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애플이 자체 개발 프로세서인 M1을 탑재한 첫 맥 제품군을 내놓음과 동시에 해당 업계에서는 일대의 지각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압도적인 성능에도 불구하고 노트북에서 쿨링 팬을 아예 제거해버려도 될 정도의 매우 낮은 전력 소모와 발열을 보여주면서 차세대 컴퓨팅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일각에서는 애플의 경쟁자인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진영의 기기들의 입지가 심각하게 위협받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올 정도의 엄청난 충격이었지요. 폐쇄적인 애플의 생태계와 사업 모델의 한계 상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정도의 타격을 주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플의 ARM 기반 자체 칩셋이 보여준 어마어마한 성능과 낮은 전력 소모와 같은 장점은 누구나 군침이 절로 넘어갈 만한 장점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애플의 기술력에 감탄하면서, 이와 동시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전략이 안이했던 것은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입장에서는 꽤나 억울한 평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어쩌면 애플 그 이상으로 ARM 프로세서에 진심이었을 수 있거든요. 그 얘기를 조금 해보고자 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ARM 윈도우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윈도우 RT가 들어간 서피스 RT. 안타깝게도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물건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인텔이 제조한 x86 CPU가 아닌 ARM CPU 위에서 돌아가는 윈도우가 소비자들에게 처음으로 선을 보인 것은 2012년 서피스 RT와 윈도우 8가 발매된 시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서피스 RT에는 테그라 3 칩셋과 2GB 메모리가 탑재되어 있었는데, 출시 시점 기준으로도 고사양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기기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499달러에(이조차도 충분히 저렴하지 못하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만) 팔기로 하면서 아이패드를 경쟁 상대로 내걸었습니다.
이는 몇 가지를 시사하는데요, 우선 첫번째로는 당시에는 아이패드가 지금처럼 시장을 압도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기가 출시된 시점인 2012년에는 아이패드의 고작 세번째 모델이 출시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그 당시에도 아이패드가 가장 쾌적한 태블릿 생태계를 제공해주긴 했지만, 아직 아이패드를 포함한 태블릿 PC라는 기기 자체가 덜 알려진 상황이었고, 또 그 활용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파악이 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패드에게 도전장을 내밀 수 있었다는 상황이었다는 것이지요. 두번째로는 MS가 아직 모바일 시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윈도우 8은 다들 기억하시다시피 메트로 UI라는 매우 급진적이고 모바일 친화적인 UI를 도입했습니다. 윈도우 기기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마우스 기반 데스크탑, 노트북 기기들에서의 사용자 경험을 심각하게 훼손해가면서까지 모바일 시장에서 한판 승부를 건 것이죠. 이후 MS의 모바일 시장 도전이 실패로 돌아가며 윈도우 8.1 – 10 – 11에서는 데스크탑 경험을 열심히 복구하는데 열중해, 결국 메트로 UI의 상징이었던 타일 UI는 완전히 삭제되었고, 처음에는 태블릿과 노트북의 퓨전 기기로 마케팅하던 서피스 시리즈는 이제 완연한 노트북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는 결말을 맞게는 됩니다만 이는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허나 윈도우 RT가 처음 나오던 시절의 MS는 정말로 윈도우가 돌아가는 태블릿 PC가 아이패드와 경쟁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세번째로는 그 당시 ARM 프로세서는 여전히 성능이 심각하게 모자랐다는 점입니다. 테그라 3는 당시 기준으로도 결코 인텔 프로세서와 경쟁할 수 없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고, 장점이라곤 낮은 전력소모 하나뿐이었습니다. 때문에 MS는 전통적인 x86 프로세서가 들어간 고성능 라인업인 서피스 프로 시리즈와, 성능은 낮지만 오래 가는 배터리와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한 서피스 RT 시리즈로 라인업을 이원화해야만 했습니다. 