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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5/26 11:30:04
Name 청순래퍼혜니
Subject [일반] [15] 불안이 시작된 날 (수정됨)
어린 시절 내 동생은 뭔가 잘못을 하면 단 한번도 부모님께 잘못을 시인한 적이 없었다. 온 집이 떠나가라 악다구니를 쓰며 집안의 물건을 집어 던지던 그녀와 절망적인 표정으로 두서 없는 분노의 괴성을 지르시던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그 사이에서 벌벌 떨며 눈치를 보던 어머니의 모습. 이것이 나에게 가장 익숙한 유년기의 모습이었다.

사실 그 시절 동생이나 나나 뭐 특별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었다. 밖에서 사고를 친 것도 아니었고 딱히 눈에 띄게 공부를 못한 것도 아니었다. 불량 식품 먹지 말라고 하면 먹지 않고 오락실 가지 말라고 하시면 가지 않았던 반항기라곤 찾아 볼 수 없던 그냥 평범한 아이였다고 생각한다. 동생 역시 뭐 지금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딱히 집 밖의 모습은 광견 같은 집안의 모습과는 달리 밖에서는 그저 조용하고 살짝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수준이었고 큰 사고를 치거나 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린 아이가 저지를 법한 무슨 소소한 잘못으로 남매가 부모님께 같이 혼나게 되는 상황이 되면 그냥 잘못했습니다 한 마디 하면 될 상황을 내 동생은 언제나 거대한 재앙으로 만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왜 나만 혼내냐며 바락 바락 악을 쓰며 문짝을 걷어차고 욕을 하는 동생과 수십 분간 싸우고 난 아버지 어머니는 진이 빠져서 그 동안 납작 엎드려 무릎 꿇고 있는 나에게는 그저 진저리를 치며 '방에 들어가 공부해'라는 말만 중얼거리셨고 나는 저린 다리를 억지로 펴고 방으로 들어가 책을 펴고 공부 하는 척을 하는 게 루틴이었다.

아마 동생은 그렇게 방으로 사라지는 나를 보며 더더욱 자기만 차별대우 받고 자기만 혼나서 피를 토할 정도로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나는 동생이 자는 동안에 나를 죽이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난 동생의 마음 따위는 읽고 싶지도 않았고 사실 그 당시에는 그녀가 가족은 고사하고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피하는 게 상책인 괴물이라는 생각만 했다. 솔직히 난 단란한 가족이란 걸 지금까지도 이론과 상상을 통해서만 그려낼 수 있다. 그리고 결국 만들지도 못했지만.

상황이 늘 그렇게 돌아가다보니 부모님은 뭔가 자식들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인지 칭찬이든 훈계든 한쪽에게만 할 바에는 아예 회피해버리셨던 것 같다. 그렇게 참고 억누르고 기묘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다가 뭔가 한 마디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상황에 아버지가 어설픈 훈육을 시도 하면 동생이 컴플렉스에 가득찬 절규로 맞받아치고 또 다시 고성이 오가고 어머니는 벌벌 떨고 나는 눈치를 보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난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한다. 그 분들은 진심으로 자식들을 아꼈고 자식들을 위해 뭐든 하셨다. 허나 감정 표현은 극도로 자제 되었고 대화가 서투르다보니 서로를 이해할 만큼 마음을 열었던 기억은 없다. 너무나도 서로가 조심스러워서 사랑 받는 것으로 추측되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확신은 없었다.

오랫동안 그 어린 시절 첫 단추부터 이상하게 꿰어졌던 동생과의 관계에 대해서 늘 깊은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기이할 정도의 열등감과 발작에 가까운 증오의 원인은 도무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녀와 나는 수십 년을 같은 집에 살았지만 어떤 대화의 기억도 없다. 대화 없이 이 뒤틀린 관계를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알 수 없는 원인을 억지로 해석하려다 보니 '아 내가 뭔가 잘못을 한건가. 내가 쓰레기인건가...' 와 같은 자학적인 결론 밖에 내지 못했다. 죄를 저지른 기억이 없는데 죄인이 되어버리는 대상을 만나는 것이 편할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감정적 자산도 없는데.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할 생각은 없다. 그저 무기력하게 모든 갈등을 병적으로 회피하며 살아온 나날의 시작 지점을 거슬러 올라가 오랫동안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기억을 꺼내 본 것 뿐이다. 긴장 상태와 갈등 상태를 회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 어린 시절에 미움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사랑 받기 위해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경험을 쌓아 올렸다면 인생 궤도가 이런 식으로 흘렀을 지 가끔 궁금하다. 그냥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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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둣돌
22/05/26 17:02
수정 아이콘
우울증을 앓고 있는 제 딸아이를 관찰하면서 제 아내가 우울증에 걸려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됐습니다.
국립대 교수를 아버지로 둔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한 제 아내가 우울증에 걸린 이유를 찾아내기 힘들었는데, 장모님이 우울증 진단을 받는 것을 보고 큰 흐름이 보이더군요.

제가 내린 결론은 아래와 같습니다.
장모님은 70여년 전 가부장적 시골분위기에서 부모님의 극단적 통제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올케에게 어린 시절 많이 시달렸다고 합니다.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내면화 되었고, 그 것이 우울증인 것이죠.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특징이 매우 방어적이라는 것입니다.

우울증으로 장모님은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녀들을 돌보는 것이 너무 벅찬 일이 돼 버렸을 거에요.
그 여파로 너무 어려 부모에게 모든 것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식들도 자포자기와 외부의 스트레스를 피하는 방어적 자세가 습관으로 굳어졌을 겁니다.
지금도 늘 기운없이 누어서 지내는 장모님과 집사람을 보면서 우울증을 떠올립니다.

