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RPG 게임에서는 지하 던전을 기어다니며 몬스터를 물리치고 보물을 찾는 내용이 나온다. 어떤 방에는 보스가 있고 지하로 내려갈수록 더 강력한 장비를 갖추어 더 강력한 괴물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 '던전'이라는 공간이 RPG에 정착한 것은 1970년대에 시작된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 덕인데, 1980년에 출시된 '로그(Rogue)'는 최초로 던전을 탐색하는 게임을 컴퓨터 그래픽 상으로 구현해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무작위 환경과 영구적 죽음 개념을 골자로 한 '로그라이크 장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최근에는 아예 던전에 불법적으로 쳐들어오는 모험자들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던전운영물'이나 던전 내부의 독자적인 생태계 조명하는 작품들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초인 '던전'이라는 단어와 그 개념이라는 게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실제 역사에도 그런 지하 던전이 있었을까?
던전의 어원

던전(dungeon)이라는 단어는 14세기에 처음 등장했는데, 성채 내부에 지어진 높은 아성(Keep)을 이르는 프랑스어 '동종(donjon)'에서 유래되었다. 이 요새화된 탑은 본래 높으신 분들의 거처이자 성채의 최후 피난처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공간이었다.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곳과는 거리가 아주 먼, 고귀한 신분의 이들이 주로 머무는 쾌적한 곳이었다. 그리고, 중세 시대의 귀족들은 보통 포로로 잡히면 축축한 지하 감옥이 아니라 이런 쾌적한 객실에서 머물곤 했기에, 던전은 '감옥'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던전(Donjon)의 가장 밑바닥에는 다목적 용도의 지하실이 존재했고, 분명 사람을 가두는 용도로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런 중세 지하 감옥의 이미지에 가장 부합하는 단어가 바로 '우블리에트(Oubliette)'다.

우블리에트는 '잊어버린다'는 뜻에서 온 단어로서, 말 그대로 여기에 던져두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지하 감옥 개념은 19세기 고딕 호러 장르에서 특히 유행했는데 앙스틀로흐(angstloch)라고도 불리는, 바닥에 뚫린 일종의 좁은 위장 함정문 같은 것에 사다리나 밧줄로만 내려갈 수 있는 것이 고딕 장르 지하 감옥의 특징이다.
후대의 호사가들이 지하 감옥이었을 것이라 추측했던 대부분의 성채 지하실들은 본래 사람을 가두는 용도 보다는 물탱크나 창고, 특히 공성전을 대비하여 돌 투사체를 쌓아두는 용도로 쓰이곤 했다. 변소, 그러니까 성의 오물들이 최종적으로 빠져나가는 배수구 역할을 하는 최하층으로 쓰이기도 했다.
얼마나 자주 벌어졌을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오물을 쌓아두는 용도로 쓰이던 이런 끔찍한 환경의 지하 감옥실에 일부러 누군가를 가둬버리는 일도 없진 않았을 것이지만 말이다.
역사 속 사례

이 웅장한 폰테프랙트 성채 또한 고귀한 신분을 가진 이들이 삶을 끝마치는 던전으로 유명했다. 영국의 리처드 2세 또한 폐위된 뒤 런던탑에서 폰테프랙트 성채로 이감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는 이 때의 장면이 언급되어있다.
폼프렛, 폼프렛! 오, 너 피로 물든 감옥이여,
고귀한 귀족들에게 치명적이고 불길한 곳이여!
네 죄 많은 성벽 안에서
리처드 2세가 여기서 난자당했지
그리고 네 음침한 곳에 더 큰 오명을 씌우기 위해,
우리는 죄 없는 우리의 피를 네게 마시도록 내어주노라.
Pomfret, Pomfret! O thou bloody prison,
Fatal and ominous to noble peers!
Within the guilty closure of thy walls
Richard the second here was hack'd to death;
And, for more slander to thy dismal seat,
We give thee up our guiltless blood to drink.

연대기 사가들은 리처드 2세의 최후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남겼다. 어떤 이들은 지하감옥에서 먹을 것을 제공받지 못해서 죽었다고 했고, 다른 이들은 리처드 2세가 절망하여 스스로 곡기를 끊어 죽게 되었다고도 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처럼 잔혹하게 난자당해 죽게되었다는 자극적인 설은 오늘날의 역사가들로부터는 허구성이 짙다고 여겨진다.
리처드 2세가 폰테프랙트의 지하 감옥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게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아무도 리처드 2세를 '직접' 죽이지 않았고, 당대에 그가 살아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리처드 2세는 백골이 되어서야 폰테프랙트 성채를 나올 수 있었다.
영국에서 유령이 가장 많이 출몰하는 것으로도 악명 높은 칠링엄 성 또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스코틀랜드를 성공적으로 약탈하고 학살해 '스코트인들의 망치'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 치하에는, 국경지대에 있던 이 칠링엄 성 지하 감옥이 늘상 수없이 많은 스코틀랜드인 포로들로 붐볐다.

