 보니 텅 빈 열차 구석에서 두 자리 차지하고 새우잠을 자고 있더군요. 밤 기차의 낭만은 개뿔, 지루함을 넘어 처절한 시간이었습니다. 이게 다 현대인의 피로 때문이겠지요.

여수엔 새벽 3시가 조금 넘어 도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역 앞에 도착하고 보니 보통 역 앞에 있기 마련인 것들이 없고 그냥 허허벌판입니다. 나름 ktx도 지나가는 역인데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역 앞에는 과장 없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알고 보니 엑스포를 위해 개통된 여수엑스포 역은 여수 시내에서 떨어진 외딴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역내에는 칼국수집, 특산품 판매점, 이야기길 편의점이 있었지만 모두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함께 도착한 소수의 동행들은 저희와는 달리 훗, 이 정돈 예상범위다! 라는 듯 능숙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쌩 사라졌습니다. 역에는 저와 a 둘만 남았습니다.

역 안은 개추웠습니다. 역 밖은 더 추웠습니다. 저는 티셔츠에 얇은 맥코트 차림이었는데 그래서 더욱 추웠습니다. a는 저보다는 사정이 나았지만 마찬가지로 추웠습니다. 추위보다 난감한 건 당장 무얼 해야 할지 결정된 게 없다는 거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급하게 포...포풍 검색을 했습니다. 그러니 한 가지 답이 나오더군요. 근처 오동도 일출이 괜찮다구요. 거기다 역 안에서 추위를 피하다(견디다) 역 앞에서 첫차를 타고 5분 정도 걸려 오동도 섬 입구에 도착해서 해돋이 전망대까지 걸어가면 오늘의 일출 시간이 딱이었습니다.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출 관람의 가장 큰 적은 아침잠인데 저희는 이미 깨어있잖아요. 안 그래도 아침잠이 많은 둘인데 어쩌면 둘이서 보는 처음이자 마지막? 일출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한 가지에 꽂히면 주위가 안 보이는 저는 이 운명을 믿었습니다. 다만 아직 첫차까진 2시간이 넘게 남았습니다. 저희는 앉아 있다가 추우면 역내 순회를 하고 힘들면 다시 앉기를 반복했습니다. 추위와 지루함을 견디다 벽에 붙은 갓(GOD)김치 광고를 몇 번이나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드디어 버스가 운행할 시간이 되어 승차장으로 갔는데 와 춥더군요. 바닷가 근처라 그런가. 바람이 왤케 찰진가요. 엄마가 끓여주시던 고깃국 생각이 다 났습니다. 기사님 백미러에 비친 버스 내부엔 타고 내릴 때까지 우리 둘뿐이었죠.

버스에서 내려 오동도까지 이어진 방파제 길을 걷는데 와 또 춥더군요. 밤샘으로 초췌해진 몰골에 바람 때문에 떡진 머리칼이 여기저기 뻗치고 날리고 사람은 아무도 없고... a가 말했습니다. 멀다. 춥다. 여기 유명한 거 맞아? 저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일출이 좋다면 사람이 좀 있을 텐데 목요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희한하게 섬에 도착해서까지 누구와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일출은 봐야죠. 저는 미안했지만 늦지 않도록 a를 보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섬에 들어오니 여행 기분이 좀 났습니다. 오동도는 동백꽃이 한창이었습니다. 추위를 뚫고 온 보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상쾌한 아침과 어울리지 않게 처진 분위기를 띄우려 가사도 제대로 모르는 이미자 선생님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위해 섬을 전세 냈다고 말했습니다. 둘이서 한적한 곳에 있을 때 제가 써먹는 노잼 레퍼토리입니다.

계획대로 일출 시간을 10분 정도 남기고 저희는 해돋이 전망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긴 아저씨 한 분이 먼저 와 계시더군요. 아저씨도 전세 내셨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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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사진) 오동도 해돋이 전망대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아저씨는 난간 앞 정 가운데 명당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쭈구리인 저희는 조금 떨어진 구석에 섰습니다. 아저씨는 바닷물과 바람을 다 튕겨 낼 거 같은 하이테크 등산복 상의와 모자 세트 구성에 추위에 지친 저희를 무안하게 만드는 반바지 차림이었습니다. 목에 두른 흡수력 좋아 보이는 수건과 호리호리하지만 다부진 종아리가 아주 본격적이었습니다.

아저씨는 헛둘헛둘 구호를 붙여 맨손체조를 하다 저희를 발견하고는 친절하게 해가 뜨는 방향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헛둘헛둘 하다 이곳 일출이 참 좋다고 신이 나신 듯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저희도 지금까지 고생은 다 잊고 탁 트인 바다와 아침 공기를 즐겼습니다. 정면에는 불그스름한 빛이 한껏 번지기 시작했어요.

