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키는 대로 했잖아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
물론 월급 주는 사장님이 갑이시다.
지금도 일하는 팀원들한테 이야기하곤 한다.
사장님이 하라고 하면, 해야 합니다. 맞잖아요? 라고.
하지만 거기에도 절차와 과정과, 최소한의 선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아무튼
그래픽 총괄 형의 조언.
처음 듣는 순간 X같았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내가 그래도 기획자인데, 사장이 시킨다고 무조건 따라야 하나?
사장이 시키면 해야지. 그게 요즘 내 마인드이지만 그 때는 당연히 어렸으니까, 치기가 있었다.
물론 그 치기 따위, 몇 번 더 살포시 즈려 밟히면 봄 눈 녹듯이 사라진다는 것도 금방 알게 되지만.
"맵 이렇게 밖에 못 찍어요?"
"캐릭터 설정이 왜 이렇게 길어? 얘가 대통령이야? 누가 자서전 써 오라고 했어?"
"알기 쉽게, 일목 요연하게 정리하라고 했잖아요? 스토리 구성을 이렇게 해 오면 어떻게 한 눈에 알아 봐?"
미쳐 버릴 것 같은 피드백을 견디며 두 달 가까이 수정, 수정, 수정을 거듭했음에도 답이 없었다.
결국 사장님 말씀을 복음성가마냥 반복해서 옮겨 적으며 수정해 포함시켰고
그로부터 조금씩 이야기는 누그러져 가는 듯 했다.
아무튼 그렇게 기획 초안이 마무리되고 일단락이 되는 듯 했는데.
다시 처음부터 갈아 엎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눼? 왜요?
돌아온 대답은 한 마디.
"에X크로XX2 안 해 봤어요? 하아, 염불씨 문제네 정말."
물론 언급한 게임은 당시에 메가 히트작이자, RPG 게임의 표본과도 같은 대접을 받은 투탑 중 하나의 후속작이긴 했다.
그래서 기존 기획안을 진행하고 피드백 받을 때 해당 게임의 전작에 있었던 요소들을 넣고 빼고 하는 과정이 끝난 뒤였다.
아, 당연히 이런 일은 벌어질 수 있다. 전략적으로 수정 첨가할 수도 있지.
하지만 문제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자 원흉을 '나'로 규정하는 그 태도였다.
"염불씨 기획서 때문에 지금 다시 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 지 알아?"
어이가 없었다.
그냥 '이 게임 새로 나왔는데 어떤어떤 요소가, 이런저런 스토리가, 요런조런 컨텐츠가 너무 좋다. 지금 기획 갈아 엎어야겠다' 정도로 이야기를 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그 원인의 일부를 내게 찾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새로 나온 게임에 이런 요소가 있음' > 우리 기획에는 이런 게 없음 > 기획자인 네 놈이 파악하거나 예상하거나 관심법을 쓰거나 했어야 했는데 못했으니 아무튼 네 놈 책임임
이런 정도로만 흐름을 끌고 왔어도 그냥 '녜에' 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사장은, 작업 기간에 대한 고려 없이 새로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누군가 원흉이 되어 총대를 메도록 만들어야 했다.
모두의 불만을 그렇게 돌릴 수 있는 줄 알았던 게지. 현실은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알파요 오메가가 되어야 하는
만악의 근원이 될 타깃을 만만한 사람들로 잡은 것이었다.
그래픽은 도트 디자이너 동생놈
기획은 나
프로그래머는? 총구 들이대려다가 반발하자 깨갱하며 보류
그리고 당연히 가장 큰 대역죄인은 기획이었다.
"사장님 시키는 대로 했는데요. 왜 제 탓이예요?"
"뭐라구요?"
"사장님이 하라는대로 한 결과물이라구요. 제 의견은 거의 날아가고, 사장님 말씀대로 한 건데. 왜 제가 문제냐구요."
한번도 그런 적은 없었기에, 사무실은 갑분싸됐다.
내 말이 트리거가 된 듯, 동생 놈의 성토가 이어졌다.
캐릭터 디자인 죄다 빠꾸 먹이고, 하라는 대로 사장님 취향대로 그렸는데 왜 캐릭터 가지고 까냐?
도트 작업으로 무슨 CG그래픽이라도 만들어 내라는 말이냐
UI하고 맞춰야 한다고 해서 바꿨더니 왜 이젠 또 UI에 묻혀서 안 보인다고 난리냐 등등
그러자 분노한 사장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온 이야기는 요 근래에도 가끔 듣곤 하는 전형적인 레퍼토리.
