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 꿈을 꾸었다.
꿈 속의 풍경은 한 번 본 적 없었으나,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익숙한 향내가 서슬 퍼렇게 느껴지면서도 묘한 그리움이 밀려 들었다.
낡아 빠져 다 허물어져 가는 가옥 앞마당에 여자가 주저 앉아 울고 있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 지 줄기 줄기 엮여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 윤은 생각했다.
여자의 얼굴은 무척 윤을 닮아 있었다.
윤은 꿈 속의 이 여자가 자신의 어머니란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순간 서럽고, 억울한, 뭉클한, 아련한, 온갖 감정이 교차했다.
뭘 잘했다고 우는 게냐?
늙은 노파가 매정하고, 엄중한 표정으로 울고 있는 어머니를 꾸짖었다.
서릿발 같이 노한 목소리가, 윤은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져 의아했다.
노파의 얼굴 또한 윤을 닮아 있었다.
쯧쯧, 일찍이 벤 애를 제 멋대로 뗄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염치 없이 도움을 바라는 지...
어머니, 제발.
여자가 손을 모아 닳도록 빌었다.
그 모습에 녹을 것 같지 않던 노파의 표정에 아주 작은 균열이 일었다.
어머니, 제발 우리 빈이 좀 살려주세요. 제발요. 흑흑.
아가, 그것은 네 업보다. 멀쩡한 명줄을 달고 천수를 누렸어야 할 아이를 잘라내었으니... 게다가 신의 사랑을 받았어야 할 아이를... 쯧쯧.
그 화와 재액이 지금 손주아가에게 닿는 것도 당연한 이치일 따름이니라. 너도 내 딸이니 만큼, 신의 이치에 둔감하지 않으니 앞으로 어떤 사단이 날지 훤히 깨닫고 나를 찾아온 게지...
노파의 얼굴에 노기가 한 움큼 가라앉고, 대신 안타까움과 연민이 떠올랐다.
어머니, 그 아이는 제가 원치 않는 아이였어요. 그런 아이가 태어나 신의 사랑을 받는다 하더라도, 어찌 제가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겠어요.
신이란 인간사에 지극히도 무심한 것을... 아가, 나 역시 네가 안타깝다. 간을 당하여 회임한 아이를 낳는 것이 마냥 기쁘기만 할까.
그러나, 너도 잘 알다시피 신의 총애를 받는 그릇은 신이 선택한다. 그리고 선택한 그릇 외에는 무정할 뿐이지. 네가 천륜과 신륜을 이미 저버린 까닭에 지금 손주아가를 낳는다면 그 아이로 하여금 네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아이에게 천벌이 찾아갈 것이다. 그것은 네가 받아야 할 천벌이기도 하지.
그러니 염치 불구하고 어머니를 찾아온 거에요. 흑흑. 어머니, 아니 엄마. 엄마는 알잖아. 우리 빈이 살릴 방법을. 제발 우리 빈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제발...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까, 그 사람이 세상 떠나기 전 남기고 간 우리 빈이 살게 해주세요.
꿈속의 윤은 찌르르한 모정을 느꼈다.
하아... 무정한 신이 야속하기만 하구나...
노파의 얼굴에 시름한 걱정이 떠올랐다. 이제 그 얼굴에서 얼음장 같던 노기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윤은 가슴이 아팠다.
천륜과 신륜을 동시에 저버린 업보를 어찌 피할꼬... 아가, 나로써도 이 아이의 수명을 모두 누리게 할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구나.
안 돼요. 엄마. 그러면 안 돼!
노파의 눈은 곧 바스러질 것 같이 쇠약해진 딸의 몸을 훑었다.
이러다 손주가 아닌 딸의 송장부터 치우겠구나, 생각한 노파가 이내 몸을 낮춰 자신의 딸을 꼭 끌어 안았다.
아가, 그렇다면 유일한 방법을 하나 일러주마. 다만, 그 화를 아이 혼자선 감당할 수 없음이니... 너도 성치는 못할 것인데... 괜찮으냐?
흑흑.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 제발...
나쁜년, 노파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갤 끄덕이는 제 딸을 보며 생각했다.
어찌 제 어미에게 제 딸을 죽일 방법을 알려 달라 손이 닳도록 비는지.
하지만, 자식 이길 어미가 어딨으랴. 하물며 손주아가도 제 피붙이 인 것을.
노파는 제 자식을 키우며 느꼈던 모든 기쁨과 슬픔과 그리고 걱정을 담은 한숨을 깊이 내쉬고는 말했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신을 달랠 제를 지내거라.
아이는 낳는대로 정상적으로 출생신고 하거라. 그리고 1년이 되는 해에 그 아이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바꾸거라.