지금의 애플이 ARM 기반 프로세서로 데스크탑을 넘어 강력한 워크스테이션까지 만드는 것과는 달리, 그 당시의 ARM 프로세서는 정말 너무 느렸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애플이 아이패드로 열심히 꿀을 빠는 것을 보고 질 수 없다고 생각한 MS 역시 자신들의 ARM 기반 윈도우 태블릿 PC를 만들기로 했으니, 이제 그에 걸맞는 ARM 윈도우를 개발할 차례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나도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운영체제 커널을 ARM CPU 위에서 돌아가게 이식하고, 자신들의 최대 마케팅 포인트인 MS Office 시리즈까지 완전히 이식한 것은 좋은데, 문제는 기존 인텔 CPU에서 돌아가게 만들어진 수많은 윈도우 프로그램들이 서피스 RT에서는 전혀 돌아가질 않는 것입니다. 윈도우의 최대 강점인 프로그램 호환성이라는 금자탑이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인텔 CPU 기반 프로그램을 ARM 프로세서에서 돌아가게 만드는 에뮬레이션 기술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테그라 3 프로세서는 기존의 인텔 CPU용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에뮬레이션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도 성능이 낮았습니다. 기존의 윈도우 기반 프로그램의 UI는 터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졌기에 조작 역시 극심하게 불편한 문제가 있었구요.
때문에 MS는 기존 윈도우 앱을 그냥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대신 WinRT라는 ARM 기반에서 작동하는 새로운 개발 기반을 만들고, 그 기반에서 만들어진 앱들을 윈도우 스토어에서 판매하기로 합니다. 이는 명확한 장점이 있었습니다. 기술적으로 낡디 낡은 데다가 터치 UI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존 앱들을 버리고, 쾌적하고 부드러운 메트로 UI 기반의 최신 앱으로 아이패드에 준하는 사용자 경험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WinRT에는 또 다른 장점이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2012년 즈음은 MS가 아직 모바일 시장을 포기하지 않은 해였습니다. MS는 윈도우폰이라는 자체 스마트폰 OS를 여전히 개발하고 있었고, 이 WinRT라는 API로 개발한 앱들은 윈도우 기기와 윈도우폰 모두에서 동시에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개발자들의 편의를 봐줌과 동시에 윈도우 태블릿과 폰이라는 두 모바일 기기의 생태계를 동시에 성장시키려는 발상이었을 겁니다.
MS의 발상은 나름 나쁘지 않았습니다. 윈도우폰은 충격적으로 미려한 메트로 UI와 높은 최적화 수준으로 매끄러운 사용자 경험을 제공했고, 윈도우 RT 기반 태블릿들도 기존 윈도우 앱들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심각한 약점이 있기는 했지만 그 대신 기존의 윈도우 기기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수준의 매끄럽고 미려한 태블릿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게 해주었습니다. 분명 이 당시의 윈도우 기기들은 내부부터 외부까지 기존 윈도우의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새로운 모바일 시대에 걸맞는 제품을 내놓아보려는 흔적이 배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마이크로소프트의 그 꿈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들을 하나씩 까보자면, 우선 태블릿부터 시작할까요. 윈도우 태블릿이 너무 심각하게 미완성 상태였습니다. 아이패드가 이미 터치 조작에 걸맞는 앱들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한 아이폰이라는 기반에서 시작한 덕에 2012년 기준으로도 이미 상당히 쾌적한 태블릿 경험을 제공한 것과는 달리, 서피스 RT는 앱이랄 게 그냥 아예 없었습니다. 스토어에서 받아서 쓸만한 앱이라곤 정말 한 손의 손가락으로 전부 셀 수 있을 정도였으니 아이패드를 냅두고 굳이 서피스 RT를 살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어플 뿐만 아니라 OS 역시 터치 친화도가 결코 좋지 못했습니다. 태블릿용으로 최적화를 거친 일부 부분을 제외하면 너무 많은 부분이 여전히 윈도우 7 시절의 마우스 기반 UI에 머무르고 있었다보니 마우스 없이는 쓰기가 너무 불편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윈도우의 장점인 강력한 앱 생태계는 전혀 누리지 못하면서, 터치로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윈도우의 단점은 고스란히 이어받은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같은 WinRT 기반 프로그램을 돌리기에, 앱 생태계 확보의 구원투수가 되어주었을지도 모르는 윈도우폰 역시 심각하게 쫄딱 망해버렸습니다(그 이유를 얘기를 하려면 또 너무 길어지니까 생략..). 결과적으로 ARM 기반, WinRT 기반 윈도우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 동기를 전혀 제공해주지 못했습니다. 앱이 없으니 기기가 안 팔리고, 기기가 안 팔리니 앱이 안 생기고.. 의 무한 루프를 겪던 MS는 결국 서피스 RT 2세대 이후로는 ARM 기반 윈도우 태블릿 기기를 아예 포기하고 맙니다. 윈도우폰은 조금 더 버텼지만 극심한 어플부족에 시달리다가 얼마 가지 않아 역시 고사해버리고 맙니다.
