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4/08/11 08:49:49
Name 계층방정
Link #1 https://kiss.kstudy.com/Detail/Ar?key=3991906
Subject [일반] 지리산은 왜 智異山으로 쓰고 지리산으로 읽을까? - 상고한어의 흔적
한민족의 영산 지리산. 신라, 고려, 조선 역대 왕조에서 모두 제사를 지낸 산이자, 대한민국에서도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산입니다.

그런데 이 산의 이름은 한자로는 '지이산'(智異山)으로 쓰고 '지리산'으로 읽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선, 지리산은 한자로 地理山이라고도 쓰는데, 이건 '지리산'으로 읽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표기가 있는데, '리' 부분을 異 외에도 而, 利, 理로도 씁니다. 음이 '이'인 한자도 있고 '리'인 한자도 있습니다. 한국지명학회에 따르면 '지루하다'의 옛말인 '지리하다'에서 산의 이름이 나왔다고 하니 원래 이름은 '지리산'이 맞을 겁니다.

대개는 이 지리산의 한자 표기는 '활음조 현상'으로 설명합니다. 어투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리을이 첨가되어 지이산에서 지리산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원래 산 이름 자체는 지리산인 것을 감안하면, 한자로 표기할 때 음이 '리'인 한자 외에 '이'인 한자도 '리'를 표기하기 위해 쓰일 수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지리산이란 이름이 매우 오래된 것을 감안하면, 어쩌면 한국 한자음의 기준이 되는 중고 한자음 이전의 상고 한자음의 영향일 수도 있다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중국어의 음운 체계는 서양 음운학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연구가 되어 있었는데, 한국어로 따져보면 초성 자음에 해당하는 성모와 나머지 부분에 해당하는 운모로 소리를 나누어 분석합니다. 한국어의 초성 자음은 24개지만 중국어의 성모는 현재는 21개인데, 처음으로 성모와 운모를 구분해 중국어 음운학이 발생한 시대인 중고한어의 성모 수는 대략 37 ~ 51개로 학설에 따라 다릅니다. 그 성모 중의 하나가 써 이(以)자를 쓰는 이모(以母)입니다.

以母는 지금은 영성모, 즉 소리 없는 성모로 봅니다. 그래서 以의 한자음이 모음만 있는 '이'죠. 우리말에서 이 영성모를 표기하는 한글이 바로 초성 이응입니다.
그러나 중세 한국어 자료에서는 以母 한자의 초성을 리을이나 니은으로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화할 융(融)을 '륭', 제사 융(肜)을 '륭', 물깊고넓을 융(瀜)을 '륭', 팔 육(鬻)을 '륙', 초나라서울 영(郢)을 '녕'이나 '령'으로 쓰는 것이지요. 마침 학자들은 以母의 상고음에는 유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한국어에서 유음은 리을로 표기합니다. 그래서 以母 한자들의 초성에 리을이나 니은이 들어가는 것을 상고음의 잔재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리산의 異 역시 以母입니다.

즉, 智異山은 원래는 '지이산'으로 읽어야 하는 게 아니라, 쓸 때부터 원래 상고음의 영향으로 '지리산'으로 읽던 표기였을 것입니다. 나중에 以母가 영성모로 바뀌고 한국어에 중고한어가 들어오면서 한자 음이 체계적으로 중고한어를 따르도록 바뀌었지만, 전부터 쓰던 상고음이 남아 있었고 특히 지명은 보수적이므로 '지리산'에서는 옛 음이 그대로 보전되어 지금까지 내려왔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한국의 고대 국명인 가야(加耶, 伽倻) 역시 가라(加羅), 가락(駕駱)이라는 다른 표기에서 둘째 음절의 초성이 리을로 나타납니다. 지금의 한자 표기 伽倻는 불교 성지 부다가야의 영향으로 고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耶 역시 以母이고, 따라서 원래 상고음으로는 '가라'에 가까운 소리였을 겁니다. 지리산과는 달리 가라가 가야로 바뀐 것은 중고한어를 바탕으로 번역된 불경의 영향으로 耶나 倻 역시 상고한어에서 중고한어로 음이 완전히 바뀐 탓일 겁니다. 가야가 불교의 성지이기도 하니 더더욱 그 영향이 강했겠지요.

