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회 선사로부터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일단 가보라는 말만 듣고 숭산을 내려온 묵적은 곧 자신을 찾는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이번 강호행에는 묵적만 포함된 것이 아니었다. 일행은 기개가 헌앙한 두 청년들이었다.
현일(玄一)은 스물일곱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사부는 소림오권(少林五拳)을 절정에 이르도록 연마했다고 알려진 묵균(黙均)이었으며 현일 또한 권장(拳掌)의 고수였다.
스물넷의 현초(玄初)는 묵균 선사를 사사한 점은 같았으나 현일이 권과 함께 손바닥을 사용하는 장법에 좀 더 재능을 보였다면 현초는 권과 함께 발을 사용하는 각법(脚法)에 능했다.
권법과 장법, 각법은 병기를 사용하는 무공과 달리 시전자의 몸을 무기 그 자체로 사용하기 때문에 대담한 마음가짐이 필수로 요구되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두 사람은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특히 현일과 현초가 함께 펼치는 합격술은 능히 강호일절이라 부를 만했다. 이미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손발을 맞춰왔기 때문에 서로의 눈만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경지에 올라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펼치는 정통 소림오권의 합격진 사이에 현일의 장법과 현초의 각법이 변칙적으로 어우러져 여기에 맞서는 사람은 매우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현일은 묵적과 만나자마자 대범하게 웃으면서 공손히 합장했다.
나이는 현일이 다섯 살이 더 많았으나 명본 방장과 같은 배분의 명회를 스승으로 모시는 묵적은 현일, 현초보다 한 배분이 높았다. 현일의 공손하면서도 자신을 낮추지 않는 당당함이 마음에 들어 묵적은 같이 담담히 웃어주며 합장을 했다.
묵적은 어릴 적부터 따로 떨어져 나와 대불전 안쪽의 깊은 석굴에서 조용히 수련했기 때문에 현(玄)자 배분의 제자들은 소문만 무성하게 들었을 뿐 묵적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 만큼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고 싶을 만도 하건만 현일은 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북성의 석가장입니다. 한시가 급하므로 최대한 속력을 내는 게 좋겠습니다. 식사는 하셨는지요, 사숙?”
“예, 내려오기 전에 주방에 들려 든든히 배를 채우고 왔어요.”
묵적은 현일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소림의 원칙상 배분이 차이가 나면 하대를 하는 것이 맞았으나 묵적은 소림에 적을 둔 후 눈뜨면 무공을 수련하고 눈감으면 참선을 하는 생활을 반복해왔기 때문에 소림의 법도에 익숙지 않았으며 오히려 유림의 장유(長幼)가 더 잘 맞았다.
이 점을 현일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서글서글한 미소가 양껏 커졌을 뿐이었다.
“역시 한번 화를 내면 백팔 악귀가 공포에 떤다는 명회 선사를 가까이서 모시는 사숙은 준비성이 남다르군요. 여기 제 옆에 있는 못난 사제 녀석은 자기 먹거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여 배를 곪곤 한답니다.”
옆에서 말을 듣고 있던 현초가 입을 삐죽였다.
“제가 앞가림을 못 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어린 제자들이 식성이 좋고 밥의 양이 부족해 보여 양보했을 뿐입니다.”
현일은 한번 씨익 웃고는 더 반박하지 않았다. 현초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이 말을 꺼낸 것도 그를 탓하기보다는 그저 새로 만난 사숙과 친해지기 위한 농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미소 짓고 있던 현일이 갑자기 묵적에게 고개를 돌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숙은 이번 강호행의 목적을 아십니까?”
묵적은 명회로부터 특별히 들은 바가 없었다.
“모릅니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현일은 비밀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아직 일반 무림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강호의 은밀한 정보 집단에서만 조심스럽게 돌고 있는 이야기이지요.”
묵적은 진지한 모습의 현일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잡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호탕하게 웃고 있던 사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현일의 모습이 진중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본파(本派)의 정보력도 상당한 모양이군요?”
“물론 본파의 구문당(究聞黨)이 강호의 중요한 정보들을 수집해오기는 하지만, 이번 사건은 좀 다릅니다. 본파에서 소식을 빠르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본파가 이번 살인사건의 당사(當事)이기 때문입니다.”
현일의 말은 묵적을 놀라게 했다.
“살인사건이라니, 본파에서 누군가를 사살했다는 것인가요?”
현일은 잠시 침음하더니 묵적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사숙은 황하의 장대한 물결이 세 갈래로 퍼져 세 개의 바다를 이룬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묵적은 강북 무림의 유명한 세 친우에 관한 이야기를 언젠가 지나가듯이 흘려들었던 기억이 났다.
“일형(一兄)의 말은 혹시 황삼대해협(黃三大海俠)의 일화가 아닌가요?”
“형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사숙. 편하게 부르세요. 그리고 황삼대해협의 일화가 맞습니다. 사숙도 공능(空能) 대사님의 협행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공능은 삼십 년 전에 강호에서 무(武)의 신으로 추앙받았던 공공대사의 막내 사제였다. 공능은 그의 사형만큼 무공이 뛰어나지는 못했지만, 소림의 제자답지 않은 호탕함으로 무림인들에게 인망이 높았다.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사람들과 친교를 맺으며 천하를 방랑하던 공능은 나이가 들면서 하북의 석가장(石家莊)에 몸을 의탁했다.
