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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4/05 20:32:29
Name 具臣
Subject [일반] 심심해서 쓰는 무협 뻘글 14 (수정됨)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ㅡ 모두 물러서라.
교진검을 노려보며 제갈린이 외쳤다.
제갈세가 무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로 빠졌다. 이제 스물도 되지 않는 무사들로 감당할 수 없는 상대. 사파에서 후기지수를 꼽는다면 열손가락 안에 들 인간이었다. 사람됨은 글러먹었어도 검은 글러먹지 않은 고수. 호위대가 오려면 적어도 하루는 더 가야 할텐데....
ㅡ 원하는게 뭔가!
ㅡ 하하하하....듣던 바와는 달리 직설적이시군요.
뭐 어쨌든 말하기는 편해서 좋네요. 수레들에 실은 저건 뭡니까?
ㅡ 그건 네가 알 바 아니다.
ㅡ 내가 검을 뽑은 뒤에도 그리 말할 수 있겠습니까?
ㅡ 긴 말 할 거 없다.
우리가 물러나면, 너 혼자 수레 아홉대를 몰고 갈 수는 있고?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이걸 노리는 다른 고수들이 널 가만 둘 것 같더냐!
말문이 막힌 교진검은 후회했다. 그냥 칼부터 뽑았어야 했는데 괜히 제갈세가와 입씨름을 하게 생긴 것 아닌가. 검이라면 십여초도 못 버틸 늙은이지만 말이라면 강호 십대고수에 너끈히 들 너구리를 상대로.
ㅡ 이거나 받고 물러가라. 괜한 피 볼거 없다.
뭔지도 모르는 수레의 보물을 혼자서 챙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고, 돈이나 뜯으려다 난감해진 차에 교진검은 반가웠다. 그러나 제갈린의 소매에서 나온 것은 작은 철통!
순간 몸을 삼장 뒤로 빼내더니 곧바로 다시 공중으로 도약하는 교진검. 제갈린은 몸을 날려 따라붙으며 손가락을 까딱했다.
펑!
크아아악....
구우모강침. 쇠털만큼 가는 강침이 소 아홉마리의 쇠털만큼 쏟아지는 암기였다. 제갈린은 이 일을 꾸미면서 전 재산을 털어 사천당문에서 독과 암기 세개를 샀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쓴 것이다.

효과 확실하구만...당가 놈들 좀 싸게 팔면 얼마나 좋아.
적이 쓰러지자 바로 돈이 아까워졌다. 그러나 돌아서는 순간, 자신을 영웅처럼 바라보는 무사들의 눈빛이 보였다.
ㅡ 험험. 가자. 갈 길이 급하다.
처음에 제갈린은 호위무사들이 적게 살아남을 수록 좋다고 생각했었다. 아무 일도 없이 멀쩡한 삼십기가 구정과 함께 돌아가는 것과 피투성이가 된 무사 몇이 구정을 극적으로 전달하는 것. 어느 쪽이 다음 수로 넘어가는데 효과적일지는 뻔한 거 아니겠나. 그런데 무사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보니, 자신의 빈약한 무사대 인맥이 떠올랐다. 잘만하면 이 기회에 무사들의 신망을 얻을 수도 있겠군. 암기야 또 사면 되는 거고.
그 때 문득 그럴듯한 꾀가 떠올랐다. 무사들을 불러모아 일렀다.
ㅡ 지금부터 강적이 나타나면 내가 조그만 약병을 던지겠다. 약병 근처에 있으면 픽 쓰러지고, 약병에서 멀리 있으면 입을 막고 황급히 물러나라. 그 뒤 내가 해독단 어쩌구하며 적의 주의를 끌면, 쓰러졌던 사람이 암습을 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ㅡ 예.

다행히 그 꾀를 쓸 일은 없었다. 다음에 마주친 사파 고수 하나와 녹림의 흑산적이라는 흔치않은 조합을 무사 셋의 희생으로 뚫었고, 그날 저녁 길을 가로막은 흑전오살은 마침내 나타난 제갈민의 호위대가 뒤를 잡은 것이다.

