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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6/19 20:28:53
Name meson
Subject [일반] [장르론] 우리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수정됨)
우리는 왜 소설을 읽을까요? (혹은, 읽어야 할까요?)
문단 관계자라면,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사회의 감추어진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라고 답할지 모릅니다.
반면 대중 소설가라면, 재미있기 때문 아니겠냐고 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다수 독자들의 의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이란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게 되면, 무언가 금기를 범하는 듯한 기분이 조금이나마 느껴집니다.
학계에서 다루고, 교과서에 실리고, 수능에까지 출제되는 소설들은 대개 시대의 모순을 반영하거나 사회 문제를 비판하거나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소설들이 ‘정통’처럼 느껴지고, 대중소설들은 흥미 위주라 ‘문학성’이 낮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하지만 정말로 그런지를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미 널리 알려졌다시피 소위 ‘순문학’ 내에서도 문학성이 무엇인지 합의된 바는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문학성이란 문학 작품의 예술성인데, 어떤 작품이 예술성이 있는지 없는지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순문학’이 제도권 내에 있어 원류 행세를 하지만, 소설이 본래 흥미 위주에서 시작했다는 것도 현재는 공공연한 사실이죠.
그리고 이쯤 되면 소설의 목적이 여럿(최소한 둘)은 아닌가 의심해보게 됩니다. 그 둘이란 물론 주제 전달과 이야기 전달입니다.

우선 ‘순문학’ 전통에 따르면, 소설의 주 목적은 주제 전달입니다. 이를 위해 서사 속에 주제를 녹여내는데, 녹여냈기 때문에 얼핏 보아서는 주제를 온전히 읽어내기 힘들고 이 때문에 평론가가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설에서 이 주제가 얼마나 잘 표현되었는가, 또 주제의 내용이 얼마나 유의미한 것인가에 따라 소설의 가치가 매겨지죠.
반면에 대중소설에서는 주제보다 서사가 더 중요합니다. 이 서사의 힘이란 결국 얼마나 재미있느냐, 얼마나 감탄스러우냐, 얼마나 울림이 있느냐, 같은 것들로 정의됩니다.
그리고 서사가 얼마나 흡인력 있고 독자를 매혹시키느냐에 따라 소설의 가치가 매겨지죠.
거칠게 줄인다면, ‘순문학’은 독자를 가르치려고 하는 반면 대중소설은 독자를 즐겁게 만들려고 합니다. (이런 견지에서 저는 ‘순문학’보다는 ‘계도소설’이 더 어울리는 명칭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면 계도소설 측에서는 대중소설의 저급성을 주장하며 우열을 논하려 하겠지만, 계도소설의 기준을 소설의 본령으로 전제한 것 이외의 주장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일단 서로 주안점부터 다르니까요.
소설로써 주제를 전달할 때 훨씬 효과적으로 다가오는 경우는 분명히 있고, 그런 소설들이 좋은 소설인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계도소설로써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힘을 극대화해 서사와 묘사로써 재미, 감동, 전율을 선사하는 소설이 있을 때, 그것은 좋은 계도소설은 아닐지 몰라도 좋은 대중소설일 수는 있죠.

물론 소설이라면 다들 주제와 서사를 갖추고 있으므로, 실은 어떤 작품이든지 계도소설적으로도 읽을 수 있고 대중소설적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대개의 경우에는 계도성이 강하냐 대중성이 강하냐가 잘 보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계도소설인지 대중소설인지 관습적으로 분류가 되죠.
하지만 간혹 가다 계도소설로도 훌륭하고 대중소설로도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데, 그런 소설은 중간소설이라고 불립니다. 사실 이 경우에는 양측의 장점을 겸비했으므로, 제 개인적으로는 중도(中道)소설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쪽에도 중간영화라는 개념이 존재하는데,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대표적인 중간영화입니다.)

