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판
:: 이전 게시판
|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1/08/22 15:58
청야전술은 애초에 불리한 쪽에서 쓰는 필살기 같은 전략입니다. 민간 물자까지 태우는 전략이다보니,
이겨도 휴유증이 엄청 크거든요. 그러니, 이긴 뒤엔 대외적인 홍보라도 크게 하는거고요. 상세한건 나무 위키를... https://namu.wiki/w/%EC%B2%AD%EC%95%BC%20%EC%A0%84%EC%88%A0
21/08/22 16:13
저는 실제로 고구려가 민간 물자까지 다 소각시키는 청야전술을 필살기로 사용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으로 생각합니다.
첫째로 그런 대대적인 행정 명령을 필요로 하는 전술을 계속 사용할 정도로 전쟁의 기간이 길지도 않았고, 둘째로 몽골의 침략에 맞서 최후의 발악으로 산성별감과 같은 행정직을 두고 정말로 평야를 포기하고 산과 섬으로 사람과 물자를 옮기는 의도된 청야전술을 사용했던 고려시대에 비해 고구려-수 전쟁에서는 그러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으며,(후대의 당나라의 기록만 봐도 고구려는 가난한 땅이다, 진창길때문에 군대의 기동이 고생이라는 말은 많이 나와도 고구려가 비겁하게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는 식의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구려 백성들에 대한 선전이 잘 먹히지 않아서 걱정이라는 기록은 수나라 시절부터 나오고) 마지막으로 지방 거점만 겨우 통제하는 것에 그쳤던 고구려가 그런 전술을 사용할 정도로 지방 통제력이 강했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남기 때문입니다. 이미 의도적으로 청야전술을 사용한 것과 거리가 멀다고 밝혀진 러시아 원정조차도 나폴레옹이 '비겁하게 모스크바에 불을 지르고 떠나냐, 이건 신사들의 전쟁 방식이 아니다'라고 항의하고 러시아 측에서 '무슨 소리냐, 그건 그냥 사고에 불과하다, 우리 측이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갑론을박을 펼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는 까닭도 크겠습니다만, 고구려-수 전쟁에 있어서는 그런 종류의 사건에 관한 기록이 전혀 관측되지 않습니다.
21/08/22 16:24
고구려 군의 움직임을 보면 요동성에서 수나라 본대가 묶였을 시점부터 목표는 단기결전으로 적의 공격능력 분쇄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다만 그 대상은 수나라 별동대가 아니라 내호아의 수군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평양성으로 드랍이 가능한 루트만 박살내면 적은 공세를 유지할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요. 을지문덕의 지연책은 별동대와 수군의 합류를 저지하기 위한 의도적인 전술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전 실제로 내호아가 상륙 했을 시점에서 고구려 본영이 멸망을 직감했을 가능성도 높다고 봅니다. 내호아는 고구려 대군과의 결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평양 근교에 상륙하는데 성공했으니까요. 다만 공명심 때문에 내호아가 아군의 합류를 기다리지 않고 평양성으로 공격에 들어갔고, 그 결과 패퇴하면서 기껏 만들어 놓은 보급 루트를 다시 빼앗겨버렸죠. 그 시점에서 수나라의 승리 가능성은 0% 수렴합니다. 살수대첩도 뒷처리에 가까운 전투죠
21/08/22 16:31
저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내호아의 수군이 상륙했을때가 정말 절체절명의 순간이었고, 실제로 내호아 휘하 부대의 단독 공격만으로도 평양 외성이 함락될 정도로 위기이기도 했죠.
21/08/22 16:51
살수대첩도 대단한 전투지만 사실 패잔병 학살 대작전에 가깝고.. 500명으로 평양성 문 열어주고 4만명 격퇴해서 전쟁의 향방을 꺾어버린 거니 고건무의 평양성 전투가 사실 한국사 육군 대전 중에 거의 원탑급이 아닌가 싶습니다. 귀주대첩도 사실 승기를 거의 다 잡은 상태에서의 전투였고, 행주대첩도 객관적인 규모가 아주 큰 전투는 아니었다고 보면 말이죠.
굳이 하나 더 넣으면 연개소문의 사수대첩도 있겠지만 이미 한반도의 큰 줄기의 역사가 좀 정해진 상태였다 보니 묻히는 감도 있고..
21/08/22 16:56
육군판 명량대첩이라고 봐도 크게 무리는 아니죠. 그런 전쟁 영웅이 오히려 중국에 사대하면서까지 전쟁을 피하려고 하는 평화주의자 왕이 되었다는 것도 시사하는 점이 큰 것 같습니다.
전쟁을 겪어본 사람일수록 전쟁을 두려워하고, 정작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일수록 전쟁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 또한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죠.
21/08/22 16:44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요즘들어 전투보다는 이런 대전략적인 측면이 너무 재밌습니다. 전략 목표 설정! 병력 배분! 장수 통제! 거점확보! 보급! 파면 팔수록 옛날 사람이라고 멍청하긴커녕 오히려 제한된 상황에서 현대인 못지 않게, 혹은 뛰어넘는 수읽기로 판을 짜고 행동하는 게 가슴 뛰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혹시 이런 주제로 읽을만한 책이 있으면 추천 부탁드려도괜찮을까요?
21/08/22 16:49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전공자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책은 동양사에 대해서는 케임브리지 중국사를, 전쟁사는 Warfare in the Classical World를 추천합니다
21/08/22 18:09
번역본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왠지 번역서의 제목이 훨씬 재밌어 보이는 느낌입니다 흐흐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재밌는 책입니다. 일단 대부분의 역사책과 달리 그림과 병력 포진도를 비롯한 시각자료가 무척 많이 실려있어요.
