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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9/27 16:57:57
Name aura
Subject [일반] 낡은 손목 시계 - 5







나태한 무력감에 온 몸이 젖는다. 이어서 손 끝, 발 끝까지 전달되는 깊은 절망감. 절망감은 시리다 못해 미어지게 심장을 수축시킨다.

아아,

허물어져 가는 내게 유일한 탈출구는 시간을 되돌리는 것 뿐.



미친 듯이 갈망하며 시계 태엽을 뒤로 감는다.

그리고 느낀다. 이것은 명백히 신에 대한 월권. 어쩌면 그 대가로 이런 지옥 속에 갇혀 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점점 시야가 하얗게 타 들어간다. 마비되어가는 촉각 끝에 되감아지는 시간선이 날카롭게 베이듯 느껴졌다.

칼날처럼 벼려진, 역행하는 시간선에 마모 되어가는 감정까지도.



되돌아온 감각과 함께 돌아온 10월 20일의 아침.

째각, 째각. 손에 쥔 손목 시계의 시간이 다시 정방향으로 흐른다.



묵직하게 밀려오는 안도감과 절망감. 양 면의 감정이 날 것 그대로 심장부터 시작되어 혈관을 타고 온 몸 깊숙하게 퍼져나갔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것은 신의 기행이자, 신을 거스른 대가에 따른 형벌이다.



이번 회귀를 통해 또한 확실히 깨달았다.

아내를 무참히 찢어발긴 '무언가'는 사람이 아니다.



하늘이 내린 형벌, 거스를 수 없는 저주, 피할 수 없는 귀악, 아니면 업보?

그것의 정체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지만, 10월 20일에 그것은 반드시 내 아내인 윤을 찾아온다.

피할 수 없다.



보기 좋게 나의 예감이 빗나갔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텐데.



3번째의 회귀, 아내를 다시 설득해 이번에는 더 먼 곳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윤과 함께 산바람을 느꼈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차가웠지만, 꼭 잡은 손이 따뜻해 제법 포근했다.

밤에는 고기를 굽고, 모닥불을 피웠다. 차가운 공기를 녹이는 모닥불 훈풍에 아내는 수줍게 아이를 고백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지난 번과는 달리 윤은 내 반응에 크게 기뻐했다. 나도 기쁘고 슬펐다.

해가 지고, 어두운 밤자락이 어스름히 세상을 덮어썼다. 밤 12시가 가까워졌고...

밀려오는 수마를 간신히 이겨내고, 아내와 아이를 지키고자 부단히 노력한 나에게 돌아온 보상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아내의 육체.

경련하 듯 시간을 되돌렸다.



4번째의 회귀, 아내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갔다.

혹시나 그것이 바다는 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으로.

봄만 못한 낙엽지는 풍경에도 아내는 활짝 웃었다.

짜지만, 신선한 공기가 마음에 든다며 내게 고마워 했다.

차를 빌려 해가 뉘엇 질 때까지 드라이브를 했다. 바다 속으로 해가 가라앉을 때 쯤엔 해안가에 머물러 일몰을 바라봤다.

점차 발갛게 물드는 하늘을 보고 윤은 포근하다고 했다. 나는 어쩐지 그 광경이 시렸다.

어김없이 밤이 찾아오고, 다시 나는 내 모든 것들을 잃었다.



5번째의 회귀,

6번째의 회귀,



...

...

...

...



24번째의 회귀, 피폐해진 정신을 붙잡고 있기가 힘에 부친다.

아내의 시간은 단 하루도 흘러가지 않았지만, 나의 시간은 무심하게 그리고 서럽게도 흘러갔다.

이젠 눈을 감으면 그것의 형상이 또렷하게 보이고, 코 끝에는 비릿한 혈향이 느껴진다.

매쓱거림을 참지 못하고, 게워낼 것도 없는 위장에서 위액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손은 수전증에 걸린 듯 덜덜 떨렸다. 문득 거울에 비춘 내 눈은 시체처럼 창백하고, 푹 꺼진 눈이 퀭했다.

낡은 시계의 용두가 헐겁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



올가미처럼 옥죄어오는 그것에 대한 공포보다 더 두려운 것은 어쩌면 이 번이 마지막 회귀일지도 모른다는 직감.

윤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절대 안정을 취하라며, 억지로 아내를 데리고 나가려는 나를 침대에 눕혔다.

나는 그제야 윤의 가느다란 팔힘도 이겨내지 못 할만큼 쇠약해져 있음을 알았다.



몸을 웅크리고, 눈물을 흘렸다. 볼을 타고, 비오듯 쏟아져 내리는 눈물이 뚝뚝 베게와 이불을 적셨다.

아내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내 곁을 지켰다.

윤을 지켜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해 몸져 누웠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오빠 괜찮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윤은 식은 땀을 내내 닦아주었다.

눈을 감으면 선명해지는 형상에 도무지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전생의 나는 도대체 어떤 업보와 죄악을 쌓은 것일까.

한 인간이 감당해 내기에 이것은...



다시 밤이 찾아오고, 의미가 없음을 알면서도 나는 간신히 힘을 내어 방문을 잠그고 아내인 윤을 꼭 끌어 안았다.

비정상적인 행동에도 아내는 오히려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11시 59분.



달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쿵쿵. 쿵쿵쿵. 끼익.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

끼기긱. 끼기긱. 손톱으로 창문을 갈으는 소리.

쾅쾅쾅쾅!



문...



쾅쾅쾅쾅쾅!



열어...



우릴 찾는 소리.

어느새 아내는 수마를 견디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다.

23번째의 나는 이제 수마 쯤은 가뿐히 견뎌낼 수 있다.

하지만, 그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다만 아내가 깨지 않도록, 혹여나 악몽이라도 꾸지 않도록 귀를 막아주었다.



문 열어!!! 문! 문 열 어.



콰직, 하고 나무로 만든 문을 날카롭고 기다란 그것의 손톱이 파고들었다.

곧 저것은 문을 찢어발기고 이어서 윤 역시 찢어발기기 위해 들어올 터였다.



이번이 마지막일지 몰라.

24번째의 회귀 초, 그런 직감이 들었을 때부터 줄곧 생각했다.

저것이 윤을 죽이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히죽.

부서진 문틈 사이로 쫙 찢어진 그것의 입이 보였다.

온통 새빨간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결심하고 나니 이제는 더 이상 저것이 두렵지 만은 않다.







아내와 아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희생.





아아아악!

기합과 함께 나는 그것을 향해 힘차게 달려 들었다.





마지막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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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7 17:05
수정 아이콘
아 선댓후감상갑니다 혹시 다른사이트에는 안올리시나 낡은 시계 , 손목시계 검색 오지게 했습니다
나혼자만레벨업
22/09/27 21:33
수정 아이콘
드디어 올라왔네요!
아직 한 편이 더 남았다니... ㅠㅠ
붉은빛의폭풍
22/09/28 00:24
수정 아이콘
마지막편을 어떻게 마무리 하실지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 추측하는 엔딩 2개정도 있는데 aura님의 엔딩과도 비교해보고 싶군요. 가능한 한 빨리 업로드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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