칠링엄성 지하 감옥 또한 이들이 겪은 각종 끔찍한 고문에 대한 전설로 유명한데, 감옥의 돌벽에서는 여전히 수백년 전 희생자들이 매일 한 줄씩 그은 선들을 볼 수 있다.

감옥으로서의 성

이처럼 성채에 감옥이 설치되었던 이유로는 궁극적으로 당시의 성채가 정치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견고한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어, 들어가는 것도 나가는 것도 힘들고 복잡했다는 이유도 한 몫 했다. 내부에는 사람을 격리하기 위한 여분의 방들도 있었고, 이런 방을 감시하기 위해서는 몇 명의 경비병만 순찰하고 있어도 충분했다. 초창기 이런 특별한 '던전'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주로 국왕과 트러블이 있었던 고위 성직자나 귀족들이었다.
이 시대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형태의 체계적인 교정 시설이 없었기에, 어떤 범죄 용의자를 수용해야할 필요가 있다면 가까운 성으로 끌고 가 재판 전까지 그곳의 남는 방에 가둬놓고, 또 유죄 판결이 난 범죄자들도 남는 옆 방에 가둬놓고 그런 식이었다. 그리고 굳이 수고를 들여서까지 가둬놓아야할 인물들은 대개 살려둘만한 가치가 있는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세시대 성에서 특별히 감옥의 위치를 식별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성들에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감금용 방이 존재했으리라 추정되지만, 오늘날 역사학자들이 명백한 감옥의 사례라고 확신하는 것은 겨우 몇 가지 사례에 불과할 정도다. 막다른 곳에 위치하며, 벽난로가 없고, 빛이 잘 들지 않는 방이 아마 감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건 창고, 금고나 음식 저장고,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변소용 방이 갖는 공통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던전과 우블리에트의 혼용을 이해할 수 있다. 고귀한 분들은 높은 탑의 쾌적한 '던전'에 말하자면 연금(軟禁)당한 신세였지만, 천한 것들은 탑 지하의 불결한 우블리에트에 아예 쳐박혔던 것이다. 실제로 스코틀랜드의 성채들에는 성채 하나에 귀족 포로들을 위한 탑 내부의 '던전'과 하층민들을 위한 지하구덩이 '우블리에트'가 동시에 존재하는 사례가 다수 나타난다.
우블리에트는 당대인들에게 '비밀 기계장치를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깊은 심연'이자, '죄지은 자들을 겁박하고 처벌하기 위한 지옥 구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층민들을 위한 이런 끔찍한 우블리에트에는 주로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이 곳은 아무런 빛이 들어오지 않는 끔찍한 공간이었다. 운이 좋은 경우 용변을 볼 수 있는 변소가 있었고, 최악의 경우에는 그것마저 없었다.

이런 우블리에트는 주로 목재로 건축되어 오늘날에는 흔적도 없이 삭아 없어진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오늘날의 우리는 성에서 발견된 거래장부 속 '사슬(ferramenta)' 지출 내역을 통해서만, 많은 하층민들이 쇠사슬에 묶여 악취와 역병이 도사리며 빛 한 조각 안들어오는 이 처참한 장소에 투옥당한 채 생을 마감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실제로 던전과 흡사했던 것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는 rpg 장르의 '던전'과 비슷한 것들도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다. 오래 전부터 인류는 쳐들어온 적으로부터 숨기 위해, 그리고 적의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전쟁에 지하 터널을 활용하곤 했다. 비좁고 어두운데다 미로처럼 얽혀있는 터널은 공격자 입장에서 지극히 위험하다.
인류 최초의 화학전도 아마 지하 터널을 배경으로 벌어졌을 것이다. 로마 제국이 아이톨리아 동맹을 공격할 때 벌어졌던 암브라키아 공성전 당시, 아이톨리아인들은 로마군의 땅굴 속으로 깃털과 석탄을 불태운 연기를 흘려보냈다. 중국 전국시대의 공성전에서도 땅굴은 요긴하게 쓰였다. 마찬가지로 땅굴 속에 풀무로 연기를 발생시키는 작전이 시행됐다.
구찌 땅굴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거대한 전쟁 터널은 무려 그 길이가 250km에 육박했던 '구찌(Củ Chi) 땅굴'이다. 베트남전 시기 수많은 미군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이 땅굴은 매우 비좁은 통로와 함께 해충과 독사가 우글거리는 말 그대로 실존하는 지하 던전이었다. 이 땅굴은 그 유명한 구정 공세에도 기지로 활용되었는데, 땅굴의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오천 명도 넘게 수용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1966년 1월 8일, 미군은 이 땅굴망을 '일소'하기 위해 B-52 폭격기에 고폭탄을 싣고 날려보냈고, 한 때 무성했던 땅굴 근방의 정글이 마치 달 표면처럼 황폐화됐다. 이른바 '압착 작전(Operation Crimp)'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폭격에도 불구하고 구찌 땅굴망은 멀쩡했고, 여전히 사방에서 저격수가 튀어나왔다. 결국 땅굴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직접 들어가야한다는 게 점차 명확해졌다.
1월 9일, 샌디 맥그리거 대위 휘하의 전문 공병부대인 호주 제 3 야전부대는 구찌 땅굴 내부로 들어간 최초의 부대가 되었다. 샌디 맥그리거 대위는 한 손에는 횃불, 다른 한 손에는 권총을 든 채 땅굴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부대는 전화선과 나침반에만 의존한 채 땅굴의 지도를 그렸다. 이들은 훗날 '땅굴쥐(Tunnel rat)'라는 별명을 얻게 됐는데, 맥그리거 대위가 부하들을 '땅굴 페럿(tunnel ferret)'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것이다.

