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아내 가후쿠 요스케는 연극배우이자 연출자다. 아내 오토와의 차분한 대화와 조용한 일상은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가후쿠는 사브 900 안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에 자신의 대사를 연습한다. 갑자기 취소된 출장으로 예정에 없이 집으로 돌아온 가후쿠는 타인의 품에 안겨 교성을 내뱉는 아내를 발견한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간 가후쿠는 이후 그 사건이 없었던 것처럼 연기한다. 아내 앞에서는 물론 자신의 기억 속에서 그 순간만을 잘라내기로 한 듯 무심히 살아간다. 상대는 누구였을까. 며칠 전 아내가 소개한 젊은 남자 배우였을까. 아니면 다른 남자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나를 사랑한다면서 왜 다른 남자와 그랬을까. 지웠지만 절대 지워지지 않는 악몽은 유스케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다. 어느 날 아내는 돌아오면 할 말이 있다는 말을 한다. 그날 저녁에 오토는 갑자기 죽는다.
#세 개의 이야기, 그리고 세 개의 이야기 <드라이브 마이 카>는 여러 이야기가 겹쳐 있다. 하루키의 원작 소설을 베이스로 촉망받는 젊은 신예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짙은 숨결이 서려있다. 오토가 죽고 유스케가 히로시마로 떠나는 러닝타임 약 한 시간 후에야 프롤로그가 끝났다는 듯 영화는 비로소 시작된다. 하루키의 원작은 여기서 끝, 이제부터는 내 이야기를 들어봐. 라고 말하는듯 이야기는 원작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 영화는 크게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오토, 요스케, 그리고 미사키의 이야기로. 각 이야기는 그 속에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있다. 오토는 ‘칠성장어 소녀’ 이야기를, 요스케는 ‘바냐 아저씨’를 배경으로 한 다언극을, 미사키는 홋카이도 시골 지방에서 어머니를 잃은 이야기 그리고 에필로그를. 챕터로 구분하기엔 모호한 그 이야기 사이를 주연 캐릭터들이 겪는 사건으로 부드럽게 이어간다. 겹쳐진 이야기에 비해 영화가 외적으로 뿜는 메시지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요스케와 미사키가 우연하게 만나 서로가 가진 상처를 알게 되고, 일련의 사건을 겪게 되면서 각자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되며 각자가 구원에 이르는 이야기. 하지만 이 정도로 이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지나쳐 버리기엔 너무 아쉽다. 장장 세 시간의 러닝타임을 지나 집으로 온 직후에 펜을 들어 급히 메모를 시작했다. 집안 곳곳에 널린 생활의 흔적들에 휘발되기 전 영화의 파편들을 모아 두고 싶었다. 영화에는 두 인물의 구원을 넘는 다른 층위의 메시지가 분명히 존재한다.
#바냐 아저씨, 그리고 다언극 요스케가 연출하는 연극 <바냐 아저씨>는 체호프의 원작 소설이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주인공 바냐는 예술을 동경하는 노총각이다. 그는 선망의 대상인 예술가 매형을 지원하며 자신의 꿈을 대리 만족하고 있다. 어느 날 매형이 젊고 아름다운 새 부인과 고향을 찾아오게 된다. 자신의 이상향이라 여겼던 매형이 술과 여자를 탐닉하는 무뢰한이었다는 사실에 바냐는 충격받는다. 심지어 바냐 자신은 매형의 새 부인에게 정염의 감정을 느낀다. 그는 고뇌에 빠진다. 고향의 전답을 처분하기 위해 방문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바냐는 매형을 죽이려 총을 쏘지만 시골 필부의 서투른 격발은 허공에 흩어진다. 쓰러져 울부짖는 바냐를 조카 소냐가 위로한다.
일본에서 바냐 아저씨를 연기했던 요스케는 일련의 초대를 받아 히로시마로 가 바냐 아저씨를 다언극으로 연출할 기회를 얻는다. 캐스팅된 인물들은 저마다의 언어를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심지어 수화를 사용하는 한국인으로. 연극이란 무릇 대화를 통해 감정을 전달한다. 헌데 이 이상한 다언극은 상대의 언어를 전혀 모르고 상대도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각자 짜여진 역할에 갇혀 상대 행동을 신호로 연기한다. 이 행위는 어쩌면 유스케 본인의 결혼 생활을 의미한다. 아이가 폐렴으로 사망한 후에 오토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 말한다. 그 후 조용하지만 평화롭게 살아간다 생각했다. 오토는 어땠을까. 그녀의 마음을 영화에선 풀어내지 않는다. 원작 소설에서는 가후쿠는 아이의 요절이 아내가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시작한 트리거일 것이라 말한다.(이것도 추측이지 사실이 아니다) 내면의 깊은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어떤 몸부림으로. 영화의 요스케 역시 끝내 해답을 찾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의 의사소통, 다언극을 연출하는 일은 어쩌면 그가 아내를 향해 던지는 회한의 질문으로 보인다.
다언극이 한, 중, 일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이다.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세 나라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금 과한 추측을 해본다. 감독은 이전 역사에서 일본의 과오를 인정하는 동시에 세 나라의 융합과 화합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히로시마라는 장소 또한 전범국 일본으로서 제국주의 시대의 종말, 패전의 상징이며 식민 조선과 중일 전쟁, 난징대학살 등 역사를 똑바로 마주하고 그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자는 조용한 다짐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영화에 등장하는 차 사브 900은 빨간색이다.(원작에는 노란색이다) 연극의 마지막 바냐를 위로하는 소냐의 메시지, 언어가 아닌 수화로 그 메시지는 더욱 강하게 전달된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미사키와 떠난 일련의 여행을 통해 요스케와 미사키는 각자의 과거를 마주했고, 구원받는다. 돌아온 요스케는 구속된 다카츠키를 대신해 바냐를 연기한다. 오토에 대한 속죄와 용서로 거듭난 요스케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 같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갑자기 사브 900을 모는 미사키가 등장한다. 배경은 한국이며 사람들이 모두 마스크를 착용한 것으로 보아 코로나19 펜데믹 시대인 듯하다. 사브의 900은 한국 번호판을 달고 있다. 차 뒷자리에는 윤수와 유나 커플이 기르던 개가 타고 있다. 미사키에 볼에 있던 흉터는 사라졌다. 미사키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사브 900은 도로를 가볍게 달린다. 이 씬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모든 것이 미사키의(이름 모를 한국인의) 상상 속 이야기였을까? 솔직히 앞서 이야기한 한중일 세 나라의 확장된 의미는 이 씬으로부터 시작했다. 오토의 칠성장어 소녀 이야기에서 그 소녀는 오토이기도 하고 미사키이기도 할 것이며 다카츠키 일 수도 있다. 소녀가 일련의 행위를 하는 중 침입한 사람 역시 요스케 일수도, 다카츠키 일 수도 있다. 바냐는 요스케이기도 하고 다카츠키이기도 하다. 특정한 인물이 일대일로 대입되는 방식이 아닌 인간이 지닌 입체적 내면을 의미하는 모호한 인물 구성은 인간이 단 하나의 인격이 아닌 여러 인격의 조합으로 구성된 존재한다는, 우리가 애써 망각하고 지내는 명확한 사실을 길고 긴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다시 깨닫는다. 당신이 긴 호흡의 조용한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하마구치 류스케가 운전하는 세 시간 드라이브 코스를 강하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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