석가장의 장주인 석대본(石大本)과 하북팽가의 유명한 고수인 팽력당(彭力當), 그리고 공능은 비정이 난무하는 강호에서도 유난한 절친(切親)이었다.
이들은 황하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며 젊은 시절에는 갖가지 기행을 벌이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모두 어디서나 빛나는 걸출한 인물들이었으나 각자 어딘가 한 가지씩 부족한 점이 있었는데 세 명이 뭉치자 그러한 단점이 상쇄되었던 것이다.
공능은 무림의 북두로 불리는 소림의 제자였으며 그의 사형 공공대사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으로 이름을 날렸기에 강호에 어딜 가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능은 공손하며 자애로운 이였으며 덕분에 주변의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다만 공능에겐 한 가지 약점이 있었는데 무공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강호에서 일류고수로 횡도하기에는 물론 충분했으나 화려한 그의 이력에 비하면 아무래도 손색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석대본은 강북에서 손꼽히는 부귀가문 석가장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상인가문 답지 않게 우람한 몸집과 호탕한 기질로 장군감으로 불렸다.
그의 기질은 성인이 되어서도 유지되어 상인가문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무공이 강맹하여 강호에 이름을 드높일 수 있었다.
그의 약점은 아무래도 상인출신임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는지 약간은 약삭빠르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손해보는 일에 뛰어들지 않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이득을 챙긴다는 평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팽력당은 하북성 최고의 무력가문인 팽가의 장남이었다. 팽력당은 어려서부터 천고의 무재로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직접 몸으로 사도의 무리들과 부딪치며 무공이 일취월장하였다. 그야말로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팽력당의 약점은 그의 화급한 기질이었다. 불의를 보고 앞뒤 사정 가리지 않고 바로 손을 썼다가 나중에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닫고 사죄하는 것이 젊은 시절의 팽력당에게는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손속이 지나치게 매섭다는 평도 있었다. 성급한 기질에 매서운 손속은 최악의 궁합이었으므로 잘못한 일이 없는 사람도 팽력당을 보면 슬금슬금 피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약점은 삼인방이 뭉침으로서 해소되었다.
팽력당은 먼저 손을 쓰기 전에 석대본의 눈치를 보는 법을 배웠으며, 석대본은 이득이 확실치 않은 일 앞에서 머뭇거릴 때 공능의 판단에 따라 협의 이름으로 뛰어드는 법을 배웠다.
공능은 그의 상대적으로 약한 무공을 팽력당이 보완해 줌으로서 강호에 필요한 더 커다란 일을 행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그들은 황하 일대의 수적을 멸하고 사파의 이름난 마도를 처단하는 등 대범한 의협을 행하면서 강호인들의 인기를 얻었다.
부귀로 유명한 석가장의 석대본이 그들 행보의 자금을 담당하면 발이 넓어 강호의 이름난 명숙들과 친분이 있는 공능은 무림의 여러 중요한 사건들의 정보를 가져왔다. 공능이 모아온 정보를 통해 세 친우는 다음 행보를 결정하곤 했다.
또한 팽력당은 팽가의 가전무공인 혼원극무도(混元極無刀)의 무서운 고수였으므로 삼인방의 무력을 담당했다. 이미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대대로 팽가의 최고 고수에게 대물림되는 벽력도(霹靂刀)를 손에 넣은 팽력당의 무공은 절정에 이른지 오래였다.
그가 진기를 끌어올리면 잔뜩 굶주린 벽력도의 패도지강(霸道之强)이 수십장 밖의 사람마저도 오한을 느끼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도신(刀身)은 언제나 사파의 무리를 향했기 때문에 무림인들이 팽력당에게 느끼는 바는 두려움보다는 호협지의(豪俠之意)에 가까웠다.
세 친우는 젊어서는 황하 유역의 세 호수, 황삼소호협(黃三小湖俠)으로, 나이가 들어서는 세 바다, 황삼대해협(黃三大海俠)으로 불리며 강북 무림의 대들보로 자리매김하였다.
여기까지 설명하고 난 현일은 침을 꼴깍 삼켰다.
“사숙은 본파에서 누군가를 사살했느냐고 물으셨지요.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현일의 눈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오 일전 석가장의 깊숙한 내실에서 한 사람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사인(死因)은 가슴에 난 커다란 구멍이었는데 마치 화포에라도 격중당한 듯 완전히 함몰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골이 깊었으면 구멍 사이로 시신의 뒤편에 걸린 그림이 보였다지요. 허나 시신의 표정은 마치 선잠에라도 빠진 듯 차분했습니다.”
묵적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추악하고 위험한 느낌이 드는 동시에 그런 느낌이 전혀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일의 마지막 말은 그의 예감이 실현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적합했다.
“지금 생각하시는 바가 맞을 겁니다. 석가장에서 발견된 의문의 시신은 공능선사의 것이었습니다.”
묵적의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공능이 발견되었다는 석가장의 살인사건에서는 폐부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묵적의 불길한 예감은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밀폐된 내실에 곧 꺼질 듯이 불안정한 한줄기 촛불이 깜박이며 흔들렸다. 창밖에서는 시꺼먼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장내에는 현일의 오갈 데 없는 염불 소리만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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