ㅡ 제가 왔습니다!
ㅡ 생포하게! 절대 죽여서는 안되네!
어리둥절한 제갈민을 향해, 제갈린은 씩 웃으며 한마디 했다.
ㅡ 제물.
ㅡ 아! 하하하. 제갈세가의 길을 막은 저놈들을 묶어라.
마혈을 짚히고 밧줄로 묶인 흑전오살은 짐짝처럼 수레에 던져졌다.
이틀 뒤 새벽. 개선장군과 같이 제갈세가로 돌아가니, 분위기가 출발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제갈세가의 모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구정을 맞이하는데, 스물에 가까운 세가 식구들의 죽음마저 잊혀졌다. 죽은 무사들의 가족이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의 열기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이 구정을 뒤덮었다. 알고보니 가주가 구정과 연산역의 법술을 드디어 공개한 것. 이제 천하는 제갈세가의 발 밑에 무릎꿇을 것이다!
엊그제까지 구정 얘기만 나오면 앞에서는 삐죽거리고 뒤에서는 투덜거리던 사람들이, 구정 발굴을 위해 자신이 쏟았던 노력을 떠들고 있었다.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의례적인 추모마저 잊혀진 채. 안되는 집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두가 그 꼴이었다.

가주 제갈식은 구정을 맞으며 위엄이 가득한 목소리로 제갈린을 칭찬했다.
ㅡ 한림원주의 공이 크오. 이제 제갈세가의 웅비가 시작될 터! 제갈세가가 천하를 얻으면 원주의 화상이 공신각에 걸릴 것이오.

공식적인 자리였으니 사촌형이 아닌 원주라 부르는 것이 맞긴 하다. 그런데 제갈식은 가주자리 다툼에서 제갈린을 꺾은 뒤, 단 한번도 제갈린을 형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만 만났고, 거기서도 철저하게 가주로서 식솔로만 대했다. 허울 좋은 한림원주 자리나마 준 것도 십년 전, 자신의 후계구도 얘기가 나올 무렵이었다. 지금도 격식을 차린 말투로 제갈린을 치하하는 듯 하면서, 구정이 속하는 것은 자신이 가주인 제갈세가임을 은근히 못박은 것이다. 공신각을 강조한 것 역시, 제갈린이 아무리 대공大功을 세웠어도 가주의 신하인 공신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제갈린은 그런 제갈식의 화법을 훤히 꿰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받았겠지만,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제 네 아들 놈들이 서로를 삶기 위해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넌 그걸 지켜봐야 할 거고, 누가 그 판을 짰는지 모를 거다. 언젠가 알게 되어도 -끝까지 모르면 내가 알려주겠지만- 그 때는 너무 늦었겠지.
ㅡ 모든 것은 제 공이 아닌, 제갈세가 선조들의 보살핌입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7년이나 기다려왔고, 더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더구나 강호의 모든 세력이 구정을 노리고 있습니다. 속히 술법을 거행해서 군림천하의 거보를 내딛어야 합니다.
마침 제가 제갈세가의 앞길을 가로막으려던 흑전오살을 잡아왔습니다. 이들을 제물로 고루신마를 징치懲治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루신마! 지난 삼십년간 제갈세가의 일을 사사건건 방해한 것도 모자라, 작년에는 정아와 지아의 목숨까지 앗은 자입니다. 고루신마를 벌함으로써 정아와 지아의 원혼을 달랠 수 있고, 주변 백리안에는 세가를 노릴 적수가 없어집니다.

제갈린은 얼른 고루신마 얘기부터 꺼냈다. 지금의 열띤 분위기를 그대로 타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것도 중요하거니와, 원로회로 넘어간 다음에는 제갈식이 무슨 딴지를 걸지 몰랐다. 오랜 시간 숙고해서 고른 만큼 고루신마보다 더 나은 대상은 없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까딱 잘못하면 독고진에게 다급하게 연락해서 사냥감을 바꿔야하고, 마교 놈들이 허둥대다가 일을 그르칠 지도 몰랐다.

ㅡ 우와! 고루신마!
세가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며 고루신마를 외쳤다. 참척이라는 겪지 못할 일을 겪고도 죽지못해 사는 제갈정과 제갈지의 어머니들은 오열했고, 어머니들은 보지도 못하게 막았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아들의 주검을 보았던 아버지들은 핏발이 선 눈으로 가주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제갈식은 제갈린이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것이 마땅치 않았지만, 이 분위기를 꺾고 초를 치는 것은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솔직히 누가 봐도 고루신마부터 없애야 하고.
그래, 오늘은 띄워주마. 나를 천자로 만들어줄 공신인데 이 쯤은 대우해줘야지.
ㅡ 좋소. 원주는 어서 술법을 베풀 준비를 하시오!

