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 후에 스물살이 되어있을 네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다. 네 세대도 여전히 대학을 무조건 가야하는 곳으로 여기고 있을까. 대학에 갔다면 무엇을 공부하고 있을까. 그보다도 내가 궁금한 건 네가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이다. 이미 커버린 너에게 이런 질문을 직접 하긴 어렵겠지. 하지만 이렇게 해두면 나중에라도 네가 읽어볼 기회가 있지 않을까.
헤르만 헤세는 결코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단편동화 중에서 ‘아우구스투스’를 어릴 적 읽었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너에게 말한 적이 없지만, 내가 좋아했던 작가는 제임스 조이스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고 영문과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잠시나마 고등학생 때 했었다. 영문과 교수였던 아버지의 반대로 경영학과에 가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올바른 선택이었다. 문학에 빠져 고등학교 때 성적이 하락하는 걸 본 부모님은 취직을 위해 경영학과를 강요했지. 인서울 20위권 대학에서 인문학 대신 실용학문을 공부하게 해주신데 지금은 감사하고 있다. 그래도 가끔 생각한다. 만약 성적이 좋아서 영문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럼 난 지금쯤 ‘율리시스’에 관한 정보와 수많은 해석들로 머리를 채우며 살고 있었을까.
‘아우구스투’는 하도 오래전에 읽어 순서나 세부적인 내용은 상당히 틀릴 수 있다. 이야기는 한 여인이 남자에게 버림받아 혼자 아이를 낳아야 하는 장면에서 시작했던 거 같다. 뭔가 특별한 사람 같아 보이는 옆집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금방 친해졌지. 그녀에게 할아버지가 난데없이 말한다. 내가 많은 걸 주지 못하지만, 네 아들을 위해 하나 해줄게. 네 아들을 위해 소원 하나만 빌면 그걸 이루어주마. 벌써 말도 안 된다고 난리를 칠 네 얼굴이 보인다. 동화니까 그냥 들어두렴.
그녀는 고심 끝에 소원을 말한다. 너라면 무엇을 빌었겠니? 그녀는 말이야. 아들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길 빌었단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아우구스투스라고 지었지.
아우구스투스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 아무도 그의 매력에 저항할 수 없었지. 자신의 매력으로 원하는 걸 모두 얻어낼 수 있다는 걸 어린 시절부터 깨달은 그는 조금씩 삐뚤어지기 시작했어. 그의 어머니도 걱정은 했지만 말할 수 없었지. 모든 여자들이 그의 사랑을 얻기 위해 달려들었고, 모든 남자들은 그와 사귀기 위해 어떤 물질적 대가도 지불했어.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이 이십대의 아우구스투스에게 일어났어. 그가 정말 원하는 한 고귀한 여인이 눈앞에 나타난 거야. 그런데 그녀는 세상의 다른 여자들과 달리 그를 밀어냈어. 유부녀라서 그랬나. 알고보니 그녀도 그를 사랑했던 거야.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가진 삶을 버릴 수 없기에 그를 내치게 되지. 충격받은 그는 이제 세상을 조롱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기에만 몰입하게 된다. 그렇게 몇십년을 살고 나니 아우구스투스는 너무도 지쳤어.
그런 그에게 옆집 할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 그리고 그에게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지. 아우구스투스는 말한단다. 자신이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다음 날 일어난 아우구스투스가 직면한 건 자신에게 이용당했던 사람들의 분노였어. 그들이 더이상 아우구스투스를 사랑하지 않게 된거야. 그들은 그를 빈털터리로 만들고 감옥에 처넣었어.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어. 예전에는 너무나 멍청하고 하찮아 보였던 그들을 사랑하게 된거지. 감옥에서 나온 가난한 그를 세상은 박하게 대했지만, 그는 세상의 모든 작은 곳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어. 마지막에는 옆집 할아버지 곁으로 돌아가 조용히 죽어.
12살쯤이었나. 이 이야기를 처음 교회 형에게 들었지. 그 때 든 생각은 ‘당연히 사랑받는게 좋은 거 아닌가’였어. 그러고 금방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 이야기가 이후에도 가끔씩 생각났다. 사춘기 이후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사랑을 되돌려받지 못하더라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좋은 일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던 거 같아.
돌이켜보면 오십년을 살면서 난 계속 답을 찾았던 거 같아. 물론 사람이란게 사랑을 주고받는 동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 하지만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란게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물질이나 성격, 특성을 향한 거라면 그게 전부인가. 네가 어떤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고 해. 넌 그의 무엇을 보는 걸까. 너희가 육체적인 매력을 서로 느끼며, 비슷한 취미를 공유하며,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게 사랑인가? 만약에 그가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이상 소유하지 않는다면 너는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걸까.
사람 자체를 좋아한다는 게 무의미한 말인가? 어쩌면 세상이 나에게 주는 사랑이란게 대부분 내가 가진 성질에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걸까. 내가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보았기에 내 자신이 싫었던 것일까. 난 이용가치가 높아서가 아닌, 존재만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어서 혼자 힘들었던걸까.
난 아직도 사랑을 받을 능력이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 예전 같지는 않단다. 그건 내가 나이가 들어서일 수도 있고, 내 기독교 신앙이 예전과 달라져서일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은 사랑을 하는 능력을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원한단다. 사람을 사람이란 이유만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난 그게 기독교적 신앙의 본질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인간이 되든, 난 너를 사랑할 거다. 물론 나쁜 선택을 하면 슬프겠지. 그래도 나는 여기에 남아서 너를 위해 기도할 거다. 그런 사랑을 네가 언젠가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어쨌든 넌 이제 선택을 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너에게 사랑을 할 능력과 사랑을 받을 능력이 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니? 그게 네 삶의 방향을 결정할 거야.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라고 해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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