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01/06 20:16:34
Name 사람되고싶다
Subject [일반] 나의 전두엽을 살펴보고 싶은 요즘

여러분은 전두엽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잘은 모르지만 뇌에 있는 한 부위라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면, 감정이나 절제, 기억 등에 관장한다는 것도 아실지도 모르겠군요!
사실 저도 그 이상은 모릅니다!

아무튼 전두엽은 꽤나 다양한 일을 합니다.

제 생각에 꽤나 중요한 건 '단기기억', '미래계획', '실행기능'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전 저것들이 전부 끔찍하게도 안됩니다.

얘기 중 직전에 들은 말을 잊어먹는가 하면, 30분 동안 통화한 사람의 이름을 뒤돌아서자마자 까먹어버리고, 2시간 전에 했던 일을 전혀 기억 못해서 다시 되묻기도 합니다.

단기기억이 이러니 장기기억도 비슷할 수밖에요. 전 한 이틀쯤 지나면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고, 더 지나면 아예 기억이 안납니다.

'아니 그 정도면 일상생활이 가능해?'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의외로 별 문제 없으면서도 잘 안되기도 합니다.

이게, 제가 적극적으로 떠올리는 게 안되는 거지 들으면 '아'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장 기능도 개판이지만 그보다 인출 기능이 더 노답이라고 할까요. 옆에서 누가 말해주거나, 한참을 고민하다보면 기억이 두둥실하고 떠오릅니다. 또 단순히 '지식의 저장'은 반복하면 되긴 하더라고요.

그래서 메멘토 같은 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들처럼 빠르고 스마트하게 생활을 해나가진 못합니다. 항상 굼뜨고, 느리고, 부정확합니다.
나름대로 지능이 높은 편이라곤 생각하는데, 그나마 이게 겨우 커버쳐줘서 적당히 평균 이하 정도의 삶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뭐랄까, 램 용량 쥐똥만하고 오류도 자주 뱉지만 그나마 CPU빨로 버티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미래계획, 실행기능도 마찬가지에요. 시야가 좁다고 해야할지, 눈앞에 닥친 일만 처리하기 급급하지 장기적인 사고가 잘 안됩니다.
아니, 하면 할 수는 있는데, 그게 패시브 스킬이 아니라 MP, 시간 소모 큰 액티브 스킬이랄까요.

실행기능도 개판이라 뭔가 하나 하는데도 엄청나게 고민의 고민의 고민을 거쳐 오래 걸리거나, 아예 미뤄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아, 인지기능도 별로입니다. 제가 신경 안쓰는 것들은 아예 인식이 잘 안돼요. 어느 정도냐면, 차 조수석 앉았을 때 안전벨트 경고음이 의식하지 않으면 신경이 안쓰이는 수준입니다. 옆사람이 말을 해야 그제서야 인식하고 매지요.


분명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문제가 심각한데?' 싶지만... 의외로 저는 제가 이렇다는 걸 안지 1년이 안됐습니다.
인생 까이거 뭐, 저렇게 살아도 대충 살아지더라고요. 원래 무던한 성격이기도 하고. '그냥 남들보다 좀 더 덤벙댄다~ '하고 마는 정도였지



그런데 이게 직장에 들어가고부터 삐그덕대기 시작합니다.

정확한 업무 지시 및 프로세스 기억!
미루지 않고 맺고 끊음이 확실한 업무!
빠른 일처리!
미려한 거리 두기와 대인관계 스킬! 정치질!


다 제가 죽어도 못하는 것들입니다.

그냥 손대는 일마다 다 터집니다. 까먹고 묻어두고, 막히면 미뤄두고 딴 거 하고, 업무 저글링 하다가 하나도 완료 못한 채로 쌓이고, 업무 지시는 중간 중간 부정확하게 기억해서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이쯤 되면 폐급 중에서도 개폐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가 미국이었으면 진즉에 짤렸을 거예요.
팀원들한테 항상 미안해 죽겠습니다... 다들 멘탈이 생불 수준이라 그나마 버티고 있는 거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병원에 가보았는데... ADHD 당첨입니다!
의사선생님은 ADHD라고 안하고 '집중력이 많이 저하 돼 있다' 라고 꼬박꼬박 말씀하시긴 합니다만... 뭐 그게 그거죠.

ADHD가 전두엽 기능 저하나 도파민 부족 이런 것과 연관이 있거든요.

그래도 ADHD는 약 먹으면 증상이 크게 개선된다고 해서 기대를 했지만...
글쎄요, 그렇게 드라마틱한 차이는 없었습니다. 아쉽지만. 약 용량도 거의 몸의 한계까지 올렸는데도.