"다 여러분 잘 되라고 트레이닝 시킨 거잖아요. 수준이 못 따라오니까."
"좋은 걸 가르쳐주면 들을 생각을 해야지, 자신의 능력을 탓해야지."
"자신들의 작업물을 부정하는 건 쓰레기 같은 짓이잖아."
대강 이런 이야기였을 것이다.
멘탈이 터지고 감정도 터지고 성질도 터지고
모든 게 터져 나가는 상황속에서
사장의 말을 듣는 내내 머리 속에서 계속 생각했다.
정말 이 인간 밑에서는 아무 것도 배울 게 없다고.
그리고 이렇게는 더 이상 일 못 할 것 같다고. 이건 아닌 것 같다고.
결국 입사 첫 날 본 여자 기획자처럼
아 물론 그렇게 멋지게 던지고 나오진 못했지만
사장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야기했다.
"그만 둘게요."
사장이 황당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뭐라고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난 그대로 내 자리로 돌아와 기획서를 책상에 집어 던지고
회사를 나왔다.
4-1. 그 여자 기획자는요...
퇴사하고 다음해 였던가로 기억한다.
우연히 같은 회사 동료를 통해 개발자들이 모이는 소규모 술 자리에 나가게 됐는데, 거기서 그 분을 만난 적이 있었다.
놀라운 건, 입사 첫 날 하루 본 것 뿐이었지만
그 하룻동안 내내 봤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입사한 날의 기억으로는
산발한 머리
손 끝이 어깨에라도 닿았다가는 베일 것 같은 싸늘한 얼굴
회사 밖에서 담배를 뻑뻑 펴대는 일진 불량 여고생 같던 포쓰
그리고
괴성에 비명까지 섞인 듯한 목소리로 사장과의 설전에서도 밀리지 않던 목소리
그런 것이었는데.
"세상 참 좁죠?"
하면서 싱긋 웃는 그 분은 완전히 여자여자 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런 게 퇴사의 힘이구나 생각했었더랬다.
역시 사장 놈이 문제였노라고, 빠른 손절 잘 했다고 스스로 칭찬도 했었고.
만약 당시에 여친이 없었다면 한 번 대쉬해 볼 만큼 느낌도 좋았었다고 기억하는데
"남자 친구 있어요?"
"아뇨. 연애 할 생각 없는데요."
"눼"
그 자리에 있던 수컷들이 돌아가면서 친한 척을 하며 작업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분은 철벽 방어를 하고 있었다.
주량도 대단했던 것 같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다소, 아니 아주 많이 눈길이 갈 만큼 헤비한 바스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기억으로 아마 (나를 포함해) 그 자리 모든 남자의 눈길 대부분이 이 분의 바스트에서 마주쳤을 것이다.
그러다 한 남자가 사고를 쳤다.
여자 기획자한테 작업 멘트들이 씨알도 안 먹히자 술만 들이켜다가 취했는지 아예 노골적으로 눈길을 고정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한동안 불쾌한 시선을 감내하고 있던 여자 기획자는 그 남자를 천천히 노려보다가 말했었다.
"왜요, 젖줄까요?"
이 한 마디는 정말, 십 년도 넘게 지났음에도 똑똑히 기억이 난다.
그리고
시뻘개진 남자를 쏘아보며 여자 기획자가 입을 움직인 순간
나는 첫 회사 입사 첫 날의 기억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장이 기획서를 던지게 만들었던 대단한 입담과 기백을 다시 한 번 느끼며.
엄마 젖 못 먹고 자랐냐, 그런 티 내는 거냐, 그렇게 저질적으로 여자들 대하니까 여친이 없는 거 아니냐
여자 기획자가 던진 말들은 이런 내용들 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쳐다본 걸 부인하려다가, 훅훅 들어오는 비수에 목소리를 높이며 싸워보려고 하다가, 상대방을 달래보려고 사과도 하다가
결국 옷을 집어들고 줄행랑을 쳐 버렸다.
갑분싸 된 분위기에서 술 자리는 그 이후 금방 끝났던 걸로 기억이 나고.
"여자 프로그래머보다 더 무서운 게 여자 기획자야."
그래픽 실장 형이 했던 농담이 진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던 날로도 기억한다. 크크
*어제 술을 먹어서 그런가 힘드네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