21/08/22 16:58
중국 정사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실제로 을지문덕을 사로잡는 걸 비겁한 짓이라고 반대한 유사룡은 이후 분노한 수양제의 손에 목이 잘립니다.
21/08/22 17:12
주제와 동떨어진 부분이라 본문에서는 쓰지 않았는데...
최초로 세워진 조선을 이후 세워진 조선과 구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 것처럼 우리는 먼저 세워진 '고려'를 '고구려'라고 부르고 있죠. 저는 고구려도 그냥 고려라고 칭하는게 여러가지 측면에서 훨씬 나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구려는 수나라가 침략하기 훨씬 이전인 장수왕 시절부터 이미 국명 자체가 그냥 '고려'였고, 수나라와 당나라의 사서에서도 '고려'라고 나오죠. 이후 다른 '고려', 그 고려를 이은 조선이 세워졌을때도 주변 국가들은 모두 우리를 여전히 '고려'라고 불렀고요. 사실 지금까지도 동서양 모두 우리를 '고려(korea)'라고 부르고 있죠. 아마 먼저 세워졌던 고려의 원래 국명이 고구려였기도 하고, 굳이 뒤에 세워진 고려랑 구분한다고 '고고려'라고 부르거나, 뒤에 세워진 고려를 '후고려'라고 부르기보다는, 그냥 먼저 있었던 고려를 더 고대의 국명이었던 고구려라고 부르기로 우리 사학계의 합의가 모아진 것이겠지요. 하지만 차라리 고씨왕조, 왕씨왕조 고려로 구분하는 쪽이 훨씬 나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중국의 동북공정이 꽤 껄끄러워졌을 수도 있으니까요. 특히 이런 문제에서 사소한 단어의 차이가 가지는 힘은 생각보다 크죠.
21/08/22 17:43
고거슨 이씨 조선 일제 비하설이 남아 있는 한 힘든 일이 아닐까 합니다.
별개로 저도 고구려 고려는 이름을 좀 더 강하게 연관시키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몽골에서 '아니 너희 옛날엔 수나라도 이기고 그러더만 요샌 왜이럼?' 할 때 현대인이 느끼는 벙찜 문제도 그렇고요.
21/08/22 18:11
말씀하신대로 이미 힘든 일이 되버리긴 했죠. 이런 문제는 첫 단추를 잘 꿰는게 중요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안타까워요.
물론 그때 당시만 해도 중국이 설마 고구려까지 자기네 역사라고 우기는 날이 올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을 못했겠지요.
21/08/22 19:02
마지막 문단은 이조라는 용어가 일제의 비하식 용례로 굳어진 이상 쉽지 않을듯 합니다.
그리고, 용어라는게 한번에 정해진게 아니라 꽤 오랫동안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거라서.. 인위적으로 바꾸기 어렵다.라는 문제도 있습니다. 실제로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육과정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각각 [임진전쟁] [정유전쟁]으로 바꿨다가 한국사와 용어 통일도 안되고, 학생들 혼란만 키워서 현 2015 교육과정에서 다시 왜란으로 원위치 되었던 사례도 있으니까요. 사실 왜란이라는 용어 자체가 당시 전쟁의 의미를 축소해석하려고 애쓰는 느낌이 없는건 아닙니다만(당시 조선 지식인이 세계적으로 전쟁을 이해하지 못했을수도 있습니다), 이미 오랜 세월 왜란, 호란으로 굳어버린 이상 인위적으로 용어를 바꾸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어 소개드립니다.
21/08/22 18:44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글을 읽고 나니 드는 생각입니다만 수나라 별동대가 식량을 군인들에게 무리하게 짊어지고 가도록 한 것이 현지에서 물자를 조달(약탈)할 시간도 고려하지 않은 속도전을 생각한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청야전술보다는 수 양제의 조바심이 더 중요한 패인은 아니었을까 생각도 듭니다.
21/08/23 09:46
말씀하신대로 수양제 입장에서도 무척 초조했을 거라고 봅니다. 실제로 3-4차 침략때도 고구려를 몰아붙이다가 국내 반란 때문에 회군해야 했으니까요. 멀리 원정을 나온 군주 입장에서는 오래 자리를 비우면 항상 뒷통수가 간지럽기 마련이죠.
21/08/23 11:48
러시아 원정에서 러시아군은 청야전술이고 나발이고 그냥 뭘 해볼 시간도 없었습니다. 전쟁과 평화에서도 상황이 "어제는 OO가 함락 됐다더니 오늘은 OO가 함락됐다고? 뭐 이리 빨라?"라는 식으로 언급되는데 보로디노까지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없었던 것이 러시아군이 병력을 모아서 뭣 좀 해버리면 프랑스군이 벌써 와버려서 일단 물러나고, 그걸 프랑스군이 또 쫓아가고, 이걸 반복한 상황이었죠.
보로디노에서 결국 프랑스군이 이기고 모스크바를 점령했을 때 나폴레옹이 시간을 끌지 말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달려 갔으면 전쟁이 끝났을 것을 모스크바에서 시간을 너무 끈 게 패인이었죠
21/08/23 14:15
말씀하신대로 러시아군은 청야전술 같은 걸 계획할 시간도 의지도 없었죠. 뭘 좀 해보려고 하면 번개처럼 들이치는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 때문에..
그리고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점령했을때는 이미 9월 중순경이었습니다. 그대로 지체하지 않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달려간다고 해도 두 달 가량은 걸릴텐데, 그렇게 되면 이미 겨울입니다. 러시아의 벌판에서 겨울을 맞는다는 건 모두가 알다시피 파멸을 의미합니다.(실제로 나폴레옹의 군대는 후퇴하는 길에 그렇게 되었지요) 아마 나폴레옹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달려가고 싶었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