뭐랄까, 눈이 매우 나쁜 사람이 기대를 안고 안경을 썼는데, 교정 시력이 0.3인 그런 느낌입니다.
분명 효과가 있는데... 나아진 것도 맞긴 한데... 충분하냐고 하면 절대로 그렇다고 할 수 없는 그런.

단순 도파민 농도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쯤 되면 그냥 전두엽 자체가 망가져 있는 거 아닌가? 싶어요.

전두엽의 기능이랍시고 나오는 것들 중에 제가 잘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끔찍하게 못하면 못했지.

궁금해서 좀 본격적인 검사를 받아보고싶긴 한데, 해결책 제시라기보단 지적 호기심 만족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그것도 매우 드럽게 비싼...


참, 약빨은 구리고, 직장생활은 이미 반쯤 파멸해버렸고, 나아질거란 희망이 잘 안보이네요.
그냥 뇌 비우고 편하게 살면 좋겠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
돈 많았으면 그냥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고 살텐데.


그래서 이 글의 결론이 뭐냐면...

딱히 없습니다.
그냥 생각 정리 겸 써보고 싶었어요. 지금 갑자기 왠지 '우다다' 상태 돼서 뭐라도 하고싶었읍니다.

그래도 한 마디 하자면... 본인이 좀 이상하다 싶으면 부정하지 말고 병원 가보라는 거?
우울증이든 뭐든 방치해두면 더 심해지기만 할 뿐이에요. 조기 발견 및 치료가 답.
종합심리검사도 비싸서 그렇지 나름 재밌고 유익했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일모도원
23/01/06 20:20
수정 아이콘
즐거운 금요일이다 하고 맛있는거 드시길, 힘내세욧~!!!
무한도전의삶
23/01/06 20:43
수정 아이콘
초반의 벽이 좀 있긴 하지만, 하루에 20분 정도 명상을 해보시면 어떨까요? 넷플릭스에 [헤드스페이스] 검색하면 좋은 콘텐츠가 많습니당!
마스터충달
23/01/06 22:57
수정 아이콘
아... 초반에 읽다가 ADHD 같은데... 싶었더니 역시 ㅠㅠ 힘내십쇼.

ADHD 전문가인 할로웰 박사는 ADHD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스포츠 카에 자전거 브레이크를 단 격이라고요. 브레이크만 제대로 되면 오히려 뛰어난 창의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요. ADHD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니까, 그 상황 속에서 무언가 해법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화이팅입니다.
요슈아
23/01/07 00:16
수정 아이콘
어릴때부터 달고 살았던 간헐적폭발장애(인줄도 몰랐던) 를 이제서야 인지하고 치료받고 있습니다.

그냥 감정이 북받치면 세상 억울하게 울부짖는다던가 그래도 화가 안 풀려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물건 한두개 집어던진다던가 이게 그냥 자연히 나아질 줄 알았어요. 사람앞에서 발동 안 된게 천만 다행이지.
그렇게 나아지겠지 하고 살다가 주변에 너무 많은 민폐를 끼쳐버렸습니다.
정신과도 감기약 처방받는것처럼 자연스럽게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작 제가 가볼 생각을 못 했네요 크크크.

