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1/11/05 07:34:56
Name 글곰
Link #1 https://brunch.co.kr/@gorgom/147
Subject [일반]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3) (수정됨)
-1992-1994 : 아버지와 나 / 영원히 / 껍질의 파괴 / The Dreamer / The Ocean




그다지 길지 않았던 솔로가수 생활을 끝낸 신해철은 다시 한 번 밴드를 구성한다. 이후 90년대 후반 대한민국 가요계에 큰 족적을 남긴 그 밴드의 이름은 바로 N.EX.T였다.

N.EX.T의 이름으로 내놓은 첫 번째 앨범 [Home]에서 상업적으로 인기를 끈 곡은 사랑을 노래한 발라드인 [인형의 기사]와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경쾌한 곡에 실은 [도시인]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앨범은 후반으로 갈수록 신해철의 자아성찰적인 모습이 강해지는데, 특히 [아버지와 나 PART 1][영원히]에서 그런 성향이 매우 두드러진다.



내 키가 그보다 커진 것을 발견한 어느 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신해철, [아버지와 나 PART 1]



굳이 프로이트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아버지를 극복한다는 건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관문이다. 신해철은 노랫말을 통해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토로한다. 자신은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을. 아울러 그러한 선택에 대해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스펀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그의 모습을 닮아 가는 나를 보며
이미 내가 어른들의 나이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러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처럼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이 두렵다

-신해철, [아버지와 나 PART 1]



단지 나이가 들었다 해서 성인이 되지는 않는다. 소년을 진정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버지의 삶에 대한 부정과 반항심이 아니다. 한 발짝 더 나아가, 불완전하게나마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통해서만 소년은 비로소 아버지와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다. 그렇기에 [아버지와 나 PART 1]은 신해철에게 있어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는 선언문과도 같다. 그렇게 자신의 자아를 확립한 그는 세상에게 길들여지지 않겠노라고, 세상에 맞서서 소년 시절의 꿈을 지켜가겠노라고 당당하게(혹은 오만하게) 외친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에 길들여짐이지
남들과 닮아가는 동안 꿈은 우리 곁을 떠나네

-신해철, [영원히]



이렇게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다잡은 신해철은 다음 앨범에서 자신의 내면을 마음껏 펼쳐놓기 시작한다. 그 자신이 초래한 대마초 사건과 밴드 맴버 간의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제작 과정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던 N.EX.T의 2집 앨범은, 역설적이게도 그 때문에 신해철의 충만하다 못해 과잉이기까지 한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걸작이 되었다. [The Destruction of the Shell: 껍질의 파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은유했음이 명백한 제목을 지닌 이 긴 노래에서 신해철은 선언한다. 세상에 굴복하는 대신 맞서 싸우겠노라고.



부모가 정해 놓은 길을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
친구들과 경쟁하며 걷는다
각본대로 짜여 있는 뻔한 인생의 결론 향해
생각 없이 발걸음만 옮긴다
세상은 날 길들이려 하네
이제는 묻는다
왜, 왜, 왜

-신해철, [The Destruction of the Shell: 껍질의 파괴]


그러한 신해철의 선언은 [The Dreamer]로 이어진다. 제목부터 꿈이라는 낱말이 강조되는 이 노래는 앞서 언급한 [The Destruction of the Shell : 껍질의 파괴]와 같은 선상에 위치해 있다. 새에게 있어 알은 곧 세계이며 알에서 나오려면 반드시 먼저 껍질을 깨뜨려야만 한다. 신해철에게 있어 그 껍질이자 세계는 바로 자신의 꿈을 가로막는 절망이기에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난 아직 내게 던져진 질문들을
일상의 피곤 속에 묻어 버릴 수는 없어
언젠가 지쳐 쓰러질 것을 알아도
꿈은 또 날아가네 절망의 껍질을 깨고

-신해철, [The Dreamer]



하지만 그 과정이 결코 쉽거나 편하지는 않다. 그것은 ‘언젠가 지쳐 쓰러질 것을’ 예감하는 험난한 길이며, ‘나를 모두 불태울 힘든 꿈’이다. 그리고 끝내 자신의 바람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기나긴 고독 속에서 홀로 영원히’ 있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해철은 끝내 꿈이라는 단어를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그에게 꿈은 곧 자신의 존재 이유이며 먹물 든 사람들이 즐겨 쓰는 프랑스어인 레종 데트르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해철에게 있어 꿈을 잃는다는 건 곧 존재 이유를 부정당하는 것과 같다. 그는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한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후회는 없을 것이라고.



세월은 이렇게 조금씩 빨리 흐르지만
나의 시간들을 뒤돌아보면 후회는 없으니
그대여 꿈을 꾸는가 너를 모두 불태울 힘든 꿈을
기나긴 고독 속에서 홀로 영원하기를 바라는가
사라져 가야 한다면 사라질 뿐
두려움 없이

