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11/09/16 20:24:45
Name 헥스밤
Subject bar와 음악
메탈은 언제나 대문자로, METAL!

을 지론으로 삼는 친구가 있었다. 시, 를 언제나 詩로 썼던 친구도 있었다. 하찮은 것들에 힘주어 뭐해, 라고 그들을 놀렸던 나도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언제나 바는 bar로 쓰게 된다. Bar도 아니고 BAR도 아니고 bar다. 아니야. 원래 이런 이야기를 쓰려던 게 아닌데. 사실 바와 음악, 이라고 제목을 쓰고 나니 멋적어서 bar와 음악으로 제목을 바꾸고 나니 더 멋적어서 그만 헛소리를. bar와 music은 좀 없어보이고. bar와 muzik은 허세작렬 쌍체라파장 레퍼드급이니 이쯤에서 그만하고.

각설하고, 나는 음악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세 살 때부터 그랬다. 중학교때 밴드를 하고 대학에 와선 촛불시위에서 공연을 하다 아홉시 뉴스에도 뜨고 시사인 표지를 장식하기도 한 동생과 달리 어렸을 때부터 딱히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중학교 때 영어공부용으로 비틀즈를 듣기 시작한 게 처음으로 음악을 접한 것이니 말 다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아쉬운 일이다. 김건모와 서태지와 이현도와 그 모든 대중문화의 선구자가 기예를 뽐내던 국민학교 시절에 음악을 듣지 않았다니. 사실 비틀즈도 별로 안 좋았다. 교과서에 실리면 까뮈도 재미없고, 영어공부를 위해 듣는 것이라면 비틀즈도 구린 게 인생이니. 고등학교에 가서 이런저런 친구들을 사귀다 보니, 이런저런 음악을 추천받게 되었다. 대체로 다 별로였고, 그나마 조PD와 너바나와 히데와 ratm정도를 듣게 되었다. 딱히 내 취향이었다기보다는, 그 시절이 그렇듯 내 친구의 취향이며 내 친구의 친구의 취향인 고로 내 취향이 된 그런 느낌이랄까. 대학에선 민중가요를 들었던 것 같다. 뭐. 음악 같은 건 내 인생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니 별 상관은 없었다.

문제는 새로 갖게 된 직업에 있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를 가지고 바에 온다. 오년동안 짝사랑한 여자랑 잤는데 성병에 걸렸다거나. 며칠 전에 이혼한 친구를 격려하기 위해 오거나. 단지 오늘 비가 와서 술을 마시고 싶다거나. 바텐더가 원체 매력적이라거나. 간판이 예뻐서라거나. 동생의 남편이 행방불명되었다거나. 바텐더가 응원하는 야구팀이 대패한 것을 놀려주기 위해 오거나. 강의용 북한사 자료를 소장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솟아오르는 빡침을 제어할 길이 없어 오거나. 무슨 이유를 가지고 오던, 어쨌거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술을 주문하고 음악을 듣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술에 대해서는 나름 자신이 있다. 오래 마셨고 많이 마셨고 잘 마셨고 좋아했고 좋아한다. 세계최고, 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후회 없는 한 잔 정도는 만들 자신이 있다. 쉬워 보이지만 그리 쉬운게 아니다. 오랜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에게는 똥을 튀겨 안주로 낸 후 초파리 진액과 담뱃재를 적당한 비율로 섞은 김 빠진 국산맥주를 서빙해도 별 상관 없다. 하지만 오년동안 짝사랑한 여자랑 잤는데 성병에 걸린 손님에게는 좀 다른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 '다른' 일에 나름 자신이 있다. 적어도 <술>에 대해서는.