일단 1주일치 처방받았는데 정말 만족중입니다. 화가 올라오는데 뭔가 보이지 않는 손이 쑤욱 뒷덜미 잡아끌고 닥치라고 경고주는 그런 느낌이에요. 정말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게 일반인의 기분이었구나....
23/01/07 02:26
수정 아이콘
비유 찰지게 글 잘 쓰시는데요.
직장생활 몇년 하셨는지는 모르겠는데, adhd 지인 몇명 보면 조직생활 초기에 고초를 겪는건 맞더라고요.
하지만 글쓴분도 스스로 그렇게 진단하셨는데 제가 보기에도 지능 자체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보니 적응만 되고나면 별 문제없이 잘들 삽디다.
성격 좋다는 얘기는 좀 듣지 않으신가요? 직장분들도 점차 이해해주실 것이고, 회사 생활도 더 나아지실 거라 생각합니다.
Foxwhite
23/01/07 09:12
수정 아이콘
와 완전 제가 술먹고 글쓴줄...
이웃집개발자
23/01/07 09:18
수정 아이콘
전 저런 증상이 진짜 점점 심해지네요 혼자 걱정이 많습니다.. 힘내요 우리 ㅠ
23/01/07 09:48
수정 아이콘
어려운 병은 단 하나의 약, 처방으로 효과를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ADHD 약 드시고 어느정도 효과 보셨으면 유산소 운동 주 3회 30분에서 -45분 최대 심장 박동수 70~85% 정도의 강도로 하시고
요가나 태극권 헬스 같이 벨런스와 유연성 근력을 강화시키는 운동도 해주세요.
독서를 꾸준히 하고, 효과적인 식이요법을 도입하고, 종교활동도 해보세요. 또 다른 병원도 가서 상담받아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한개로는 안되요. 종합적으로 라이프스타일이 바뀌고 환경이 바껴야 사람이 바뀝니다.
한개만 해보고 아 안되네 하고 좌절하지 마세요.
한개에서 어느정도 효과를 보면 그것을 챙기고 또 다른 것을 추가해서 챙기고 그다음에 또 다른 것을 추가합니다.
지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꾸준히 합니다. 점점 좋은 습관을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 갑니다.
그러다 보면 좋아지겠지 하고 증상을 찾지 말고, 그냥 하는 게 좋습니다. 제 경험상 그래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7654 [일반] <더 퍼스트 슬램덩크> - 원작에 의지하거나, 의존하거나.(약스포) [84] aDayInTheLife13742 23/01/08 13742 6
97653 [일반] 뉴욕타임스 읽는 법 도와주세요(영자신문을 선택한 이유 추가) [49] 오후2시46482 23/01/07 46482 5
97652 [일반] 점심시간 은행 문 닫아요… KB국민, 일부 점포 시범 운행 [192] 만수르23728 23/01/07 23728 2
97651 [일반] 커피, 에스프레소, 수동머신 [47] 해맑은 전사15735 23/01/07 15735 9
97650 [정치] 미국에서 6살 어린이가 선생님을 쐈네요... [70] 우주전쟁20226 23/01/07 20226 0
97649 [일반] 제임스완 제작 공포 영화 "메건" 보고 왔습니다 [5] 흰긴수염돌고래9213 23/01/07 9213 1
97648 [일반] 분류와 구분짓기의 사회 [30] 휵스10708 23/01/07 10708 1
97647 [정치] 한겨레 편집국 간부, 김만배씨와 금전거래. 한겨레 신문 사과문 발표 [204] D.TASADAR23728 23/01/06 23728 0
97646 [일반] 나의 전두엽을 살펴보고 싶은 요즘 [8] 사람되고싶다10903 23/01/06 10903 12
97645 [일반] 그녀는 왜 부모 걱정을 하는 노총각만 보면 도망가게 되었을까? 2 [21] 김아무개11733 23/01/06 11733 21
97644 [일반] 국내 민간 동호회, 10년 전부터 무인기로 북한지역 촬영 [44] Regentag14659 23/01/06 14659 1
97643 [일반] 13500 + 4070TI 초기 가격 서치 [51] SAS Tony Parker 11956 23/01/06 11956 4
97642 [일반] 여성의 사회성이 높은 이유 중 하나는 [61] Gottfried17172 23/01/06 17172 17
97641 [일반] 북산의 안감독은 과연 명감독이었을까요? (애니 스포 없음) [98] 외쳐2212775 23/01/06 12775 25
97640 [일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한국의 온라인 보안 실태 [32] Regentag15652 23/01/06 15652 11
97638 [일반] 그녀는 왜 부모 걱정을 하는 노총각만 보면 도망가게 되었을까? 1 [49] 김아무개15580 23/01/06 15580 19
97637 [일반] 소녀 리버스 감상 - VR장르를 정말 잘 이해한 PD와 가수의 걸작 [24] 터드프9694 23/01/06 9694 1
97636 [일반] 스타트업에서 배운 것 (1) 증거 남기기 [20] 시라노 번스타인12501 23/01/06 12501 25
97635 [일반] 워렌버핏은 범죄자다 [42] 신은있다13782 23/01/06 13782 0
97634 [일반] [스포일러]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감상 [21] 류지나10135 23/01/05 10135 5
97633 [일반] 투자를 과학적 방법으로 하도록 인도하는 책. 그렇지만 쉽지 않은 책. 증권 분석 [16] Neo11111 23/01/05 11111 41
97632 [일반] 독일을 위한 변 – 그들은 왜 나치스가 되었는가 [29] 아프로디지아8380 23/01/05 8380 15
97631 [일반] AI가 그림을 그리면 예술은 망할까? (예술 작품이란? / 비싼 작품의 이유) [36] Fig.111380 23/01/05 11380 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