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5/09/18 12:31:30
Name sylent
Subject [스타리그 관전일기] 종족의 위기
스타리그 관전일기 - SO1 스타리그 16강 재경기 (2005년 9월 18일)


종족의 위기

그동안 개최되었던 그 어떤 스타리그도 '맵 밸런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의 아키텍쳐를 재구성하지 않는 이상, 새로운 맵으로 세 종족의 스타트 라인을 동일하게 설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실제로 수많은 신규 맵의 도입을 통해, 스타리그 마니아들은 완전한 실패 또는 성공을 위장한 실패를 끊임없이 경험해왔고, 그 실패의 중심에는 언제나 '프로토스 vs 저그'가 자리잡고 있었다. 관계자들은 이 지긋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섬 맵과 개방형 맵을 번갈아 투입하며 가능성을 찾으려 안간힘을 써왔다.

그 눈물겨운 노력을 모으고 모아 적당히 가공하고 깔끔하게 포장한 <SO1 스타리그>의 16강은, 안타깝게도, 저그가 프로토스에게, 프로토스는 테란에게 압살 당하는 기이한 결과를 낳았다. 이는, 통칭 '수비형 프로토스'라고 불리는 passive한 운영이 '몽상가' 강민 선수에 의해 전면에 부각되면서, 두 개의 자원으로 시작하는 저그를 하나의 자원으로 상대하는 것 보다, 두 개의 자원으로 시작해 네 개의 자원을 확보한 저그와 겨루는 것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공평하다는 아이러니에 근거한다. <SO1 스타리그>의 모든 공식 맵이 두 번째 멀티를 차지하기는 쉽고, 세 번째 혹은 그 이상의 멀티는 방어하기 힘든 형태를 취하고 있기에 프로토스 플레이어들이 passive한 운영을 하기에 더없이 용이하다. '수비형 프로토스'라는 기본에 하드코어 푸시와 적극적인 다크 템플러 활용을 곁들인 프로토스 플레이어들의 단단한 결의 앞에 미처 준비가 덜 된 저그 플레이어들은 속속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하지만 passive한 운영에 호의적인 맵은 6마린/1탱크/1벌처로 내달리는 '차재욱식 FD'(fake double, face double 혹은 fast double을 의미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에도 최적화 된 형태였다. "앞마당 멀티를 확보한 테란은 트리플 넥서스로 상대하라"는 격언은 전략의 빠른 흐름 앞에서 진부한 참견일 뿐이었고, 프로토스의 판타지를 보여주고 있는 오영종, 박지호 선수가 게이트 가동률을 100%로 이끌어 감행했던 정직한 물량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역상성'의 세례를 받지 못한 저그 플레이어들은 차례로 도태되었고, 이주영 선수와 변은종 선수의 8강 진출 좌절로 인해 '투신' 박성준 선수에게 종족의 운명을 걸어야 하는 위기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B조 <라이드오브발키리즈> : 박정석(P) vs 이주영(Z)/<815> : 이병민(T) vs 박정석(P)/<네오포르테> : 이병민(T) vs 이주영(Z)

<라이드오브발키리즈>에서 박정석 선수가 2게이트 질럿 푸시를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네오포르테>의 먼 거리를 기꺼이 감수하고 이병민 선수가 벙커링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이주영 선수의 플레이 패턴에 대한 확신 덕분이다. 줄곧 과거로의 회귀를 시도하고 있는 이주영 선수의 부유한 스타일은 분명 돌이킬 수 없는 강력한 순간에 대한 열망의 발로이겠지만, 최소한의 간극을 헤집어 적의 목덜미를 물어뜯는데 능숙한 최고의 플레이어들에게는 허술하기만 하다. 그동안의 이주영 선수는 시대를 뒤흔드는 저그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자신의 고정된 이미지를 줄곧 복제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생명력으로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정상을 향해 한 계단을 더 내딛고 싶다면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되 변화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하기 보다는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함은 물론이다.

"지상맵이면서도 공중전의 경기양상을 볼 수 있는 특이한 컨셉"을 표방한 <815>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때로는 섬 맵으로, 때로는 지상 맵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다각적인 시야이다. 무당스톰을 난무하며 이병민 선수의 기갑부대를 잡아냈을 때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프로토스 팬들은 <2002 SKY 온게임넷 스타리그>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재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지만, 박정석 선수가 맵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하지 않고 '선 멀티 후 견제'의 운영을 택한 순간 이미 승부의 추는 기울어 있었다.