화를 피할 방법이 없다면, 속일 수 밖에 있겠느냐. 이리하면 아이가 스무 해를 넘을 때 까진 재액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네 업보가 손주아가에게 덫 씌워져 있으니, 발각되는 날로부터 그 아이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화가 아이에게 닥칠 것이다.
그 화 조차 피하려거든...... 가장 사랑하는... 물건을... 그리하여 희...
순간 윤의 꿈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마치 영사기가 흘러가 듯, 장면들이 윤의 시야에 스쳤다.
할머니의 당부대로 출산까지 제를 올리는 여자.
출산 후, 자식을 바라보는 그 기쁘고 서글픈 표정.
빈에서 윤으로 바뀌는 아이의 이름.
시름시름 앓다 결국 아이가 세 살을 넘기 전 세상을 떠난 여자.
남은 아이를 홀로 키우는 노파.
신을 모시는 의식을 할 때면 가끔은 무서웠던 아이.
사랑하는 노파를 보내는 아이.
홀로 살아가는 것이 지치는 아이.
그래도 모진 풍파를 홀로 이겨내고 장성한 아이.
우연한 만남, 사랑.
손목시계.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
그리고 행복.
아아.
윤은 너무나 행복했다.
10월 20일, 이 날은 자신이 남편에게 임신 했음을 고백하기로 한 날이었으니까.
반복되고, 지치는 고단한 하루 끝에 오빠는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상상만 해도 벌써 지나치게 행복하다.
째각. 째각.
시계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윤은 꿈에서 깼다.
10월 21일.
윤의 눈에 가장 처음 보인 것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는 남편이었다.
아아. 아.
윤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단번에 모든 사실을 알았다.
지극한 남편의 사랑을.
흡. 흐읍.
참을 수 없는 비통함이 굳게 닫힌 입을 비집고 튀어 나왔다.
그것이 오열로 이어지기까진 찰나의 순간만이 필요했다.
아아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
가슴이 너무 아프다.
숨이 막힌다.
생전 기억도 나지 않는 엄마가 너무나 밉다.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그 모든 업보를 감당했어야 할 사람은 나였어야 하건만.
남편은 그 모든 업보를 홀로 짊어졌다.
무엇이 그리도 편안한 지 죽어 있는 남편의 표정은 홀가분해 보였다.
야속하다.
신은 지독하게도 무정하구나.
윤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남편의 뺨을 한 번 쓰다듬고, 차게 식은 손을 꼭 잡아 쥐었다.
도무지 이 비탄을 억누를 길이 없다.
터져 나오는 대로 둘 수 밖에.
째각. 째각. 째각.
그 때 윤의 귓가에 들린 것은 손목 시계 소리였다.
죽은 남편이 살아 생전 자신에게 주었던 첫 선물.
아직은 변변치 않아 대단한 선물을 줄 수 없지만, 자신이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 지 표현하고 싶다며 주었던.
알고 보니 그 시계는 남편을 낳자마자 버렸던 부모가 남편에게 유일하게 남긴 유산이자 그 자신의 분신이었다.
그 시계에 윤과 남편은 함께 결혼을 약속했었다.
째각. 째각.
'그 화조차 피하려거든... 손주아가 대신 누군가가 그 화를 감당해야만 하겠지. 그것도 손주아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람으로부터 받은 물건, 물건의 형상을 한 행복으로 말미암아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리하여 희생이 이뤄진 순간, 아이는 온전히 살게 될 것이다.'
꿈 속에서 들은 할머니의 마지막 얘기가 선명히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그렇구나, 그런 것이었구나.
물건의 형상을 한 행복은 바로 이 손목시계였다.
떨리는 손으로 손목시계를 쥐자마자, 윤은 자신의 남편이 겪었던 그 모든 일들의 편린을 훔쳐볼 수 있었다.
이것은 피를 타고 내려온 자신의 신기이자 능력일까, 아니면 이조차도 분노한 신의 형벌의 일부일까.
아아.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사랑이 윤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아이가 있다 하더라도 오빠가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어.
윤은 사랑스럽게 배를 쓰다듬으면서도 슬프게 중얼거렸다.
이 다음 윤이 해야 할 행동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였다.
째각, 째각.
손목 시계.
나의 행복.
낡아 빠진 헐거운 용두가 부디 잘 작동하기를.
윤은 그렇게 간절히 기원하며, 남편이 수십 차례나 반복했던 행동을 따라했다.
그리고,
점점 윤의 시야가 하얗게 타 들어간다. 마비되어가는 촉각 끝에 되감아지는 시간선이 날카롭게 베이듯 느껴졌다.
그 순간 윤은 자신의 처지가 기구하면서도 웃기다고 생각했다.
이것으로 신에게 감사 해야 할까, 아니면 원망을 해야할까?
그것은 이 날카로운 시간선을 거슬러 올라간 후에나 알 수 있을 일이었다.
完
마지막까지 기다려주시고,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중간 공백기가 있었음에도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