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일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한 후 청천벽력같은 유상철 前 선수이자 감독의 부고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유상철 감독이 투병 중이었던 췌장암은 항암 치료 과정이 매우 힘들며, 사망률 또한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나오는 근황 소식에서 '잘 이겨내고 있다'라는 유상철 감독의 말을 조금이나마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선수 시절과 감독 시절을 통해 그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상철이라면, 왠지 모르게 어떠한 병이라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랜 투병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고가 더욱 갑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30대 축구팬들과 마찬가지로, 제가 본격적으로 축구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98년 프랑스 월드컵』이었습니다. 당시 차범근호가 아시아 예선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경기력 때문에,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을 향한 국민들의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습니다. 더구나 바로 이전 월드컵이었던 『94년 미국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스페인과 독일이라는 강호 들을 벼랑 끝까지 몰고갔었던 만큼, 월드컵 첫 승과 16강 진출이 더 이상 꿈이 아닌 것으로 느껴지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무참히 산산조각 났습니다. 지금도 자주 회자되는 하석주의 선제골 직후 백태클 퇴장으로 인한 멕시코전 1-3 패배, 그리고 마치 어린 아이와 어른 간의 경기를 연상시킬 정도로 손 한 번 쓰지 못했던 네덜란드전 0-5 패배. 전혀 예상하지 못한(어쩌면 한국만) 결과에 국민들과 선수, 코칭 스태프들의 좌절은 상상 초월이었습니다. 차범근 감독은 사상 초유의 '대회 도중 경질'을 당하며, 네덜란드전 직후 한국에 마치 죄인처럼 귀국하게 됩니다. 이미 마음은 16강 저 멀리 가있었던 국민들에게, 탈락이 확정된 상태에서 펼쳐지는 벨기에전은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버려진 경기'였습니다.
벨기에에게 선제골을 먹히며 끌려가던 경기. 김태영, 이상헌과 같은 수비수들이 몸을 날리는 육탄 방어를 하면서 겨우겨우 버티던 이 경기에서 유상철은 후반 26분 하석주의 프리킥을 오른발로 밀어넣으며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 골을 통해 한국은 다시 분위기를 반전 시키며 벨기에를 밀어 붙일 수 있었고, 16강은 불가능해졌지만 월드컵 첫 승을 향한 마지막 투혼을 불태울 수 있었습니다. 벨기에전은 졸지에 '버려진 경기'에서, 한국의 역대 월드컵 중 최고의 혈투 중 한 경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유상철의 감독 시절만을 알고 있는 어린 팬들에겐 그저 사람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느낌이지만, 선수 시절엔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으로 경기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꾸는 마초적인 힘이 있었던 선수였습니다.
그 후로 3년 뒤,『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멕시코전은 유상철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경기입니다. 히딩크호의 출범 이후 줄곧 불안불안했던 경기력, 3년 전 네덜란드 전의 악몽을 떠오르게 했던 1차전 프랑스전 0-5 대패, 게다가 상대는 역시 3년 전 대패를 안겨준 멕시코. 이런 복잡한 스토리들이 엮여 있어 경기 내내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펼쳐졌던 이 경기에서 유상철은 후반 45분 종료직전 역전 헤딩 결승골을 기록합니다.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를 통해 밝혀졌던 놀라운 사실들은 전반전에 유상철은 코뼈에 골절 부상을 당했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의지로 후반 출장을 강행하여 '헤딩골'을 기록했단 점이겠지요. 월드컵이나 대륙컵도 아닌, 사실상 친선 대회 정도의 위상이었던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악화될 가능성이 있는 부상을 달고 뛰며 결승골을 넣은 점은, 작은 부상에도 철저히 관리해주는 요즘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유상철이라면 그가 부상 때문에 경기를 마다하는 그림도 쉽게 그려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유상철은 항상 매 경기를 결승전처럼, 커리어 마지막 경기처럼 뛰었던 선수입니다.
2002년 월드컵 10년 후, 2012년의 히딩크의 당시 일화 회자
축구팬들 외에 대중에게 알려져 있는 유상철의 이미지는 기술과 축구 지능은 별로 없으며, 오로지 타고난 신체조건으로만 축구를 했던 선수일 것 입니다. 이 때문에, 화려한 클럽/대표팀 경력에도 불구하고 온갖 조롱에 시달린 적도 많았습니다. 플래쉬로 제작한 인터넷 게임이 한참 붐이었을 무렵에는, 골대 위로 슈팅을 많이 날렸던 점에서 착안하여 만들어진 '홈런왕 유상철'이라는 게임이 밈으로 유행했던 적도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멀티 플레이어 선수에 대한 가치를 정확히 몰랐던 시절, 유상철의 멀티 플레이어 능력을 그저 '땜빵력'으로 치부했던 경우도 많았습니다.
프로 선수 레벨을 넘어 사활이 걸린 국제대회 레벨에서 많은 포지션을 소화하는 것은 보통의 BQ와 양발 감각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매일같이 소화하지 않는 포지션이 주는 어색함은 동일한 수준 혹은 더 상위 수준의 상대팀을 상대할 때 엄청난 경기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감독들에겐 언제나 해당 포지션에 다른 선택지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상철은 매번 다양한 포지션에서 중용되었습니다. 게다가 한창 경기력이 물이 올랐던 98년 이후 울산 현대와 요코하마 F.마리노스에선 유상철은 프리롤(Free Role)에 가까운 역할로 두 리그 통산 69경기 39골을 넣었습니다. 이처럼 K리그와 J리그 등 아시아 상위 리그에서 만큼은 절대 투박한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상철은 자신을 향한 온갖 조롱에도 싫은소리 한 번 하지 않으며, 본인의 이미지와 경력에 관계없이 팀에 잡음 한 번 일으키지 않은 채 대표팀에서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내며, A매치 124경기 출장(18골)의 위업에 4강 신화의 주역으로 활약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유상철에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저는 '한국 축구의 영혼'이었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최근엔 어린 나이에 유럽진출을 통해 손흥민, 이강인 같이 세련된 선수들도 배출할 수 있는 한국 축구가 되었지만, 이 나라에 축구가 도입된지 약 반 세기 동안 '한국 축구'하면 떠오르는 특유의 올드 스쿨(Old School)한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국제대회 기준으로 볼 터치나 드리블같은 기술적으로는 조금 투박하여도, 강인한 체격과 지치지 않는 체력과 기동력, 포기하지 않는 근성, 양발을 잘 쓰며, 팀에 대한 무한한 헌신 등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 유상철이었습니다. 팀 보다는 선수 개인의 신체와 커리어가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요즘과 같은 트렌드로는 앞으로 유상철과 같은 선수를 보기가 힘들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너무 이른 시점에 우리 곁을 떠나게 되었지만, 앞으로도 '한국 축구의 영혼'이자 후배들의 '영원한 롤모델'로 그의 정신 만큼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지 않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