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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9/02 00:27:56
Name SAS Tony Parker
Link #1 서울대
Subject [일반] [재업]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 서울대 졸업식 축사 전문 (수정됨)

안녕하세요, 07년도 여름에 졸업한 수학자 허준이입니다.

우리가 팔십 년을 건강하게 산다고 가정하면 약 삼만일을 사는 셈인데, 우리 직관이 다루기엔 제법 큰 수입니다. 저는 대략 그 절반을 지나 보냈고, 여러분 대부분은 약 삼 분의 일을 지나 보냈습니다. 혹시 그중 며칠을 기억하고 있는지 세어 본 적 있으신가요? 쉼 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우리가 오랫동안 잡고 있을 날들은 삼만의 아주 일부입니다.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 주고 있습니다. 마무리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졸업식이 그런 날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하루를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학위수여식에 참석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 중 하나가 졸업 축사가 아닌가 합니다.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한 자기 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겁이 나서, 아니면 충실하게 지내지 못한 대학생활이 부끄러워 십오 년 전 이 자리에 오지 못했습니다만, 여러분은 축하받을 만한 일을 축하받기 위해 이를 무릅쓰고 이곳에 왔습니다.

졸업식 축사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요? 십몇 년 후의 내가 되어 자신에게 해줄 축사를 미리 떠올려 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축사를 지금 떠올려 보는 것도 가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연하게 떠오르는 말은 없습니다. 지난 몇천 일, 혹은 다가올 몇천 일간의 온갖 기대와 실망, 친절과 부조리, 행운과 불행, 그새 무섭도록 반복적인 일상의 세부 사항은 말하기에도, 듣기에도 힘들거니와 격려와 축하라는 본래의 목적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구체화한 마음은 부적절하거나 초라합니다.

제 대학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잘 쉬고 돌아오라던 어느 은사님의 말씀이, 듬성듬성해진 성적표 위에서 아직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지금 듣고 계신 분들도 정도의 차이와 방향의 다름이 있을지언정 지난 몇 년간 본질적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 큰 도전,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끝은 있지만 잘 보이진 않는 매일의 반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힘들 수도, 생각만큼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거부하라.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진짜 꿈을 좇아라. 모두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입니다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고민해 봤습니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오래전의 제가 졸업식에 왔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고민했습니다만 생각을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그가 경험하게 될 날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가슴 먹먹하게 부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선물할 어떤 축사를 떠올리셨을지 궁금합니다.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 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같이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하니 들뜬 마음에 모든 시도가 소중해 보입니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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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게 도배 문제로 스연게에 올렸던 허준이 교수님의 축사입니다. 자게 유저분들도 읽어보시면 깊은 울림을 얻으실거 같아 재업합니다
나름 전공이 도서쪽 전공이라 글 쓰는건 가끔 하는데
이 퀄리티는 못따라잡겠네요  크크크
저서 몇권 안내주시나 너무 바쁘신가 나오면 좋겠습니다
수학을 문학으로 풀어내는거 가능하실거 같은데 말이죠
출판사님들 일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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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사람
22/09/02 00:39
수정 아이콘
자신의 길을 알고 성공한 사람은 없다 자신의 길을 믿고 걸어가면 성공에 도달할 것이다. 멋진 말씀입니다.
22/09/02 01:06
수정 아이콘
https://www.youtube.com/watch?v=OLDhaqosPtA

괜찮으시다면 영상도 추가하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목소리가 좋으시네요..
SAS Tony Parker
22/09/02 07:31
수정 아이콘
추가 완료
22/09/02 11:26
수정 아이콘
이렇게 담담하게 응원해주시는게 오히려 더 가슴에 훅 와닿을 때가 있더라구요.
악하서
22/09/02 09:47
수정 아이콘
좋네요. 감사합니다.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nm막장
22/09/02 10:09
수정 아이콘
어우 저도 너무 좋아서 제 페북에 올렸어요
난 사람은 난사람이다 싶고
저 글쓰기 감성은 아마 작가셨던 어머님한테서 물려받은게 아닌가 싶으요
뜨거운눈물
22/09/02 10:58
수정 아이콘
미국에 스티브잡스가 스탠퍼드 대학교 축사가 있다면
우리나라엔 허준이 교수에 서울대 대학교 축사가 있다고 할 정도로 명문입니다.
많은 말을 하신건 아니지만 그 중에 생각나는 여러 문장들이 1주일이 지난 지금도 제 마음 가운데에 있네요
antidote
22/09/02 11:31
수정 아이콘
한 때 작가를 꿈꾸기도 했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거 같긴 합니다.
22/09/02 13:46
수정 아이콘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22/09/03 19:59
수정 아이콘
다시 읽어도 좋네요
멋진신세계
22/09/04 10:37
수정 아이콘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제 스케쥴러 맨 앞에다가 고이 옮겨적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2/09/05 20:46
수정 아이콘
최근 본 글 가운데 가장 빼어나네요. 대단합니다.
Camomile
22/09/19 10:03
수정 아이콘
안녕하세요. 자유게시판 운영진 Camomile입니다.
이 글의 본문이 펌글 규정 중 본인 서술 분량 부족에 해당되어 벌점 4점 및 수정권고 조치합니다.
본인 서술 분량을 4줄 이상으로 수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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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S Tony Parker
22/09/19 10:24
수정 아이콘
확인했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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