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적 일행이 석가장에 도착한 것은 숭산 소실봉(少室峯)을 내려온 지 꼬박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석가장은 하북성의 가장 큰 도시이며 동시에 강북최고부귀가문의 명칭이기도 했다. 석가장의 가세(家勢)가 워낙 막강하여 사실상 가문의 이름이 도시의 이름을 의미하게 된 사례였다.
오늘날 누군가 도시 석가장에 간다고 하면 가문 석가장에 볼 일이 있는 것과 같은 의미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다. 석가장의 위세를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석가장의 대문 앞에 선 묵적은 잠시 고개를 들어 문 위를 올려다보았다. 좌우로 크지 않은 아담한 크기의 현판이 달려있었다.
- 석가장(石家莊)
하북성 제일가는 거부의 집을 대표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소박한 현판이었다. 담대한 느낌마저 드는 커다란 문 위에 작은 현판이 달려있는 광경은 이질적이었다.
허나 글씨를 담담히 곱씹던 묵적은 그 필적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아마 전 시대의 유명한 명사가 쓴 필체인 것 같았다.
묵적 일행이 대문 앞에서 잠시 지체하는 동안 한 중년인이 다가왔다.
검은 수염을 곱게 길렀으며 질 좋은 비단옷을 다려 입어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비단옷중년인은 묵적 일행의 앞에 기품있는 걸음걸이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떻게 오셨습니까?”
현일이 단정한 자세로 합장 하며 대답했다.
“아미타불, 저희는 소림에서 왔습니다.”
말을 더 이어가려던 현일은 상대방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오른 것을 보고 말을 멈췄다.
비단옷중년인은 무언가 생각하며 잠시 멈췄다가 곧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듯 묵적 일행을 맞이했다.
“공능선사님의 일 때문에 나오신 분들인가 보군요. 저는 석가장에서 집사를 맡고 있는 형무윤(邢務潤)이라고 합니다.”
형무윤은 강호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었으나 상계에서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현 석가장의 장주 석대본이 상인들 보다는 무림인들과 교분을 맺고 밖으로 나다니는 동안 석가장의 안살림은 형무윤의 몫이었다.
형무윤은 자칫 가세가 기울 수도 있는 어려운 상황을 특유의 온화하면서도 상대에게 신뢰감을 주는 화법으로 극복해 냈으며 오늘날의 석가장은 오히려 전대 보다 더 부흥하고 있었다.
현일은 석가장에 파견되기 전에 얼마간 배경 조사를 해 왔으므로 형무윤과 같은 지위의 인물이 직접 문 밖에서 손님을 응대하는 것이 뜻밖이었다.
“형 집사님이셨군요. 집사께서 어떻게 직접 나오셨습니까?”
“몇 가지 처리할 일이 있어 외출하는 중에 스님들을 뵀습니다. 본가에 일이 생겨 소림에 연락이 간 후, 오늘 중이면 소림에서 나오신 분들이 도착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분들인 것 같아 직접 응대한 것입니다.”
형무윤은 비록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으나 빠른 머리회전과 과감한 일처리로 무공의 고수라도 상대하기 쉬운 인물이 아니었다.
현일은 자신들의 행보를 정확히 예측한 형무윤에게 속으로 감탄하였다.
‘형무윤의 일처리는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완벽하다던데 과연 그렇구나.’
현일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무윤은 여전히 공손한 자세였다.
“추운 바깥에 오래 계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얼른 객소(客所)로 모시지요. 저를 따라오십시오.”
형무윤은 묵적 일행을 석가장의 안쪽으로 이끌었다.
담장 너머 석가장의 모습은 세련되고 장중했으나 묵적은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원은 넓었으나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어 을씨년스러웠다.
묵적 일행이 안내된 객소는 세 사람이 묵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사치스러웠다. 물론 일반적으로 석가장의 손님이라고 하면 거래를 하러 온 거부인 경우가 많을 터이니 이해가 가는 바였다.
하지만 빛바랜 갈의를 입은 세 스님들이 한껏 치장한 커다란 방에 들어서 있는 모습은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객소에 들어선 묵적 일행은 여장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 간편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곧 작업을 끝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형무윤이 입을 열었다.
“스님들께서는 물론 장주를 뵐 요량이시지요?”
묵적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객으로 왔으면 주인을 뵙고 인사드리는 것이 당연한 도리 아니겠습니까?”
“그러시다면 제가 장주께 고할 테니 잠시 쉬고 계십시오. 곧 돌아오겠습니다.”
묵적이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합장하자 형무윤은 포권한 후 방문을 열고 나갔다, 방안에는 묵적과 현일, 현초만 남았다.
현초는 생전 처음 보는 고급 집기와 가구들이 신기하여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나마 형무윤이 있을 때는 법도를 지키느라 참았으나 그가 사라지자마자 자연스레 눈이 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형, 저기 걸어놓은 비단은 윤기가 바르르 한게 인세(人世)의 것 같지가 않습니다. 저런 강렬한 붉은빛은 석양이 질 때나 보던 것인데 한낱 피륙에 저토록 우아한 색깔이 가능하기나 합니까?”
현일 역시 이제 스물일곱에 불과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현초의 마음에 자연스레 공감이 갔다. 허나 그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네가 아직 수양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일찍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인 것을 어찌 재물에 마음이 동하느냐?”