그날 낮. 리위화離爲火의 괘에 맞춰 태양 아래 구정을 배열하고 정화수를 채운 뒤 측백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폈다. 제갈린은 흰 도복 차림으로 관冠을 벗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장검을 짚고 서있었다. 점혈된 흑전오살들이 들려져 나오자, 손수 장검으로 흑전오살들의 어깨를 차례로 베어 피를 받아 구정에 발랐다. 물이 끓자 제갈린이 장검으로 흑전오살을 하나씩 가리켰고, 장사들은 차례로 흑전오살을 솥에 집어넣었다.
제갈린은 똑바로 서서 장검을 들어올려 리위화괘에 해당하는 방위를 겨눈 채, 중얼중얼 입속으로 주역을 읊었다. 소리내 읽자니 뭔가 말이 안되는 것이 티가 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주문의 내용을 잘 들을 수 없는 게 분위기도 더 좋아보였다. 아무튼 삼국지연의에서 시조 공명이 동남풍 부르던 장면을 본 떠, 고루신마에게 불의 저주를 내렸다.
그리고 제갈세가 근처 곳곳에서 또다시 전서구들이 날아올랐다.

한편 제갈천은 급변한 상황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거의 칠년 동안 자신의 우세로 굳어지던 후계 구도가 한 순간에 뒤집어진 것이다. 제갈세가에 어떤 호박이 굴러들어 왔는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뭐라도 해야 한다. 방법이 없을까...
제갈세가 안에 내 세력이 크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밖에서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어디? 남궁세가와 하북팽가는 창천대와 팽가사룡이 당해서 여유가 없다. 사천당문?.....!!
사천당문이란 이름은 자연스럽게 독을 떠올리게 했고, 그 생각의 끝은 뻔했다. 처음에는 독살을 할까 싶었지만, 그건 누가 봐도 내 짓이다. 차라리 제갈민에게 티 안나게 하독해서 더도말고 한달만 누워있게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나 저나 똑같이 의심받을 일이라는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도 못했다.
어차피 제갈민도 당숙의 공을 가로챈 거 아닌가. 그 때 보니까 당숙은 연산을 찾은 공을 다투지도 않던데. 내가 당숙을 구워삶아서 내편으로 만들면? 좋다. 이거다. 형을 한달만 누워 있게 만들고, 그동안 당숙을 끌어들이면 구정의 법술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형이 일어난 뒤에도 제갈린에게서 가로챘던 공로를 다시 주장하지 못할 터. 구정은 최소한 제갈민이 아닌 모두의 것이 되어 있고, 잘만하면 내 것이 될 수도 있다. 제갈천은 사천당문에 보낼 편지를 써서는 전서구로 보내도록 지시했고, 금원보를 주고 독을 받아올 사자도 급파했다. 전서구를 하나만 보냈다가는 못 받을 수도 있는 법, 사안이 중하니 관례대로 다섯마리를 날리도록 했다.

제갈민과 천 형제는 어려서부터 오만방자했다. 가주의 아들로 제갈세가는 당연히 내 것이라 여겼으며, 그런 사고방식은 안하무인격인 태도로 나타났다. 형제가 열두세살 때 나이 마흔 댓의 같은 제갈씨 친척 어른인 수문장에게 하대했던 일화는 유명했고, 철든 뒤에도 그 행실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이들은 부하들을 절대 자신과 같은 급의 사람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아랫사람도 같은 제갈씨 일족이니 그 대우를 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같은 제갈씨니 그들이 자신에게 더 충성해야 한다고만 여겼다.
그런 대접을 받던 제갈천의 부하 하나 -끝내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은-가, 제갈천이 흔들리자 슬그머니 딴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자는 민에게 붙지도,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민이나 천이나 똑같아서인지, 부하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아는 민이 무슨 위험한 짓을 시킬지 몰라서인지, 부하의 충성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민이 돈을 많이 줄 리 없어서인지, 만약 천이 승리했을 때 민이 자신의 배신을 입 다물어줄리 없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제갈천이 사천당문으로 보내도록 시킨 전서구들 가운데 하나를 새장째 제갈민의 처소 앞에 몰래 두고, 간단한 설명과 함께 독을 가져올 사자가 누군지 궁금하면 지정된 곳에 금원보 열개를 숨겨두라는 서찰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불에 탄 고루신마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무림을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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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23/04/05 20:47
수정 아이콘
역시 꿀잼!
23/04/05 21:10
수정 아이콘
매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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