국립국어원에서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으로 표시한 한자 변이음 중에서는 이처럼 한국 한자음의 기준이 되는 중고한어가 아닌 상고한어나 근고한어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한자들을 몇몇 더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지(只)는 이두에서는 '기'로 읽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면 이성계가 상대한 한 왜장을 고려인들이 부른 이름 아기바투(阿只拔都)에서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只가 속한 章母를 상고한어에서는 *krj-, *khrj-, *grg-로 추정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근고한어에서는 한국어로 따지면 몇몇 예삿소리가 거센소리로 바뀌는 현상이 있었는데(이를 전탁청화라 합니다), 한국에서는 어떤 경우에는 옛 중국어 방식으로 예삿소리를 유지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중국어의 변화를 받아들여 거센소리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예삿소리를 유지한 예로는 창자 장(腸), 돈 전(錢), 엿 당(糖)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센소리도 어느 정도 유입됐는데, 창자(腸子), 사천(私錢), 사탕(砂糖) 등에서는 이 한자를 거센소리로 읽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센소리로 바뀐 예로는 가죽 피(皮), 주사위 투(骰), 통 통(筒)이 있는데, 예삿소리가 유지된 경우로 녹비(鹿皮), 두자(骰子), 동개(筒介) 등이 있습니다.

이 글은 신우선, 〈한국한자어에 반영된 이른 시기 중국어 운모 층위 고찰〉, 《중국언어연구》 101집, 35~56쪽의 논문을 바탕으로 합니다. 링크를 걸어 놓습니다만 애석하게도 유료 논문이네요. 학술논문은 아니고 신우선의 논문보다 논지 전개가 좀 어설픈 감은 있지만, 그보다 좀 더 이른 자료는 아카이브뉴스의 다음 기사가 있습니다. https://archivesnews.com/client/article/viw.asp?cate=C03&nNewsNumb=20150216643

초성이 많이 나오는 글이라 만우절 때 쓰는 게 더 좋았지만, 최근에 읽은 논문이고 다음 만우절은 꽤나 먼지라 그냥 올립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디쿠아스점안액
24/08/11 09:25
수정 아이콘
지리산 한자 표기가 저랬군요...
계층방정
24/08/12 20:12
수정 아이콘
특이하죠. 좀 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표기도 있는데 저게 굳어진 게 신기합니다.
24/08/11 09:51
수정 아이콘
잘 배우고 갑니다.

