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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9/10 17:03:14
Name 항즐이
Subject [일반] [뻘글] 이름의 장례 - 名葬
호이람의 이름을 언급하시는 군요.

- 그는 여기서 어떻게 불리는가?

전설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 언제부터?

누구에게 물어봐도 아버지로부터 그리 들었다고 할 겁니다.

- 그럼, 뼈가 하얗게 드러났군.

무슨 말이십니까?

- ... 류겐의 이름은 어떤가?

그야 그는 전공 만큼이나 내치의 과도 적지 않으니까요.

- 그걸 우리는 그저 아직 그의 살점이 남아 썩고 있는 중이라고 하지.

초원의 땅에서 오신 분들의 장례 습성에 관한 이야기입니까?

- 그렇기도 하고

... 괜찮으시다면, 갈 길도 먼데 소일삼아 가르쳐 주시면 좋을 듯 하군요.

- 우리는 전사의 최후를 이곳 사람들처럼 요란스럽게 하지 않아. 그건 시선 돌리기 같은 것이지. 시끄럽게 꽹과리를 치고는 서둘러 땅 속에 묻어 버리지 않나.

저희 예절이 못마땅 하신 것도 이해는 합니다만..

- 먼 도시에 찾아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일을 맡은 내가 그런 감정을 들고 올 리는 없지. 우리들이 생각하는 바가 그렇다는 것 뿐이야.

그렇다면 초원에서는 떠난 이들을 계속 볼 수 있게 하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이로군요?

- 글쎄, 역시 우리도 그냥 배운대로 살아가는 것에겠지만.. 굳이 해석하자면야 이름과 육신의 장례가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해야겠지

이름의 장례?

- 어느 전사나 죽음 직후에는 아쉬움과 비통함 같은 가까운 감정을 담아 불리지. 그야 아직 그의 모습이 생생하고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생전 그대로니까.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지만 온전한 형태의 대상을 가장 좋아하지. 내게 해를 끼치지도 않고, 내가 원하는대로 불러도 아무런 불만이 없으니.

확실히 그렇지요.

- 이 나라에 동상이 많은 이유도 아마 그런 것일텐데, 그러면 이름이 썩질 않아.

명성에 담긴 허울을 걷어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 썩는다는게 흉하기는 하지만 나쁘기만한 것은 아니지. 시체가 썩는 것을 본 적이 있나?

그럼요. 저도 때로 남쪽으로 가 활을 쏘고 북을 치는 장수가 됩니다.

- 그럼 잘 알겠군. 생전의 모습은 잠깐 유지되고, 금방 부풀어 오르며 온갖 것들이 꾀지. 색이 변하고 향이 변하고 도대체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어 가끔은 누가 누구인지도 알아보기 힘들어.

이름도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 전사도 사람이고, 한 생을 살아왔는데 자네들 광장에 곧게 선 저 동상처럼 칼을 움켜쥐고 어딘가를 노려보는 일만 했을리는 없잖은가. 삶의 여정에서 얽혔던 모든 은원과 사소한 인연들이 온갖 말들을 늘어놓으며 이름을 부풀렸다가 뒤집었다가 헤집고 찢어놓는 시간이 오는 법이지.

그리고는.. 뼈가 되는군요.

- 그래, 독수리가 물어가거나 빗물에 쓸려 내려가는 불운이 없다고는 못하지만 결국은 뼈가 남지. 살점이 붙어있는 흉한 모습도 잠깐, 건기의 모래바람이 몇 번 불면 하얗게 남은 뼈가 그의 마지막 칼과 함께 누워있게 되지.

그렇다면...

- 이름도 마찬가지야. 오래된 뼈를 보며 우리가 그 전사의 사소한 어리석음과 실수를 기억하려 하던가? 아주 오래된 이름은 그저 한 두 마디의 인상을 남길 뿐이야. 더 이상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하지만 뼈도 결국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 후후. 옛 나라의 전사들은 고사하고 왕들도 그 이름이 희미해졌는데, 자네는 이 나라와 역사가 영원하리라고 믿나? 어느 독수리나 빗물이 저 동상을 쓸어버릴 날이 언제가 될지 어찌 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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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0 17:08
수정 아이콘
이상하다... 제목을 '이릉의 장례'로 보고 삼국지 글인 줄 알고 헐레벌떡 들어왔는데....
이른취침
21/09/10 17:25
수정 아이콘
없으면 본인이 직접 써오시는 성의를 좀 보여주세요^^
항즐이
21/09/10 19:04
수정 아이콘
얼른 안쓰고 뭐하십니까
원시제
21/09/10 19:09
수정 아이콘
이릉의 장례라는 글 오피셜 트레일러가 나왔다고 해서 와봤습니다.
카바라스
21/09/10 21:27
수정 아이콘
삼국지에 뇌가 절여져서 가정의 의미가 바뀐..
21/09/10 20:16
수정 아이콘
(수정됨)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면서, '잊혀질 권리'가 필요한 현대인을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지금 세상은 얼마나 그들에게 당혹스러운지를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가장 쉬운 역사의 용도는, 수백년 전 사람에게 '노예를 부렸다',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여성편력이 심했다'라며 비난하는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초원의 망자에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요.

https://www.nytimes.com/2021/09/08/us/robert-e-lee-statue-virginia.html
현지시간 어제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그러니까 남북전쟁 당시 남부맹방의 수도였던 곳에서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이 해체되었습니다.
전쟁터에서 그를 본 병사들은 아버지로 따랐으며, 적장은 남부문화의 신사적인 면모는 다 가진 사람이라고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군재는 노예제의 영속화를 위해서 사용되었으며,
패배하고서도 미국 남부의 주 공교육은 '주의 자치권을 위해서 일어난 정당한 전쟁 속의 신사'의 이미지로 리를 꾸몄지요.
인종차별주의자들 또한 '리가 승리했다면, 교양있는 딕시가 속물 양키에게 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일련의 논란 끝에, 그의 동상은 해체되었습니다.
명예란 무엇일까요. 그것도 사라지지 못하고 길게 남아서 수백년 뒤의 사람들조차 볼 수 있는 전장의 명예란 무엇일까요.
차라리, 피를 흘리고 땀을 흘리며 전쟁터에서 살아있는 그 사람을 본 이들에게만 존재할 수 있던 것이 명예가 아닐까요.

라는 생각이 드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세인트
21/09/11 15:26
수정 아이콘
좋은 글에 좋은 댓글. 제가 PGR을 접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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