바뀐 MS의 모바일 시장 정책의 상징, 서피스 프로 3.
결국 MS는 서피스 시리즈의 후속작 서피스 프로 3에서 그 노선을 완전히 틀게 됩니다. 우선 ARM 프로세서를 포기하고 완전히 인텔 기반으로 전향하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기기의 크기를 10인치에서 12인치로 크게 키웠습니다. 저는 이것이 MS가 아이패드와의 경쟁을 반쯤 포기했다는 선언으로 느껴졌습니다. 태블릿과 노트북 사이의 어정쩡한 포지션에 있던 서피스 시리즈를 명백하게 노트북에 가까운 기기로 타게팅하기 시작한 거죠. 그 덕인지 서피스 프로 3는 압도적인 대박이 났습니다. 커진 화면과 강력한 펜 기능와, 그를 보조하는 문서 열람에 최적화된 3:2 화면비까지, 터치와 펜이 되는 강력한 생산성 노트북으로서의 강점이 인정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허나 아이패드에 견줄 수 있는 편리한 컨텐츠 소비형 기기로서의 꿈은 반쯤 접은 셈이었습니다.
이후 서피스 프로 7이 나오기까지 주욱 인텔 CPU를 달고 나온 윈도우 태블릿들의 입지는 큰 변함이 없었습니다. 없다시피한 태블릿 전용 어플로 인해 마우스가 없이는 쓸 수 없지만, 펜 기능과 터치 기능이 필요하다면 유용한 기기. 그렇지만 노트북으로 쓰자니 얇은 두께의 한계로 확장성과 성능이 떨어지는 애매한 기기.
그런데 2019년 MS가 다시 ARM 윈도우 기기에 출사표를 꺼내 들었습니다. 퀄컴의 8cx 기반의 커스텀 ARM 프로세서가 들어간 서피스 프로 X와 함께 말입니다. 그 동안 빠르게 발전한 ARM CPU들의 성능 발전과, 기존 인텔 CPU용 프로그램을 ARM CPU에서 돌릴 수 있는 에뮬레이션 기술의 개발에 힘입은 결과였습니다.
비록 서피스 RT 시절 만들어놓은 ARM용 윈도우의 기반에서 시작한 기기지만, 서피스 프로 X는 그 성격이 꽤나 달랐습니다. 이제 마이크로소프트가 태블릿 전용 앱과 UI에 대한 기대를 버린 상황이 되었지요. 태블릿에 대한 UI 차원에서의 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 데스크탑 UI를 조금 수정하는 수준에서의 지원이 이루어질 뿐, 데스크탑 환경을 포기해가면서 태블릿 생태계를 구축하려던 기존의 포부에서 큰 수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인텔 CPU에서 돌아가는 프로그램의 호환성을 확보하게 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일 것입니다. 이제 MS는 서피스 프로 X의 강점으로 기존 윈도우 앱이 돌아간다는 점을 꼽으려고 하고 있고, 이는 결국 새로운 앱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을 포기하고 기존 생태계에 크게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MS는 이 기술을 계속 발전시켜왔고 처음에는 32비트 프로그램만 돌아가는데 그쳤지만, 지금은 64비트 프로그램도 에뮬레이션이 되는 상황입니다. 비록 호환성 문제는 남아있지만요.