문제가 되는 건 음악을 듣는 것이다. 아마 내가 제대로 제목을 댈 수 있는 앨범은 20개가 안 될 것이다. 아는 노래도 별로 없고, 장르도 잘 모른다. 그리고 아는 노래들이 대체로 그리 메이저하지 않다. 메이저 출신의 이만수 sk 감독대행에게 지도라도 받아야 되는 그런 상태랄까. 몇 번 데스크탑을 샀고 한 번 노트북을 샀는데 내가 쓰는 컴퓨터에 있는 mp3파일의 갯수가 30개가 안 될 것이다. 당장, 가게를 시작할 때 내가 들고 있던 노트북에는 시이나링고,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전체 앨범과 베니베나시의 satisfaction 배리에이션 열몇 개가 전부였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음악을 취미로 하는 몇 몇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들은 꽤 많은 음악을 가지고 와 깔았다. 집에서 놀고 있는 너바나와 히데의 앨범을 가져왔다. 턱없이 모자라다. 가게의 느려터진(그래도 되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안 잡히는 날이 더 많은 듯 하다) 무선인터넷은 내게 유투브를 잘 허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유투브가 있으면 뭘 하나. 내가 음악을 모르는데.

하지만 인생은 어떻게든 흘러간다.

바를 두어 달 운영하다가 느낀 게 있다. 음악을 좋아해서 바를 차린 경우도 있겠지만, 바를 하면 음악을 좋아할 수 밖에 없다. 뭐, 핵심 유흥가에 큰 가게를 하고 있으면 모를까. 대학가 구석에 테이블 3개 짜리 바를 하고 있자면, 대체로 손님이 없는 시간이 많다. 인터넷이라도 잘 되면 모를까, 문자중계 보기도 빡치는 수준이다. 할 게 뭐 있나. 주구장창 음악이나 듣는 거지. 그냥 그렇게 깔린 음악들을 주구장창 듣다 보니, 음악도 나름 재미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있게 음악을 건다. 내가 듣고 싶은 것들을. 인생은 대충 어떻게든 살아진다. 인생은 뭐랄까, 어떻게 뭘 해도 안되는 석사논문이나 취직이나 연애나 카오스 같은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음악을 별로 안 좋아하고 환경도 구질구질한 덕에 음악 신청을 받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꼭 신청하는 손님들이 있다. 못 이긴 척 신청곡을 틀어주는 날도 있다. 그래. 음악이라도 들어야지. 그리고 나도 가끔 내키는 대로 이상한 음악들을 틀기도 한다.

주구장창 자주 트는 음악음 arcade fire와 amy winehouse가 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이튠즈 기본 abc 아티스트 정렬을 하면 위에 떠서 그냥 듣다보니 좋아졌다. 사실 가게 초에 주구장창 틀었던 음악은 에디트 피아프. 어쩌다보니 탱고 계열의 부에나비스타나  armand lassagne의 아코디언, bajofondo tango club을 트는 경우도 많다. 일단 묘한 분위기이면서 씐나니까. 아마 가게에 한번쯤 들른 분들은 대부분 아 이거, 하실 그것들.

손님이 많고 시끄러운, 한달에 몇번 없는 호기가 오면 House rulez나 Aphex twin류의 하우스/일렉트로니카로 밀어버린다. 의외로 조용한 바에 어울리는 느낌이다. 시이나 링고의 리메이크반들도 좋다. 시끄럽고 묘하다는 점에서는 일단 합격점. 초기 정규앨범들은 너무 쎄서 역시 틀기 좀 그렇고. 더 시끄러워지면 아예 각잡고 코피클라니의 Vodka!라거나 DOA의 You spin me round. 아니면 아쌀하게 섹스피스톨즈/반달/그린데이의 펑크롹으로 달리거나.

가끔 분위기가 나락으로 가면(혹은 엄밀히는 내가 나락을 보고 싶으면) 트윈폴리오의 에델바이스라거나 웨딩케익 같은 걸 튼다. 음. 이를테면 예전에 사귄 여자가 다음달에 결혼한다는 걸 알게 된 손님이 왔는데, 가게에 다른 손님이 거의 없을 때라거나. 뭐. 좀 짖궂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서 어쩔. 트로트도 은근히 많이 거는 편이다. 물론 오리지널은 현인 버전 말고는 잘 안듣는 편이고 주로 말로나 한영애가 무난하니까 뭐...그냥저냥 우울하게 포티세드나 조이디비전, 시티즌코스 요정도도 듣는다.