아저씨는 잠시도 쉬지 않고 헛둘헛둘 허리를 돌리고 어깨를 돌리고 무릎을 폈다 굽혔다 하셨습니다. 정면에 한 아름 번진 다홍 빛깔은 금방이라도 팡 터질 듯 무르익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헛둘헛둘 하던 아저씨가 갑자기 홱 돌아서더니 계단을 향해 마구 뛰어올라 사라지는 겁니다. 일출 직전이었는데, 누가 봐도 조금 뒤에 펼쳐질 장관을 보기 위해 명당에 자리 잡고 계시던 모습이었는데요. 분명 저희를 위해, 단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며 오늘 하루 치 해돋이를 양보해주신 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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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와 달리 아저씨에게 이 모습은 이미 여러 번 접한 일상이겠지요. 그래도 오늘의 일출은 오늘뿐이고, 오늘은 누구에게나 소중합니다. 매일 같이 보는 일출이 그분께는 하루의 중요한 활력소일 수도 있습니다. 그걸 기꺼이 저희를 위해 양보해주셨습니다. 말씀은 못드렸지만 죄송하면서도 고마웠어요. 덕분에 그날이 더 생생히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한기로 고생한 기억으로 시작해 배려의 온기를 느끼면서요. 아무튼 그날, 오동도의 일출은 온전히 저희만의 것이었습니다. 네. 그 아침, 저희는 오동도를 전세 냈습니다.

굳이 그 이후 행적은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망했거든요. 간단히만 말하면 눈에 띄게 체력이 떨어진 a는 케이블카, 아쿠아리움 이후로 완전 녹초가 되었고, 점심으로 게장 정식을 먹은 후 입실한 호텔에서 잠깐만 자겠다며 눕더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마도’ 여수 사람이 튀긴 편의점 닭다리와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튀긴 과자와 여수 앞바다를 건너왔을지도 모를 맥주로 저녁을 때웠고 그로 인해 다음 날 아침, 분노의 호텔 조식 먹방을 하다가 심하게 체해버렸습니다. 누군가의 고향에서 튀겼을 고향만두와 토스트와 비엔나와 계란후라이 같은 걸 먹고 말이죠. 둘째 날은 날씨마저 저희를 도와주지 않더군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어떤 여행이든 추억은 남으니까요. 그래도 여수의 그 해돋이는 시간이 지나도 또렷이 생각이 납니다. 특히 이맘때면요. 섬을 가득 채운 동백꽃과 눈 앞에 펼쳐진 금빛 장관, 신선한 바람, 바다 내음, 마주 잡은 손의 온기. 그리고 아저씨의 하이테크 등산복과 미스매치 반바지까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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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한참 동안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해를 등지고 나오는 길에도 여전히 사방은 동백꽃이었습니다. 동백꽃은 붉은 잎 속에 노란 미소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오동도를 나올 때까지도 마주친 사람은 그분이 유일했어요. 커피를 마시려고 간 매점에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불러도 아무도 나오지 않더군요. 다시 마주한 오동도 방파제에는 그제야 드문드문 단체 관광객들이 건너오기 시작했습니다. 기분 탓일까요. 유난히 동백 빛깔 점퍼를 입은 분이 많아 보였습니다. 그러고보니 그날의 일출도 동백꽃을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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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시시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날 밤기차를 타지 않았다면 저희의 봄 유람은 어땠을까요. 우리 삶이 그렇듯 여행 역시 한치 앞도 예상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쓰고 보니 여행 가고 싶네요. 맘 편히 어디든 떠날 수 있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습니다.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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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오른쪽이 저희가 새벽에 추위와 바람을 헤치고 지나간 오동도 방파제입니다. 건너편이 오동도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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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프의대모험
21/04/14 19:33
수정 아이콘
그래도 기억이 추억으로 남으셨네요. 흐흐..
한살한살 더 먹으면서 느끼는건데, 이제 저런 위험한(!) 일정은 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는거...
여수낮바다
21/04/14 20:40
수정 아이콘
아 오동도의 모든 곳은 아름답습니다
동백꽃이 필 때건 아니건 다 그렇습니다

좋은 추억 또 만들러 가시길
델타 페라이트
21/04/14 22:53
수정 아이콘
이 글을 읽고 행복해졌어요.
지니팅커벨여행
21/04/15 07:29
수정 아이콘
그랬던 a가 지금 제 옆에 누워 있네요
... 허는 결말입니꺼 혹시?
아무튼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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