-신해철, [The Ocean: 불멸에 관하여]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열혈둥이
21/11/05 08:58
수정 아이콘
아버지와 나
를 어렸을땐 몰랐죠.
아버지 돌아가시고 이 노래를 들으면서 한시간은 울었던거 같아요.
휀 라디언트
21/11/05 11:34
수정 아이콘
고등학교때 영원히라는 노래를 진짜 말 그대로 테이프가 늘어질때까지 들었습니다.
아마 글곰님의 글에도 계속 반복될테지만 제가 생각하는 90년대 신해철 노래의 메시지는 일관되게 '꿈'이였습니다.
계속 나이를 먹어가고 그에따라 변해가는게 사람이라는 존재의 인지상정임에도 계속 이를 부인하며 소년과 꿈이란 단어를 끊임없이 되뇌입니다.
초심을 잃지 말자는 그의 되새김질임이든, 아니면 그냥 그저 어른이 됨을 부정하고싶은 유아틱한 자기애이든, 제가 그 메시지에 동화되었음은 부인할수가 없군요.
베드로는 닭이 울기전 예수를 세번 부인하였지만, 저는 그가 제 청소년기의 나의 메신저임을 긍정하겠습니다. 지금도 소년이고 싶고 꿈을 따르고 싶군요.
及時雨
21/11/05 12:35
수정 아이콘
넥스트 2집이 참 좋죠.
신해철식 과잉과 백화점식 구성이 가장 효과를 나타낸 앨범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몇곡 다시 듣는데 50년 후의 내 모습은 곡명만 봐도 씁쓸해지네요.
21/11/05 13:25
수정 아이콘
멜로디 없는 가사가 머리와 가슴을 쾅 치네요.
김연아
21/11/05 15:02
수정 아이콘
Fight! Be Free! Destruction of the shell!!!!!!!
이대로 살아야 하는 가아~~~~~~

넥스트만 해도 myself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무방한 밴드 음악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헤비메탈을 들고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강헌과 진중권이 예전에 서태지/신해철 관련 팟캐스트 한 거 들어보면,
신해철이 서태지가 대단한 깡다구를 가진 사람이고,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하는데,
당시 신해철 위치에서 이런 곡 들고 나온 것만으로 신해철 역시 깡으로 온 몸에 두른 사람이었죠.....
세인트루이스
21/11/06 05:53
수정 아이콘
"강헌과 진중권이 예전에 서태지/신해철 관련 팟캐스트" 이거 저장해놓고 한 10번은 넘게 들었습니다.
강헌씨가 신해철씨와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다는게 좀 놀라웠고, 덕분에 신해철씨에 대해 많은걸 알게돼서 좋았습니다.
김연아
21/11/06 08:58
수정 아이콘
역대급 회차였죠

강헌의 증언이 너무 생생해서 저도 여러번 돌려들었어요
21/11/05 23:56
수정 아이콘
그리워요.
간혹 들리는 이곳에 글곰님 글이 있어서 좋구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3969 [일반]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4) [10] 글곰11201 21/11/06 11201 24
93968 [일반] 그냥 <MCU>랑 <예술영화> 둘다 좋아하는 사람이 본 <이터널스> [37] coolasice9207 21/11/05 9207 2
93967 [일반]  Feel the rhythm of korea 신곡이 발표되었습니다. [22] 어강됴리10336 21/11/05 10336 0
93966 [일반] 화이자 코로나 치료제 중간 임상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28] 아야나미레이13746 21/11/05 13746 6
93965 [일반] 나의 면심(麵心) - 막국수 이야기 [24] singularian8492 21/11/05 8492 39
93964 [일반] (미국주식)오늘부터 ALL IN 숏에 출사표 던집니다 [103] 기다리다16793 21/11/05 16793 9
93959 [일반]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3) [8] 글곰10089 21/11/05 10089 22
93957 [일반] 한국 최초의 일본 라이트 노벨, 판타지 & 어드벤처 노벨 [14] 라쇼13858 21/11/05 13858 2
93956 [일반] 웹소설 추천 [34] wlsak11760 21/11/04 11760 5
93953 [일반] 죽음과 삶에서의 죽음의 역할 (번역) [1] 아난7656 21/11/04 7656 5
93951 [일반] 최근 중국에서 발생한 미투 사건 [22] 맥스훼인17223 21/11/04 17223 1
93950 [일반] 요소수의 난: 석탄이 요소수랑 뭔 상관이래? [86] 닉네임을정하라니19339 21/11/04 19339 20
93949 [일반]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2) [13] 글곰10402 21/11/04 10402 33
93947 [일반] 대놓고 스포/ 이터널즈, 생각만큼 나쁘진 않은데 추천은 못하겠다 [42] 오곡물티슈11884 21/11/03 11884 3
93946 [일반] <이터널스> - 욕심과 과욕(스포?) [22] aDayInTheLife10341 21/11/03 10341 4
93942 [일반]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1) [25] 글곰9968 21/11/03 9968 33
93941 [일반] 일본 중의원 선거에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들 [78] 이그나티우스13995 21/11/03 13995 90
93940 [일반] [주식] 투자 INSIGHT: 피셔인베스트 "주도주에 투자하라" [18] 방과후계약직9966 21/11/03 9966 2
93938 [일반] 일본 중의원선거 간단 요약 [75] Dresden16286 21/11/02 16286 16
93936 [일반] (뇌내실험) 어떤 신이 기도를 들어주는 '진짜' 신인지 보는 연구 [76] 여수낮바다14688 21/11/02 14688 10
93935 [일반] 개로 사람을 잡아죽여도 되는 나라 [121] 착한글만쓰기18314 21/11/02 18314 41
93934 [일반] 강아지는 천국에 갈 수 있나요? 로봇 강아지는요? [20] 오곡물티슈10565 21/11/02 10565 18
93933 [일반] 오징어게임 가상화폐, 그들만의 오징어게임 [34] 바둑아위험해10926 21/11/02 10926 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