고대어 음운을 재구성하는걸 볼 때마다 궁금해지는데..
1. 과거에는 지금처럼 표준어 규정이 없었을겁니다. 그래서 누구는 이리 쓰고 누구는 저리 쓰는게 심했겠죠.
특히 신문방송이 없었으니 사투리가 더욱 두드러졌을거고.
2. 분석의 대상이 되는 자료가 동 시대별로 엄청난 양이 있지는 않을거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시대에 따른 언어의 변화인지, 아니면 개인 또는 지역에 따른 표기의 차이인지 어떻게 구별할까요?
계층방정
24/08/12 20:17
수정 아이콘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한자는 자체적으로는 표음 기능이 없기 때문에 난감한데요, 여기에서 많은 힌트를 제공하는 게 시와 같은 운문학입니다. 소리를 바탕으로 만드는 작품이기 때문에 소리를 추정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고대에도 지역적인 사투리 차이를 극복하고 소통하기 위한 링구아 프랑카가 있었기 때문에 대개는 이런 고대의 대세 언어를 연구합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상고한어의 소리를 추정할 때에는 《시경》이 중요합니다. 시이고, 고대 중국의 외교에서는 서로 자신의 뜻을 담은 《시경》의 시를 읋어서 의사를 전달했으니까요.
24/08/13 08:36
수정 아이콘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중국은 그런데, 고대 한어의 자료도 많이 있나요?
계층방정
24/08/13 20:49
수정 아이콘
고대 한국어라면 안타깝게도 정말 자료가 없어도 너무 없다고 들었습니다.
24/08/14 11:49
수정 아이콘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부작
24/08/11 10:08
수정 아이콘
아하!
계층방정
24/08/12 20:1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24/08/11 10:46
수정 아이콘
(필기도구인) '먹'과 '붓'도 상고한어란 이야기를 처음 듣고 신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참 뒤에 유입된 '묵', '필'과 비교하면 한자어의 느낌이 전혀 들지 않네요.
계층방정
24/08/12 20:17
수정 아이콘
저도 그거 들었을 때 마찬가지로 신기했어요.
24/08/11 15:30
수정 아이콘
오 잘 읽었습니다 크크
계층방정
24/08/12 20:18
수정 아이콘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크크
가을의빛
24/08/11 15:4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계층방정
24/08/12 20:18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노력할게요.
24/08/14 02:02
수정 아이콘
지금 지리산에 워크숍 왔는데 지리산 관련글을 보니 더 재밌게 읽었습니다. 혹시 계곡 놀러오실분은  ’느티나무 산장‘ 괜찮은것 같습니다, 세미나실도 있구요!
어제는 지리산 바위에 한자글도 발견되었다고 하는 소식입니다.
https://m.khan.co.kr/environment/environment-general/article/202408131321001/amp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2074 [정치] 한동훈 “이길 수 있다”던 ‘엘리엇 배상’ 패소 [46] 베라히16917 24/08/11 16917 0
102073 [일반] 고등어가 영어로 무엇일까? [46] pecotek12636 24/08/11 12636 1
102071 [정치] TBS “폐국 위기... 김어준 등 사재 털어서라도 우리 도와야” [63] 베라히16495 24/08/11 16495 0
102070 [일반] 과거 TV조선에서 미스트롯, 미스터트롯을 런칭했던 서혜진 PD 인터뷰 기사인데 생각해 볼 만한 구석도 꽤나 있네요. [18] petrus12807 24/08/11 12807 2
102069 [일반] 주식시장 전망과 빤스론 [19] Genial_8993 24/08/11 8993 20
102068 [일반] <트위스터스> - Hell of a ride. (노스포) [2] aDayInTheLife3947 24/08/11 3947 0
102067 [일반] 지리산은 왜 智異山으로 쓰고 지리산으로 읽을까? - 상고한어의 흔적 [16] 계층방정5861 24/08/11 5861 12
102066 [일반] [팝송] 뉴 키즈 온 더 블록 새 앨범 "Still Kids" [10] 김치찌개4805 24/08/11 4805 1
102065 [일반] 일본기차여행 - 오렌지쇼쿠도(오렌지식당) (사진/스압) [18] 오징어개임6092 24/08/10 6092 28
102064 [정치] 도대체 무엇이 무서워서 조문까지 막는건가 [26] 후추통11954 24/08/10 11954 0
102063 [일반] 전쟁특수는 현대에도 유효한가? [25] 고무닦이8426 24/08/10 8426 5
102062 [일반] 해외 크로스핏 대회 중 선수 한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네요 [12] 랜슬롯11526 24/08/10 11526 1
102061 [일반] 페이스북에 블로그 링크도 못 올리게 생겼네요 [14] 소오강호8197 24/08/10 8197 0
102060 [일반] [서평]《세금의 세계사》 - 무정부자본주의적 역사관과 이상사회 [28] 계층방정5013 24/08/10 5013 5
102059 [일반] 여자보컬 락밴드 좋아하세요? [37] 샤크어택8079 24/08/09 8079 0
102058 [일반] 호미로 막을걸 가래로도 못막게 만드는 일부 자영업자들 [29] 천영11254 24/08/09 11254 20
102057 [정치] 용산과 외교부의 ‘역사 매국’…사도광산 찬성 정해놓고 대놓고 거짓말 [61] Crochen9929 24/08/09 9929 0
102056 [일반] 아파트 전기차 화재 사건, 당일 스프링클러를 꺼서 동작하지 않은것으로 밝혀짐 [183] Leeka13255 24/08/09 13255 1
102055 [정치]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 "친일인명사전, 억울한 친일 매도 안돼" [47] 주말9750 24/08/09 9750 0
102053 [정치] 중독법이 재발의 되었습니다. 그런데 훨씬 나아진. [24] manymaster9185 24/08/09 9185 0
102052 [일반] 소리로 찾아가는 한자 22. 익힐 습(習)에서 파생된 한자들 [4] 계층방정4083 24/08/09 4083 2
102051 [일반] 인류 역사의 99%를 알아보자: 수렵채집사회와 ADHD [5] 식별6018 24/08/09 6018 14
102050 [일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 너무 많은 걸 대면한, 그때의 소년(들). [4] aDayInTheLife5193 24/08/09 5193 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