최초의 2드랍십-8골리앗 드랍부터 박정석 선수의 본진을 초토화시킨 3드랍십-12골리앗 드랍까지, <815>를 섬 맵으로 바라본 이병민 선수는 여느 때처럼 직관적인 선택으로 경기를 풀어 나갔다. 두 차례의 대규모 교전에서 아무도 흉내낼 수 없을 것 같은 천지 스톰으로 골리앗과 배틀 크루저를 잡아낸 박정석 선수는 이병민 선수의 팩토리를 장악할 수 있는 타이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차례 호흡을 고름으로서 탱크 수급의 여지를 남겨 주었고, 결국 자원의 한계로 인해 새로운 동료에게 승리를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노련한 조종사는 폭풍우 속에서 명성을 얻는다. 박정석 선수가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극적인 컨트롤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키는 드라마에 있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가 미세하지만 분명히 어긋난 자신의 선택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은 안심하고 지켜볼 수 있는 프로토스 플레이어를 꿈꾸는 시청자들의 가슴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C조 <네오포르테> : 서지훈(T) vs 박지호(P)/<알포인트> : 박지호(P) vs 변은종(Z)/<815> : 변은종(Z) vs 서지훈(T)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미친 사람만이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테란과 저그가 양분하고 있는 이 지긋한 스타리그를 통째로 전복시키려는 프로토스 플레이어가 있다. 베스트셀러 인줄은 알았지만 스테디셀러인 줄은 몰랐던,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으로 프로토스의 판타지를 펼쳐가고 있는 오영종 선수와 박지호 선수가 그 주인공이다. 들에 핀 야생화처럼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철학으로 프로토스 신약의 첫 장을 장식하고 있는 두 선수는 강민 선수와 박정석 선수처럼, 파트너이자 라이벌로서 프로토스의 미래의 짊어지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서지훈 선수와 마주한 박지호 선수는, '괴물' 최연성을 상대로 셀 수 없이 많은 유닛을 찍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같은 자원'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공장장' 오영종 선수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가스 채취를 방해한 후 테란의 앞마당 멀티를 가능한 지연하고 싶었다. 다크 템플러와 리버 드랍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서지훈 선수를 향해 던진 비장의 카드는 1질럿-4드래군 푸시. 그러나 "언제나 침착하며, 도발적이지 않고, 단단하다"는 서지훈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은 '진실'이었다.  단 5기의 마린을 보유한 서지훈 선수는 박지호 선수의 급습에 당황하는 듯 보였지만, 절묘한 SCV 컨트롤과 차분한 탱크 관리로 박지호 선수의 병력을 몰아내고 끝내 앞마당에 커맨드 센터를 안착시켰다.  메카닉 병력이 센터를 향하자, 박지호 선수의 질럿과 드래군은 언제나처럼 신호를 위반하고 달려들었지만 서지훈 선수의 훌륭한 시즈 포메이션 앞에서 모두 산화하고 말았다.