정리하자면 윈도우 ARM 기기가 기존에 망한 이유인 앱 생태계는 결국 기존의 윈도우 앱으로 때운다고 치고, 태블릿에 어울리지 않는 UI도 적당히 포기하고 넘어간다고 치면, 남은 것은 ARM 프로세서의 부족한 성능이라는 장벽뿐입니다.
서피스 프로 X 1세대부터 애플의 M1 프로세서 랑은 비교가 안되는 낮은 성능과 호환성이 발목을 잡았고, 서피스 프로 X 2세대 역시 별 다른 성능 향상이 없었기에 ARM 윈도우 기기를 쓸 만한 요인이 별로 없었던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프로그램 호환성이 구리면 성능이라도 좋든지 해야 하는데 이도저도 아니니 배터리가 좀 오래 간다는, 서피스 RT 시절부터 있었던 ARM 기기의 오랜 장점을 빼면 매력이 없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이것이 조금씩 뒤집어지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우선 애플의 프로세서 성능 발전 속도가 생각만큼 빠르지 않습니다. M1 프로세서가 기존 윈도우 기기를 전부 발라버리는 기술적인 향상을 가져왔지만, 의외로 M2 프로세서는 M1 프로세서만큼의 발전보다는 약간의 개선에 그쳤습니다. 아이폰 14 프로에 들어간 A16 바이오닉 칩셋도 A15에 비해 큰 발전이 없었는데, A16 칩셋에 레이 트레이싱 기능을 구현하려다가 과도한 발열 문제로 인해 포기를 했다는 루머도 나오는 데다가(
https://www.clien.net/service/board/news/17816973), 퀄컴의 신형 스냅드래곤 8 Gen2 프로세서가 이미 GPU 면에서는 애플의 A16 칩셋을 추월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생각보다 빠르게 애플의 AP 독주가 끝날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 애플 실리콘 맥 기기에 견주는 성능과 전성비를 자랑하는 윈도우 기기가 의외로 곧 나올 수도 있다는 거지요.
ARM 윈도우 기기가 정말 현실화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징조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서피스 시리즈는 이제 ARM 프로세서가 달린 X 라인업을 별개로 런칭하지 않습니다. 대신 최신 모델 서피스 프로 9의 기본 모델에는 인텔 프로세서가, 5G 모델에 ARM 프로세서가 들어가는 식입니다. ARM 프로세서가 들어간 것이 이제 더 이상 특이한 일이 아니라는 늬앙스가 느껴진다면 과도한 넘겨짚기일까요?
얼마 전 공개된 삼성의 갤럭시북 2 프로 360 모델은 아예 인텔 CPU 모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작 갤럭시북 프로 360 모델에서는 인텔 CPU 모델만 존재했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아예 인텔 CPU 모델을 고를 수조차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제 ARM CPU가 달린 윈도우 기기들이 노트북을 시점으로 정말 대중화될 준비가 되어가고 있다는 방증으로 보입니다. 비록 서피스 RT 시절의 비전처럼 아이패드와 같은 모바일 경험을 제공하는 기기라기보단 기존 윈도우 노트북에서 CPU만 바뀐 기기로 그 꿈이 축소된 것은 꽤나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2년부터 이어져온 ARM 윈도우에 대한 MS의 집념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 것을 보는 것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틀린 부분이 많을 거 같은데 지적 감사히 받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