“동하기는 누가 동했다고 그럽디까. 그저 한 번도 본적이 없으니까 사형도 나만큼 신기해하나 물어봤소이다.”
현초는 입을 비죽였다. 그런 현초를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던 현일은 눈길을 돌려 묵적을 살폈다. 묵적 또한 이곳저곳 고개를 돌리며 살피고 있었다.
‘사숙역시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이런 사치스러운 장식은 처음 보나보군.’
그런데 묵적을 바라보던 현일은 묵적의 눈빛이 그저 여러 기물들을 신기해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대신 꼼꼼히 물건을 살피는 장인의 눈에 가까웠다.
현일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사숙, 뭐 찾는 게 있으십니까?”
여기저기 휘둘러보던 묵적은 현일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찾는 건 없습니다. 다만 감출 건 있군요.”
묵적의 말에 현일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감추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묵적은 눈을 깜박거리며 조용히 읊조렸다.
“저희가 이곳에 왜 왔는지 잊지 마세요.”
묵적의 말에 현일은 갑자기 잠에서 깨듯이 퍼뜩 놀랐다.
‘그래, 공능선사께서는 석가장의 깊숙한 내실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흉수는 높은 무공을 지닌 선사를 살해한 것도 모자라 경계가 삼엄한 석가장의 깊숙한 곳까지 침입한 후 별 탈 없이 빠져나갔다.’
현일은 형무윤이 나간 문 쪽을 힐끗 살핀 후 재차 묵적에게 물었다.
“사숙께서는 이번 살인사건에 석가장이 개입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묵적은 잠시 침음하다 대답했다.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들어오며 살펴보니 각종 현기(玄機)어린 절진들이 펼쳐져 있고 이를 감시하는 인원들도 상당수더군요. 그중 몇몇은 측량하기 어려운 고수였습니다. 이곳은 적지(敵地)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겁니다.”
묵적 일행이 파견된 것은 대외로는 공능대사의 유해를 수거하기 위해서였다. 공능대사는 화장으로 장례를 마쳤으며 석가장에서는 해당하는 모든 경비를 댔다.
그러나 묵적은 이번 파견이 단지 선사의 유해를 수거하는 목적만 띠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숭산을 떠나기 전 그의 스승 명회 선사는 이번 사건이 마록고림에서의 혈사와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는 암시를 주었었다.
묵적은 무엇 하나 허투루 듣는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선사가 자신을 파견한 것에는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형무윤과 같이 두뇌회전이 빠른 인물에게 허점을 내보여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현초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석가장의 장주인 석대본 대협은 일찍이 선사와 막역지우(莫逆之友)셨는데 이번 사건에 석가장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지나친 억측 아닙니까?”
묵적은 다시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였다.
“물론 억측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억측이 아니길 빌어야겠습니다.”
현일은 사숙의 말에 대놓고 반박을 하는 현초에게 눈치를 주는 중이었다. 그런데 묵적이 석가장의 개입이 억측이 아니길 빌어야 한다고 말하자 이번만큼은 현일 또한 아연해져서 말없이 묵적을 쳐다보았다.
묵적은 입가의 온화한 웃음기를 그대로 유지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석가장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이번 살인 사건의 흉수는 그야말로 죽음의 신(神)과 같은 능력을 보유한 자일 겁니다. 그런 자를 상대해야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는군요. 대신 이번 사건이 죽음의 신이 아니라 피육을 지닌 인간이 벌인 짓이라면...”
순간 묵적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며 진중한 기운이 감돌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결할 방법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는 추악한 인간의 냄새가 나는군요.”
다시 나타난 형무윤은 장주께서 시간이 나셨노라며 그들을 석대본의 거처인 백청각(白 靑閣)으로 안내했다.
밖에서 볼 때는 몰랐으나 담장 안의 석가장은 광활하고 복잡했다. 게다가 각종 절진들이 숨겨져 있어 외부인의 출입이 가능해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이리저리 꺾으며 도착한 석대본의 거처는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 속에 잠겨있었다. 넓은 화원에는 꽃들이 만발하고 있었고 그 중앙에 정갈한 누각 한 채가 세워져 있었다.
형무윤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어가 누각의 문을 두드렸다.
“장주, 소림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잠시 후 문 안쪽에서 오래된 고목(古木)같이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들라 하게.”
형무윤의 안내를 받으며 묵적 일행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백청각의 바깥은 온갖 꽃과 기이한 식물들로 감싸져 있었으나 정작 누각의 안쪽은 단촐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더라면 그저 평범한 여염집이라고 오해할 만큼 별다른 장식 없이 간결했다.
그리고 방의 끝, 한 노인이 색 바랜 나무의자에 앉아있었다.
묵적의 그를 처음 본 인상은 한그루의 느티나무 같다는 것이었다.
상인답지 않게 떡 벌어진 어깨와 굵은 눈썹은 남자다워 보였으며 육순이 넘은 노인이니만큼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으나 오히려 큰 고목이 세월의 풍파를 견딘 훈장과도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그런 기운과는 맞지 않게 그가 무척 피곤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물론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상대해야할 인물도 많을 것이며 얼마 전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직접 처리해야할 일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지친 모습이 그의 강인한 모습을 퇴색시키는 것은 사실이었다.
“장주께 인사드립니다. 묵적입니다.”
“현일입니다.”
“현초입니다.”
투박한 나무의자에 앉아있던 노인에게서 예의 고목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갑네. 내가 석대본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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