1월 12일, 샌디 맥그리거의 '땅굴쥐' 부대원 중 하나인 로버트 '밥' 보텔 (Robert "Bob" Bowtell) 상병이 두 지하 땅굴방 사이의 함정문에 갇히는 사고가 벌어졌다. 상병은 결국 최루가스와 일산화탄소 중독, 그리고 산소 부족으로 인해 질식사했다.
좁은 땅굴망에 직접 들어가는 '땅굴쥐'들은 보통 165cm 이하의 작은 키를 가진 것이 유리했다. 이 '땅굴쥐'들은 소음기 달린 권총과 대검, 손전등과 일부 폭발물만을 챙긴 채 땅굴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땅굴은 위험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는데, 수류탄이나 지뢰 함정, 그리고 대나무 못 함정같은 부비트랩은 예사고, 독사나 전갈, 독거미나 개미같은 천연 함정들이 즐비해 있었다.

베트콩들이 '땅굴쥐'에 대응하기 위해 U자형으로 꺾인 구조로 땅굴을 만들어 익사할 위험도 있었고, 독가스를 들이마실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내부가 너무 비좁고 여러모로 불편해서 대부분의 '땅굴쥐'들은 방독면을 쓰지 못했다. 어느 '땅굴쥐'는 이렇게 복잡하고 위험천만한 구찌 땅굴망을 두고 '뉴욕 지하철'이라 불렀다.
카타콤


600만 명 이상의 유해가 보관돼있는 파리의 지하 납골당은 가장 거대한 '카타콤'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최소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리 시는 사실 '파리석(Paris stone)'이라고도 불리는 아름다운 루테티아 석회암(Lutetian limestone) 지대 위에 세워진 도시인데, 로마인들이 루테티아(파리의 옛 이름) 시를 세우기 이전부터 이곳의 토착민들은 야외 표면에 노출되어있는 석회암을 채굴해서 건축물에 활용하곤 했다.
그러나 점차 도시의 규모가 확장됨에 따라 노천 광산의 석회암은 고갈되기 시작했다. 이런 노천 채석에 있어서 광물이 지하 표면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깊은 곳에 있는 경우엔 흙이나 기타 여러 퇴적물을 제거하는 작업이 수반되기에 작업 난이도가 급상승하게된다. 측면에서 보이는 광물층을 따라 비스듬히 파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파리 근처의 광맥들 중에는 석고층을 제외하면 그런 경우가 드물었기에 광부들은 일단 수직으로 파내려간 후 그곳에서부터 다시 수평으로 석회암을 채굴하는 방법을 채택하게 되었다.


중세 시대를 거치며 이런 수평 지하 갱도의 안정성을 높일만한 여러 기술적 진전이 있었고, 파리 시 지하에는 복잡한 미로같은 채굴 갱도들이 점차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런 갱도들은 주로 무질서하게 채굴되었다가 버려지기 일쑤였고, 동시에 시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무허가 갱도들이 우후죽순 난립했다. 게다가, 어떤 채굴 갱도는 원래 파리 시 교외 지역의 지하에 형성되었는데, 도시가 확장되며 교외 지역을 합병하자 어느새 파리 시 불법 지하 갱도로 은근슬쩍 합류하게돼버리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적어도 수백년간은 지속됐단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지하 갱도가 생겨났다가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채 기억과 지도 속에서 사라지길 반복했다. 이 버려진 '카타콤'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것은 18세기 말이었다.
1780년 5월 31일, 파리의 공동묘지(Cimetière des Innocents) 인근 부지의 지하실이 무덤의 무게를 못이기고 붕괴하여 부패한 시체에서 유독한 가스가 누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도시의 인구과밀화로 인해 묘지 수급 및 공중 보건 위생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침, 6년 전에 있었던 1774년의 대규모 지하 갱도 붕괴 사건 이후, 파리 시 밑바닥에 복잡하게 마수를 뻗치며 지상의 안전을 위협하는 '카타콤'을 본격적으로 재정비하는 작업이 시행중이었다. 자연스레 '카타콤' 재정비 사업을 하는 겸사겸사 남는 지하 공간에 유해를 옮겨 묻는 방안이 떠올랐고, 그렇게 향후 2년간 수백만의 유해들이 지하로 내려보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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