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3/11/19 17:33:42
Name 세츠나
Subject 얘아, 부엌칼 좀 줄래?
"얘야, 부엌칼 좀 줄래?"

어머니가 부탁합니다.

"네~"

아이는 기꺼이, 좋은 의도로 부엌칼을 집어들더니
불쑥!...하고, 손잡이를 쥔 채로 날을 쑥 어머니를 향해 내밉니다.

자,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어머니는 기겁을 하고 놀라시겠죠. 당황할 수도 있고. 그 이후엔?
화를 버럭 내실지도 모르고 가슴을 쓸어내리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쨌건 아마 아이에게 제대로 된 버릇을 가르치려 애쓰실 겁니다.

많은 분들이 아십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펜이 칼보다 강한 흉기도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즘 굿데이 사태가 저를 가끔 슬프게, 가끔 화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언어가 가진 마성과 힘 때문입니다.

저는 정정당당한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항상 실천하기는 어렵죠.
그러나 인터넷의 익명성은 평소의 자신을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해줍니다.
그래서 저는 실제보다 정의롭고, 현명하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보이려고 하고
또한 그것이 현실의 나에게도 반영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통은, 익명성을 나쁘게 이용하는 분들이 더 많더군요.
현실의 자신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면, 오히려 자기 껍질을 깨고
더욱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누구나 악한 것을 혐오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텐데...

그러나 pgr은 어느 정도, 익명성을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는 분들이 많다고 봅니다.
현실에서는 욕도 하고 싸움도 하고 악도 쓰고 투덜대고 귀를 막고...
하지만 여기서는 자제하고 언성을 낮추고 고운말을 하고 잘 듣습니다.

고지식하고 위선적이라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저는 그것을 아름다운 위선이라 부르겠습니다.
선한 것이 어떻게 나쁠 수 있습니까? 현대의 도덕 기준이 그렇게까지 비뚤어졌나요?

...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어머니는 아이에게 가르칩니다.

"얘야, 어머니에게 부엌칼을 넘겨줄 때에는 날을 잡고 손잡이를 상대에게 향한 채
조심스럽게 건내주는 것이란다. 칼은 위험하고 상처줄 수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것은 어떤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라고 가르칠겁니다.
설령 자신에게 불편하고 위험을 끼칠 수 있더라도 말입니다.
저는 어린 마음에도 그런 어머니가 옳다고 생각했으며,
지금도 어머니의 선한 가르침을 믿고있고
여전히 사랑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쉬면보
03/11/19 17:35
수정 아이콘
우오오.. 캄동!! >_
세츠나
03/11/19 17:39
수정 아이콘
날을 잡고 손잡이를 상대에게 향한 채 칼을 건내주는 정도의 정성...
어떤 분이건 어머니로부터 잘 배웠고, 가지고 있는 정성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작은 정성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들 중 하나라고 믿고있습니다...^^
TheMarineFan
03/11/19 17:40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이네요.. ( 글 잘 쓰는 사람이 부럽습니다. 정말로...)
세츠나
03/11/19 17:45
수정 아이콘
흐...현실의 저하고 비교하면 여기서 이런 그럴듯한 글을 쓰고있는 저는 정말로 위선자지요[...] ^^;
다만 아름다운 위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답니다 ㅠㅠ;;;
평균율
03/11/19 18:10
수정 아이콘
아이가 어머니께 칼날쪽을 내밀었을때
어머니가 버럭 화를 내면서, 그런걸 그렇게 주면 어떻게 하냐고 다그치면서, 칼 전달하는 방법을 가르치신다면... 어떨까요?

영문을 모르는 아이는 억울한 마음에 뭘 잘못한거냐고 어머니께 대들지는 않을까요?

휴우~
분홍색도야지
03/11/19 18:34
수정 아이콘
영문을 모를 때에는 대드는게 아니라 정중하게 묻는다는 것도 가르쳐야 겠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5136 [잡담]최근에 나를 전율케 한 것(?)들 [10] 지붕위10046129 03/11/20 6129
15135 조정현님 새소식 [30] cotmool8045 03/11/20 8045
15134 3년간을 기다린 앨범.. [33] 새로운시작5560 03/11/20 5560
15132 [잡담]교회....... 다닐까......요? [27] 박아제™4187 03/11/19 4187
15131 내 생애 최대의 용기! [10] eritz4036 03/11/19 4036
15129 메가웹에 처음 갔었던 날.. [9] DesPise4213 03/11/19 4213
15128 어떤 기인과의 만남.... [7] Love of Zerling3794 03/11/19 3794
15126 편법을 불법일까요?+잡담 [9] 날아라 초록이3020 03/11/19 3020
15125 바쁜 프로게이머들 [8] 라누4935 03/11/19 4935
15124 진남선수의 영장. [27] 혈향_血香★7296 03/11/19 7296
15123 방금 한 남자에게서 혼인신고서를 받은 19살 소녀의 기분... [30] 분홍색도야지6347 03/11/19 6347
15122 아.. 그만둘 수 없는... [8] 프토 of 낭만3142 03/11/19 3142
15121 감량이 뭔지 아시는지.. [6] 이병호2824 03/11/19 2824
15119 MBCgame 아마추어대회및 OnGamenet알바모집 [3] 투덜이스머프4016 03/11/19 4016
15116 [잡담] 군인 이라는 이유로... [16] 4aK3456 03/11/19 3456
15115 어제 최연성 선수 경기를 보고..... [8] 양준4569 03/11/19 4569
15114 [잡담] 또 다른 게임이야기 [1] TheMarineFan2859 03/11/19 2859
15113 얘아, 부엌칼 좀 줄래? [6] 세츠나3422 03/11/19 3422
15110 [잡담] 금연 [10] Eternity2746 03/11/19 2746
15109 [잡담] 아래분의 글을 읽고 문득 최연성 선수에 관해.... [69] RM6226 03/11/19 6226
15107 최연성 선수.. 나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 같습니다. [12] 분홍색도야지4958 03/11/19 4958
15106 퍼옴))추억의 스타크래프트 기사 [12] 랜덤테란5111 03/11/19 5111
15105 온라인 커뮤니티 비엔날레를 개최한다고 합니다. [4] DefineMe2655 03/11/19 265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