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09/13 14:50:10
Name 두괴즐
Subject [일반] 에이브릴 라빈이 재림하며 데려온 소녀 (에세이) (수정됨)
에이브릴 라빈이 재림하며 데려온 소녀 (에세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며칠 전 올리비아 로드리고(Olivia Rodrigo)의 정규 2집 "GUTS"(2023)가 나왔다. 좋은 팝 펑크 앨범이었다. 그녀는 Z세대의 대표 가수로, 2000년대에 대중음악을 뒤흔든 팝 펑크 아이돌, 에이브릴 라빈(Avril Lavigne)의 재림이라는 평을 받는다. 에이브릴 라빈은 작년에도 꽤 좋은 신보를 냈던 현역인지라 이런 평이 마냥 좋지 만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올리비아의 신곡을 듣고 있자니, 그 시절이 재림한다. 그 시절엔 문득 네가 있다.

에이브릴 라빈의 데뷔 앨범인 "Let Go"(2002)는 내가 CD를 사 모으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산 음반이었다. 그전에는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고는 mp3의 시대가 열렸다. 고등학생의 마지막 해를 보내며 이 음악을 듣던 그때 너는 갑자기 나타나 이 CD를 빌려달라고 했다.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이름도 학년도 모르던 네가 느닷없이 손을 내밀어서 당혹했지만, 그냥 빌려줬다. 일주일을 빌려달라고 했던 너는, 다음날 바로 돌려주었다. 얼마 후 나는 대학생이 됐고, 너는 모르겠다.

시간은 훌쩍 갔고, 대학교 2학년이 됐을 때, 느닷없이 너는 우리 학교에 놀러 왔다. 교복을 입고 왔던 걸 보면 넌 여전히 고등학생이었던 듯하다. 당시 나는 여전히 널 잘 몰랐는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노래를 부르고 싶어 했기에, 오락실 안에 있던 동전 노래방을 갔다. 거기서 넌 에이브릴 라빈의 ‘Complicated’를 불렀다. 나는 하루 만에 CD를 돌려줬었기에 별로 맘에 안 들었나 보다 했는데, 모를 일이었다. 사실은 그날 그 노래를 불렀기에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었다.

그러고는 급히 돌아갔다. 나는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기에 너의 당부를 들어야 했는데, 소년다움을 잃지 말라는 이상한 이야기였다. 그 후 나는 널 본 기억이 없다. 봤는데, 기억을 못 했을 수도 있고, 진짜 못 봤을 수도 있다. SNS의 시대에 네 소식을 들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그냥 그런 세월을 보냈다.

얼마 전 아이를 재우고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느닷없이 나의 소년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와 결혼한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여전히 그런 세월을 보내고 있나 보다.

​ 나에게 마들렌의 냄새가 되는 건 그 시절의 음악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폴은 마들렌과 홍차로 시간여행을 떠나지만, 나는 그때의 정서가 멜로디를 타고 흥얼거린다. 이건 일부러 떠올리는 기억이 아니라, 나 자신도 망각하고 있던 기억이라, 더 흉하고, 흐릿하다. 그런 의미 없던 얼굴들이 오늘의 내게는 아무렇게나 위로가 된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실제상황입니다
23/09/13 15:00
수정 아이콘
요즘에 가끔씩 2000년대 영화나 만화 등을 보고 있습니다. 저한테도 마들렌과 홍차가 필요한가 봅니다.
두괴즐
23/09/13 20:36
수정 아이콘
나이를 먹을 수록 세대 공감이랄까요. 그런 게 더 와닿더라고요. 이렇게 노화를 체감합니다. 흐흐.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9798 [일반] [2023여름]이었습니다.. [2] 연기4912 23/09/13 4912 9
99796 [일반] [2023여름] 다사다난 했던 온유의 78일(스압) [19] 소이밀크러버6638 23/09/13 6638 20
99795 [일반] [2023 여름] 뜨거웠던 여름 [3] 해맑은 전사5197 23/09/13 5197 6
99794 [일반] 에이브릴 라빈이 재림하며 데려온 소녀 (에세이) [2] 두괴즐6632 23/09/13 6632 3
99792 [일반] iPhone 15 시리즈의 주요 변경점 요약 [51] Nacht9879 23/09/13 9879 3
99789 [일반] [2023여름] 무더웠던 여름의 도쿄 디즈니랜드 [15] So,7158 23/09/13 7158 9
99788 [일반] '하루 440알' 마약류 셀프처방 의사…올핸 247알씩 처방 [88] 시린비12144 23/09/13 12144 0
99787 [일반] [2023여름] 보이후드 [4] 간옹손건미축5891 23/09/13 5891 14
99786 [일반] 오랜만에 차인 사연 [21] 9396 23/09/13 9396 23
99785 [일반] [2023여름] 올해 여름 사진 몇장 [4] 산밑의왕6212 23/09/12 6212 12
99784 [일반] 포룸 로마눔의 유적들 복원모습 [18] 삭제됨8946 23/09/12 8946 8
99782 [일반] 같은 반 친구와 놀다가 손이 친구 뺨에 맞았고? [62] 톤업선크림13160 23/09/12 13160 5
99781 [일반] [2023여름] 노들섬, 다리 사이에 끼어있는 신기한 섬 [19] Tiny7098 23/09/12 7098 11
99780 [일반] [2023여름] 내가 살아가기에 충분할 이유 [8] 글곰6545 23/09/12 6545 27
99778 [일반] [2023여름] 그냥 사진들 [14] 뿌루빵6899 23/09/12 6899 18
99777 [일반] [2023여름] 여름나라 사진사의 여름사진 모음 [15] 스타슈터8907 23/09/12 8907 43
99776 [일반] [2023 여름] Time Files... [14] aDayInTheLife8239 23/09/11 8239 14
99775 [일반] (나눔 이벤트) 책 출판 기념, 책 나눔 합니다 [131] Fig.18017 23/09/11 8017 48
99774 [일반] 약 한달만에 금연 실패한 이야기 [23] Croove9090 23/09/11 9090 10
99772 [일반] 모아보는 개신교 소식 [43] SAS Tony Parker 11053 23/09/11 11053 1
99769 [일반] PGR21 2023 여름 계절사진전을 개최합니다 [17] 及時雨5748 23/09/06 5748 7
99765 [일반] 책 읽다가 뜻밖의 국뽕(?)을 잠깐 맛보네요. [34] 우주전쟁11646 23/09/10 11646 6
99762 [일반] 출시 3년된 갤럭시핏2 요즘 가격 상태(놀람) & 센터 후기(실망) [34] 승승장구12625 23/09/10 12625 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