따라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저는 재미를 기대하고 소설을 읽으며 간혹 새로운 통찰을 얻기 위해서 읽기도 하고, 그 둘을 겸비한 소설을 최고로 친다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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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의삶
22/06/19 20:58
수정 아이콘
읽을 때는 도저히 놓을 수 없는 재미를, 덮고 난 후에는 계속 곱씹게 하는 기회를 주는 작품이 좋은 작품 같습니다.
백년 동안의 고독,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성, 위화의 인생, 엔도 슈사쿠의 침묵 등이 생각나네요.
어쨌든 선후는 재미가 먼저, 통찰이 나중이므로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저는 재미가 그나마 우선한다고 보네요.
잠이온다
22/06/19 22:18
수정 아이콘
저는 소설의 최고 장점을 묘사의 한계가 없다는 점으로 치고, 이 부분은 다른 매체가 대체하기 힘든 압도적인 장점이라고 보기 때문에 소설을 읽습니다. 다른 매체(특히, 시각적 매체)의 경우 만든이의 의도가 반영되는 정도가 굉장히 높은 장점이 있는 반면에 만드는 비용이 매우 크기 때문에 묘사에 제약이 가해지는 경우가 많죠. 반면 순수한 글은 의도의 반영도는 좀 떨어질지라도, 표현에 한계가 없고 독자 개개인의 상상으로 묘사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도 좋게 봅니다. 그런 부분에서 다른 매체들과 다른 재미가 있다고 보고요.
22/06/19 23:18
수정 아이콘
묘사에 한계가 없다... 맞는 말씀입니다.
BibGourmand
22/06/19 23:05
수정 아이콘
재미는 필요없는데 지금껏 알려져 있지 않았던 정보를 원한다면 논문 보면 됩니다. 재미는 필요없는데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면 전공서적 보면 됩니다.
짧고 간결하고 데이터 정리까지 잘 돼 있는 걸 놔두고 문장으로 엮인 긴 이야기를 본다는 건 거기서밖에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겠죠.
저는 그 무언가가 문장과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오는 재미가 문학을 읽게 합니다.
이민들레
22/06/19 23:27
수정 아이콘
주제의 전달에 힘쓰는 문학 별로 안좋아합니다..
야통이
22/06/19 23:29
수정 아이콘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는 책에서 언급한 문학의 의의가 기억에 남습니다. 문학이란 특정 심리적 효과를 유발하는 고도의 장치(테크놀로지)라는 것. 10대 때는 문학이 막연하게 글이라는 수단을 통한 주제의식의 전달이라고 생각했고 20대 때는 텍스트가 줄 수 있는 고유의 즐거움을 반영하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즐거움의 강렬함, 효율성(시간, 비용)이 다른 매체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지 않나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고 곰곰이 경험을 떠올려보니 아직은 글이 주는 효과를 대체하기는 멀지 않았나는 생각이 듭니다.
22/06/20 00:41
수정 아이콘
오.. 어떤 심리적 효과인가요?
카이.엔
22/06/20 00:45
수정 아이콘
작가의 독특한 고민을 일반독자가 이해가능한 수준으로 납득시킬 때 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소설이 탄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했어요. 독특한 고민이 경제적 난관을 만나면 러시아 문호가 되는 거 같고요. 독특함을 모두 담아내기에 영상은 (아직?) 한계가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피지알 안 합니다
22/06/20 01:49
수정 아이콘
소설은 감상하면서 여유있게 곱씹고 생각할 수 있죠. 소설을 읽는 다는 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나 사물을 어떤 매체보다 더 깊숙이 이해하는 과정이고 인간이 상상력을 극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저는 고전부터 장르문학까지 가리지 않고 읽는 편인데 그래서 순문학 대중문학 가르는 걸 좋아하지 않고 그냥 다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순문학으로 분류되는 소설을 읽는다고 딱히 주제의식을 찾으며 공부하듯이 읽진 않습니다. 그런 게 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읽으면 재미가 떨어져서요. 소설 뒤에 적힌 평론도 전문가 의견이 아니라 남의 의견이라고 생각하고 읽습니다. 순문학도 순문학만의 재미가 있어요. 시를 읽듯 조금 더 공들인 문장을 읽는 재미도 있고 깊은 통찰에 놀라기도 하고 좋은 작품을 감상했을 때 드는 정서적 만족감도 넓게 보면 재미의 일종이죠. 전 19세기의 유럽 대하소설을 가장 좋아하는데 사실 순간의 몰입감이나 재미는 오늘날 장르소설에 비하면 덜하거든요. 그런데 다 읽고 난 뒤의 만족감이나 재미 생각하면 제 취향에는 이것들만한 게 없어요. 읽을 때 넉넉한 시간과 다소 인내심이 필요하긴 하지만요.

결국, 게임할 때와 유튜브 볼 때 재미의 종류가 다르듯 어떤 종류의 문학이 재미없고 재미있다는 것도 선입견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취향의 문제인 것이고 굳이 평가하려면 대중성 정도로 평가할 순 있겠지요. 주제의식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학의 종류를 주제의식에 따라 가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설 롤리타에 대해 당시 평론가들이 교훈이나 주제에 대해서 물었는데 나보코프가 내 소설에는 그딴 것 없다고 일침한 적이 있다고 하죠. 주제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 아니긴 하지만요. 사실 문학은 작가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는 것인데 이걸 그냥 뭉뚱그려 주제라고 하는 건 작품을 너무 단순화하는 개념이 아닌가 싶습니다. 문학을 학습할 때는 좋겠지만 소설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감상에 독자의 영역이 크다는 건데 주제에만 집중을 하면 그 장점이 없어지는 거니까요.

아무튼 뭔가를 감상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재미겠죠. 소설 읽기도 마찬가지고요. 재미는 취향의 영역이 큰데 이 취향도 재미있는 게 사람은 나이나 상황에 따라 같은 것을 보아도 다르게 느끼거든요. 이건 같은 작품을 시간 텀을 오래 두고 보면 확실히 느낍니다.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보는가도 의외로 영향이 크고요. 저는 감상을 인생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로 삼고 있는데 이 행위는 하면 할 수록 오묘한 점이 있어요. 지금 결론은 세상에 취향은 정말이지 아주 다양하다. 취향을 너무 강요하지 말고 내 취향을 과신하지 말자 입니다. 언제든지 변하는 게 취향이니까 폭넓은 감상을 하려고 합니다. 세상엔 좋은 게 정말 많더라구요. 평생 봐도 모자랄만큼요.
22/06/20 02:35
수정 아이콘
정독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도 확실히 있는 것 같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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