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01/30 15:13:57
Name 초모완
Subject [일반] 훈수

날씨가 제법 따뜻해지고 공기 또한 청량감이 드는 시원한 날이었기에 산책 가기를 단행했다.

무릎에 까지 내려오는 검정 잠바를 목 끝까지 지퍼를 채우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온통 시커먼 모습 때문에 까마귀 처럼 보였다.
올록볼록 튀어오른 잠바 때문에 살찐 까마귀 처럼 보였다.

괜찮아. 잠바 때문에 그래. 내 살 아니야.



자주가는 산책로 입구에 어르신들이 장기두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오늘따라 유난히 그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영하의 날씨에도 햇빛이 비추는 그 공간은 햇빛 때문만이 아니라 두분의 승부욕 때문에라도 그곳 공기가 후끈거렸다. 평소라면 별 생각없이 지나쳤을 텐데 그날은 왜인지 장기두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었다. 쭈뼛거리며 게걸음 같은 걸음으로 그곳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초를 잡은 어르신의 표정이 심각했다. 대충 훑어 보니 두어수 안에 승부가 날 것 같았다. 반면 한을 잡은 어르신은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분은 승부가 자기에게 기울었음을 인지하자 허리를 펴고 주변을 둘러보다 나랑 눈이 마주쳤다. 젊은 사람이(그분 입장에서) 자신이 승리를 거머쥐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 내심 자랑스러웠는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환하게 웃었다.


‘내가 이기는거 봤냐?’


여기서 나도 짧은 미소로 화답하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으면 좋았을 것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어르신이 승리하는게 싫었던지 무표정으로 응답하고는 넌지시 장기판 구석에 놀고 있는 초의 상을 보며 눈짓했다. 한을 잡은 어르신이 내 눈을 따라 그대로 장기판으로 옮겨져 갔다. 자신의 차가 상 길에 있었다. 크게 놀란 어르신이 내심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불편한 모습을 표정으로 그대로 내보이셨다.


고개를 장기판에 묻다 시피한 초를 잡은 그 어르신은 연신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급기야는 그 상 길을 보지 못하고 돌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에잉. 내가 졌네 그려.”

하지만 한을 잡은 그 어르신은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는지 기뻐하지 않았다. 표정이 심상찮은게 빨리 자리를 피하는게 나을 것 같아 몸을 돌려 가려는데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 젊은이. 어때? 나랑 한판 두는게?”


빠르게 머리가 돌아간다. 아까 잘난체 해 놓은게 있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지게 되면 개망신이다. 더군다나 이 산책길은 내가 자주 다니는 길이라 왔다 갔다 할때마다 저분이랑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난 언제까지고 패배감이 젖어 있어야 할 것이다. 안하는게 이득이…

그 할아버지와 눈 마주쳤다.


한을 잡은 그 어르신은 이런 표현이 미안하지만… 나를 보며 썩소를 날리고 있었다. x밥 새퀴야. 자신있으면 들어오고 아니면 꺼져. 하는 말을 얼굴 표정으로 하고 있었다.


안하는게 이득이란 생각이 쏙 들어갔다. 여기서 뒷걸음질 치면 오늘 집에 들어가 치킨을 시켜 먹을 때도, 랭겜을 돌릴 때도, 자기 전에도,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도 생각 날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도발에 도망친 것을.


그늘에 있던 까마귀 같은 몸을 옮겨 햇살 비추는 그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초를 잡은 어르신이 자리를 비켜주고 자연스레 심판 겸 관중으로 역할을 찾아 갔다. 오랜만에 장기두는 거라 제법 긴장되었다. 나를 상대하는 할아버지가 선심 쓴다는 듯이 한을 가져갔다. 그리고 또다시 썩소를 날렸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썩소 뒤의 숨겨진 패배의 두려움을.



승부가 나에게 기울었다. 할아버지는 쉽사리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다리만 달달 떨어댔다. 내 친구였다면 ‘거 장기두는 사람 소풍갔나?’ 라는 드립을 칠 만큼 많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심판 및 관객으로 포지션 변경한 그 할아버지가 참다 못해

“졌구만 그래.”

라고 한마디 했다. 할아버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해는 어느새 자리를 옮겨 갔고 장기판의 승부 또한 식어버려서 인지 추위가 엄습했다. 할아버지는  이내 포기하셨는지 기물을 다시 잡고 빠르게 다시 한 판 둘 채비를 하였다. 차마 졌다는 말도, 다시 한판 두자는 말도 안나오셨나 보다. 그저 빠르게 본인의 기물을 원위치 시켜 놓고는 날 바라보았다. 다시 한판 두자는 말이었다.