제 얘기가 길어졌는데, 님 동생분의 그 이유없는 반항은 아마 부모님의 우울증 여파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지고, 이는 그 선대에서 원인을 제공했을 겁니다.
제 딸과 아들의 경우를 놓고 가늠해 보면 성격이 유순한 딸애는 우울증으로 빠졌고, 반항적 특성이 강했던 아들은 분리불안증으로 특정 물건에 집착하는 현상이 있었지만 나름 잘 극복해서 지금은 정상적 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이를 님에게 대입해보면 동생분보다 님이 더 큰 상처를 입고 우울증에 시달릴 공산이 큽니다.

우울증은 약물치료가 도움이 많이 되지만 결국은 스스로 객관화 훈련을 통해 개선해 나가는 방법밖에 없어 보입니다.
밤과 낮을 바꿔 사는 딸내미가 몇쳔의 치료끝에 그래도 오전에 공원으로 산책까지 나가고 있어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청순래퍼혜니
22/05/26 21:41
수정 아이콘
말씀대로 한때 심한 우울증을 앓긴했지만 지금은 일상 생활에 아무지장 없을 정도로 회복되어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둣돌님 말씀에서 정말 생각지도 못한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우울증을 앓고 계실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어요.
수십년간의 심리적 자포자기 상태와 속내를 제대로 표현 못하시는 성향들... 이런 것들 때문에 원래 그런 분들이다라고 생각하고 그저 제 무기력함만 탓하고 지내고 있었는데 그 동안 상처 받은 만큼 치유 받지 못한 채 방치 되었을 부모님 마음을 뒤늦게야 생각하게 됩니다.

좋은 조언 진심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는 저보다 훨씬 큰 상처를 끌어안고 살았을 두 분 마음 다독일 수 있도록 노력해 보려 합니다.
난이미살쪄있다
22/05/27 15:49
수정 아이콘
어렸을 적 소심하고 겁많던 저는 늘 집에서의 이탈을 꿈꾸었지만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서울로(집은 지방입니다) 대학을 진학하는 것이 그당시 제가 생각한 유일한 합리적 이탈수단이었고 서울 상경에 성공했습니다.
그 이후야 뭐.. 공부에 열의를 잃고 대충 살고있죠. 그당시 열심히 공부하던 저를 아는 사람들은 니가 더 잘 나갈줄 알았는데 의외다 라고 말하지만.. 스트레스 없이 대충 편하게 사는게 삶의 목표라서 다들 말하는 부자나 출세나 이런 건 부럽긴 하지만 그것을 위해 달리진 않게 되더군요.

"긴장과 갈등상태를 회피하기위해 최선을 다했던 어린시절"이라는 부분이 눈이 확 들어와 tmi한 댓글을 달게 되고 말았네요.
이제와 생각하면 제 사회초년생 시절의 사회적 분위기와는 다른(그 당시엔 욜로나 이런 것은 없었어서) 삶의 태도를 꽤 이르게 가지게 된 이유가, 쓰신 글처럼 어렷을적 이미 긴장과 갈등에 지쳐 버려서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도 글과 댓글 보니 널부러져버렸던 저와 달리 많은 생각을 하시면서 현재를 위해 노력하시는 것 같아 응원합니다.
읽음체크
22/05/27 17:06
수정 아이콘
저희 누나도 맨날 자기만 혼나고 저는 혼내지 않는다고 남녀차별이다, 장남만 편애하는거냐? 이런식으로 대응했었는데(초딩 저학년 주제에 대응수준이 참 크크)
제눈엔 저는 그냥 무던했던 반면, 누나는 성격이 드세고 민감해서 짜증폭발이 심햇던 탓이었죠.
누나가 짜증내고 대들어서 혼난건데 왜 날 물고늘어지냐고 뭐라고 했고 그래서 치고박고 싸웠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 과정이 없었으면 누나는 가부장제의 희생양이라고 스스로에게 건 굴레를 벗지 못했을꺼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사이가 좋은편이진 못했을꺼구요.

자기가 받아야 할 대우는 생득적이고 고정값을 보장받는 무엇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대우가 불만족스러우면 자기탓일리가 없으니(태어나면서부터 이정도는 받아야 된다고 보장된거니까!)
세상이 억까하는거라는 피해의식이 생기죠.
일종의 계급의식인건데 이걸 깨줘야 서로가 편합니다. 조선시대 몰락한 양반의 인지도식이랑 다를바 없는 불행이에요.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대판 싸워보심이 어떨런지..
콩순이
22/05/30 13:31
수정 아이콘
비슷한 성격의 자매가 있어서 그 고통을 아는데, 대체로 순하고 체제순응적이었던 제가 보기에 늘 사서 매를 버는것 같은, 악을 쓰고 대들어서 또 혼나는 자매가 정말 이해가 안갔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더라구요. 그냥 이러니 저러니 분석하려고 해봤자 원래 그런 인간인겁니다. 결혼하고 애가 큰데도 여기저기 악 쓰고 싸우고 난리칩니다. 가족들한테만 그래요. 밖에 만난 사람들한텐 천사처럼 굴어요. 기나긴 고생 끝에 저는 손절했고 제 삶은 정말 평화롭습니다. 그냥 이해하려 하지 마시고 쟤는 원래 저런 애라 생각하고 사세요. 가족이라고 형제라고 부모라고 다 잘지낼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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