손님들이 다 뭘 틀어도 괜찮은 상황이 오면, 엄한 노래를 건다. 새벽 두시가 넘어가고, 단골들만 가게를 채우고, 길가에 사람이 없으면 시작되는 괴기음악타임. 주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으로 시작해서 정태춘을 찍고 민중가요 컴필레이션을 좀 달리다가 뚫훍송 반복재생좀 갔다가 바바예투로 분위기좀 낮추고 백현진이라거나. 세상에서 가장 괴랄스런 가사를 가진 노래라고 생각하는 나자레스 임포텐츠라거나. 뭐. 이런 상황에선 물론 내가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편이다. 음악 좀 이상하게 나갈 텐데, 신경 끄시고 엿같은 술이나 더 시키세요. 그냥 히데 앨범 3장 연속 퉁치기, 너바나 4장 연속 퉁치기, 시이나링고 4장 연속 퉁치기 이런 것도 가끔 지른다. 뭐. 바에 어울리는 음악이 아닐 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어쩔.

지금은 Bajofondo tango club의 앨범을 걸어놓고 있다. 아 이 늘어지는 찐득함이 좋다. 그런데 손님이 없다. 손님이 없으면 없는대로 글을 쓸 시간이 생기니 이 아니 좋을쏜가. 는 개뿔. 인터내셔널가 재즈 피아노 버전을 들으며 글을 마무리하고, 냉장고에서 맥주나 한 병 꺼내먹어야겠다. 바의 음악은, 괴랄한 편이 좋다. 언제까지 재즈와 올드락만 들을텐가. 대학 시절 꿈 중 하나가 시이나링고를 들으며 칵테일을 마시는 것이었는데, 트윗을 하다 보면 비슷한 꿈을 가진 손님들이 꽤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남이 안하는 걸 해야 성공하는 거다. 물론 남이 안하는 건 안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게 문제겠지만. 훗.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9-19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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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앞의늑대
11/09/16 20:30
수정 아이콘
분위기에 맞는 음악도 좋지만 음악에 맞춰지는 분위기도 좋아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머릿속에는 어떤 음악을 틀어도 어떻게든 어울릴거 같은 바가 떠오르네요.
지니쏠
11/09/16 20:36
수정 아이콘
bar에 가보고 싶어 지는 글이네요. 홍보글 제재 안하나요?! 크크.
ChRh열혈팬
11/09/16 20:44
수정 아이콘
알고보니 고도의 바 홍보글이네요 ^^ 나중에 신촌 갈 날 있으면 들려도 괜찮으시죠?히히
헥스밤
11/09/16 20:46
수정 아이콘
아오 예전에 소설쓰기에 심취(?) 했던 시절엔 뭔 소설을 써도 '일기냐?' '일기지?' '그래서 그여자랑 어떻게됨? 아직 만남?'
이런 반응들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던 시절이 있는데

요즘에는 바 관련 이야기 쓸때마다 항상 아 최대한 홍보이야기같이 안보이게 잘 써야지 노력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흐윽으윽엉엉엉..
11/09/16 21:05
수정 아이콘
I want to take you to gay bar
12등급사이오닉파
11/09/16 21:18
수정 아이콘
대전에서 공익하다 오랜만에 학교갈일 생겼는데 신촌 어디신거죠?
11/09/16 21:32
수정 아이콘
아. 안그래도 생각나서 바 위치를 여쭤볼까 했는데 TILT였나 거기네요.... 알듯말듯합니다. 나중에 한번 꼭 찾아갈께요
amoelsol
11/09/16 21:35
수정 아이콘
신촌은 더 이상 우리 또래가 술마실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이제 주량은 그때의 5분의 1도 안될텐데... 졸업한 지 10년이 지났는데 문득 신촌에 가보고 싶어지네요. 이제 퇴근해야 하는데 멀지 않은 신촌에라도 들러볼까요? 담배 냄새 나면 콜록댈테니 쫓겨날지도?;;
레지엔
11/09/16 23:34
수정 아이콘
한 번 가봐야겠군요(..)
ridewitme
11/09/16 23:34
수정 아이콘
우와~또 잘읽었어요 글좀 자주 써주세요! 히히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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