‘죄송하지만 제 상대가 아닌것 같습니다.’


라는 말은 차마 하지 않았지만 최대한 예의를 차렸다. 무표정으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할아버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자신만만한 할아버지 표정 뒤에 패배의 두려움을 보았듯이, 그 분 또한 최대한 아무런척 안하는 모습 뒤로 의기양양하는 내 모습을 보았을 것이었다.


장기판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데 심판 겸 관객 역할을 하셨던 어르신이

‘역시 젊은 사람한테는 안되는 구만.’

말이 들려왔다. 얼핏 우리들의 늙음을 한탄하는 듯 들렸지만 어째서인지 그분의 표정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먼산바라기
23/01/30 15:20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봤습니다
서쪽으로가자
23/01/30 15:42
수정 아이콘
??: '너 개 못하잖아'를 시전합니다
23/01/30 15:52
수정 아이콘
크크크 재밋게 잘봤습니다.
Lich_King
23/01/30 16:21
수정 아이콘
장기 좋아하는데,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어르신들이 참 순수하시네요 크크.
-안군-
23/01/30 16:25
수정 아이콘
나의 육신은 투쟁을 원한다!! 크크크크
페스티
23/01/30 16:48
수정 아이콘
재미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23/01/30 17:00
수정 아이콘
그렇죠

남자라면 물러설 수 없는 그런 승부가 있는 법
23/01/30 17:23
수정 아이콘
크크크 재밌네요
만렙꿀벌
23/01/31 09:55
수정 아이콘
'도망치면 하나, 전진하면 둘'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7800 [일반] 정년연장에 대해 어찌생각하십니까? [100] 미즈레이13614 23/01/30 13614 1
97799 [일반] 훈수 [9] 초모완6571 23/01/30 6571 10
97798 [일반] 직장 선택의 어려움 [24] 백수갓수8332 23/01/30 8332 6
97797 [일반] 한 능력자가 만든 그래픽카드 중고 시세 조회 페이지 [14] SAS Tony Parker 14648 23/01/30 14648 1
97796 [정치] 학교구성원 순결조례 등장 [74] SkyClouD12944 23/01/30 12944 0
97795 [정치] 국민연금 보험료율 9%→15% 합의, 노예로의 길 [445] dbq12321758 23/01/30 21758 0
97794 [일반] 흰머리 단상 [16] nm막장9405 23/01/29 9405 6
97793 [일반] <몬티 파이튼의 성배> - 이런 미친 영화가. [35] aDayInTheLife10313 23/01/29 10313 4
97792 [일반] 마스크 의무 조정과 판데믹의 결말 [84] 여왕의심복16323 23/01/29 16323 192
97791 [일반] 엄마와 키오스크. [56] v.Serum12201 23/01/29 12201 48
97790 [일반] 개인적인 마블영화시리즈 재미 순위(본것만) [25] 꽃차9674 23/01/29 9674 0
97789 [일반] <현기증(1958)> - 매혹적 명작. [17] aDayInTheLife8965 23/01/29 8965 1
97787 [일반] 워킹맘의 주저리 주저리... [17] 로즈마리23997 23/01/28 23997 39
97786 [일반] 육아가 보람차셨나요? [294] sm5cap18684 23/01/28 18684 119
97785 [일반] 약간 알쓸신잡이 섞인 바르셀로나 호텔 이야기 #1 [8] Traumer11414 23/01/28 11414 6
97784 [일반] [컴덕] 3rsys, 수냉쿨러 누수사고 대응 일파만파 [71] Nacht19441 23/01/27 19441 3
97783 [일반] 10년 계정 벌점 없이 영구 강등 당한 썰 [220] 뿔난냥이20762 23/01/27 20762 33
97782 [정치] "실탄 검색하셨죠" ···뜬금포 경찰전화 [67] 20181 23/01/27 20181 0
97781 [정치] 서울 학생인권조례 폐지 직전? [122] 라이언 덕후21220 23/01/27 21220 0
97780 수정잠금 댓글잠금 [일반] 백신패스와 마스크 패스 [96] 부평오돌뼈16994 23/01/27 16994 2
97779 [정치] 갑자기 모든게 다 비싸졌네요. [96] 만수르20764 23/01/27 20764 0
97778 [일반] 추악한 민낯 [164] 부평오돌뼈19554 23/01/26 19554 14
97777 [정치] [번역] 미국 핵 전문가가 보는 한국의 핵개발=재앙 [154] 김재규열사18786 23/01/26 18786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