이어 펼쳐진 2경기에서, 박지호 선수는 뚝심으로 똘똘 뭉친 변은종 선수를 하드코어 질럿 푸시에 이은 다크 템플러 난입으로 가볍게 잡아냈다. 오영종, 박지호 두 선수에 의해 다크 템플러는 '자객'에서 불멸의 '전사'로 거듭나게 되었다. 진보는 항상 모험을 수반한다. 박지호 선수의 플레이는 언제나 아슬하기만 하지만, 모방으로 성공하는 것보다 독창적으로 실패하는 것이 더 낫기에 그의 다양한 시도는 칭찬 받아 마땅하다. 예술가는 선배들의 위대한 작품을 음식과 영양분처럼 매일매일 섭취해야 한다. 그에게 선배 프로토스 플레이어들의 예민함을 받아들일 자신이 있다면, 이 가을의 주인공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by sylent, e-sports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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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비
05/09/18 12:54
수정 아이콘
우워어..ㅠ_ㅠ 항상 기다려왔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05/09/18 13:39
수정 아이콘
기억해 주는 분이 있다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군요. 슬픈비님, 잘 지내시죠? :^)
돌돌이랑
05/09/18 13:44
수정 아이콘
음 정말 재밌있다. 긴글과 특정선수 특정팀을 느끼하게 응원하는 글은 대체적으로 그냥 패스인데...이분글은 정말 좋다.
추석날 정말 좋은글 보고 갑니다. 종종 써주세요~~
이뿌니사과
05/09/18 14:0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타 두개 ^^; A조 1경기 제일 마지막줄의 "변은종선수" 구요,
그 몇줄 아래 "과거로의 회기를 시도하고 있는 이주영 선수의 " 여기서는 "회기"->"회귀" 가 맞습니다.
즐거운 추석되세요~
05/09/18 14:09
수정 아이콘
이뿌니사과님 / 수정 완료 했습니다. 비몽사몽간에 썼더니; 즐거운 추석 되세요~
never end
05/09/18 14:17
수정 아이콘
성묘갔다가 돌아왔더니 반가운 분의 후기가 올라와 있습니다...
여전히 멋진 문장력과 분석력이십니다...
마침 추석때 휴가를 나오셨나 봅니다...
건강하게 지내시겠지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베스트셀러인 줄 알아지만 스테디셀러인 줄은 몰랐던... 이 문장 혹시 인용하신 건지요... 언제가 영화잡지에서 장동건에 대해서 표현한 글과 거의 일치하는 듯 싶어서...
설경구에 대해서는 반대로 표현했었지요... 스테디셀러인 줄은 알았지만 베스트셀러인 줄은 몰랐던...
무지개고고
05/09/18 14:20
수정 아이콘
정말 분석글을 써도 이렇게 잘쓸수가 없겠네요 . 단어나 문장도 적절하고 - // 읽으면서 감탄사가 연발입니다 . 어쨌던 8강이 상당히 기대되네요 ^ ^
제리드
05/09/18 15:36
수정 아이콘
잘 보았습니다~.
새벽의사수
05/09/18 15:50
수정 아이콘
글 정말 잘 쓰십니다. 좋은 글 잘 읽었네요. ^^
푸하핫
05/09/18 16:21
수정 아이콘
sylent님 또 오셨군요^^ 글 잘 보고 갑니다.
맨 위에서 두번째 줄에 스타리크->스타리그로 오타 수정요~
05/09/18 16:26
수정 아이콘
never end님 / 어디선가 봤으니까 제 머리속에 있었겠죠. ^^; (참고로 영화 잡지는 안봐요~)
푸하핫님 / 민망해라. 오타 투성이군요. -_- 감사!
머신테란 윤얄
05/09/18 17:49
수정 아이콘
드디어~~~!! 오랜만에 글이군요~~ sylent 수고!!
클레오빡돌아
05/09/18 17:55
수정 아이콘
재밌는데요? ^^;;
05/09/18 18:14
수정 아이콘
확실히 글재주가 있으시네요...좋은 글이네요...여하튼 요즘 수비형플토가 대세인듯...전 수비형플토 안좋아해요...제가 워낙 많이 당했거든요....미워요..ㅠ.ㅠ
Crazy Viper
05/09/18 18:20
수정 아이콘
sylent님!!
건강히 군생활 잘 하고 계시죠.
이젠 계급...얼마나 올라가신거죠?..^^
아무쪼록 남은 군생활도 몸 건강히 잘 하세요!!
마녀메딕
05/09/18 18:27
수정 아이콘
전 첨뵙는데 유명하신 분이시가 보네요. 정말 잘쓰시네요. 좋은글 읽고 갑니다. 이런글 읽는 재미가 피지알의 매력입니다.
마음속의빛
05/09/18 22:46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과연~ 이라는 생각이 드는 문장이군요. ^^
스필버거
05/09/19 01:01
수정 아이콘
슬픈비민 혹시 랜드오브데드 보셨나요?^^ 우워어의 압박....
자리양보
05/09/19 11:17
수정 아이콘
이스포츠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있나요^^ 사일런트님, 오랫만에 멋진 후기 잘 읽었습니다. 명절에 맞춰서 휴가 나오신건가 봐요.
05/09/19 13:39
수정 아이콘
sylent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은
정말로 '어떻게' 글을 써야하는지를 아시는 분이라는 점...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카이레스
05/09/19 14:52
수정 아이콘
"그런 드라마가 미세하지만 분명히 어긋난 자신의 선택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은 안심하고 지켜볼 수 있는 프로토스 플레이어를 꿈꾸는 시청자들의 가슴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박정석 선수의 열성팬이지만 이 구절에 동감할 수 밖에 없네요...멋진 분석입니다^^
05/09/19 15:11
수정 아이콘
완죤 쌩큐합니다~~ 얼렁 제대하셔서 김모 작가처럼 일주일 6편씩 -_-;;;; 칼럼써주세요~
놀라운 본능
05/09/20 00:48
수정 아이콘
글을 어쩜 이리 잘쓸수가..
부럽..
솔라리~
05/09/20 10:10
수정 아이콘
글 정말 잘쓰시네요
그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Peppermint
05/09/20 18:45
수정 아이콘
민팬님// 김모 작가처럼 1주일에 6편씩!! 보통 근성으로는 힘들겠는데요..^^
"모방으로 성공하는 것보다 독창적으로 실패하는 것이 더 낫기에 그의 다양한 시도는 칭찬 받아 마땅하다." 주옥같은 구절입니다!!
언제나처럼 곱씹는 맛이 있는 글 감사합니다. 빨랑 제대하셔서 본격적인 저널리스트로 거듭나시길..
05/09/21 00:00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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