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2/09/14 12:37:15
Name Apatheia
Subject [허접꽁트] 귀환 -中
워프 검이 날카로운 것은, 어둠의 템플러에게 죽어가는 생명에 대한 마지막 자비라고 했다. 일격필살용으로 제작되었다는 내 워프 검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정확히 세 번만에 저글링 세 마리의 명을 끊었다. 칼날을 적시며 방울져 떨어지는 피를 닦아내고 다시 검을 제자리로 돌리려는데, 저 쪽에서 이편으로 무언가가 휙하고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


인간이 겁에 질린 눈으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그 눈에 내가 보일 리는 없으니, 그는 연신 두려움에 두리번거리며 무어라 알아듣지 못할 말로 고함을 치며 사방으로 총을 난사해 대고 있었다. 오래 전, 젤 나가로 하여금 우리 일족을 선택하게 했던 그 정신능력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뭐...뭐냐! 웬 놈이야?!"


"......"


"빌어먹을... 다 죽여 버리겠다! 어서 나와! 나오란 말이야!!!"


"......"


가엾은 인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저런 허술한 무기 한 자루만 가진 채 그 탐욕스러운 저글링들을 상대하게 되었던 것일까.


"젠장, 나서란 말이야!"


그는 발악하듯 고함을 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그 사실이 그에게 더욱 극심한 공포를 안겨주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불행하게도, 나설 수가 없다 인간이여. 나는 남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방법 자체를 배우지 못했다."


그가 알아들을 만한 언어로 말해 주었다. 순간 그의 얼굴에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놀라움의 감정이 스쳤다. 잠깐의 정적. 그는 내가 흠짓 놀랄 정도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내 쪽으로 가우스건을 난사해 댔다. 물론, 워낙에 조준이 엉망이었던 탓에 피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소용없다... 어차피 맞추지 못할 테니. 그럴 탄환이 있거든 조금이라도 아껴두는 게 어떨까. 어디서 아까 그런 놈들을 다시 맞닥뜨리게 될지 모르는데 말이다.
그리고..."


"......"


헉. 헉.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내 쪽을-정확히는 내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을- 바라보았다.


"난 자객이긴 하지만, 피에 미친 마귀는 아니다. 나나 내 동족에게 해를 끼칠 능력도 없는 자를 함부로 살상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템플러다."


"......"


꿀꺽. 그는 침을 삼켰다. 한동안의 정적 후, 그는 천천히 내게로 향했던 총구를 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에 얼은 듯 멈추어 선 채,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대답이나 하나 해 준다면 고맙겠군. 여기는 도대체 어디쯤이지?"





이 곳은 2시, 언덕이 아닌 플레인(plain) 지역이라고 했다. 본래 목적했던 바가 12시 언덕 지역이었으니 목적지까지 거의 다 와서 내 일행들은 몰살을 당한 셈이다. 새삼스레 착잡해져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당신은..."


이제 많이 진정이 된 듯, 아까보다는 꽤 차분해진 목소리로 인간이 물어왔다.


"여기서 혼자 뭘 하고 있는 거지?"


"......"


대답을 해야 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중대한 군사기밀에 대한 누설이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순간 나는 잠시 회의적으로 변하고 말았다. 과연 살아서 본진으로 돌아갈 수나 있을지가 의문스러웠던 그 때에.


"일행이 몰살당했다."


"......"


"무탈리스크 한 떼가 몰려오더군. 나만 살아남았다."


"아까 드랍쉽 안에서..."


인간은 고개를 돌려 저편 멀리를 바라보았다.


"무탈리스크 몇 놈이 이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을 얼핏 보았다. 그놈들에게... 당했나 보군."


"아마도."


"....미안하게 됐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물었군."


"......"


순간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가슴 아픈 이야기...였군, 그게.


"그러는 너는..."


말도 돌릴 겸, 나는 물었다. 궁금하기도 했고.


"왜 여기 있는 거지? 그것도 혼자서."


"......"


"나는 테란에 대해 잘 모르지만, 너같은 인간들은 결코 혼자서는 다니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이 현명하기도 하고."


"......"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하기 힘든 사연은 내게만 있는 것은 아닌 듯 했다.


"12시 저그 본진으로... 급습을 갔었다."


"......"


"본진에 투하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무탈리스크들에게 드랍쉽이 요격돼 버렸다. 졸지에 돌아갈 방법이 없어져 버렸지. 모두는 이성을 잃었다. 이왕 죽을 거, 한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겠다는 각오로 덤볐지."


"......"


그렇다고 들었다. 테란이란, 인간이란 연약한 만큼 무모하고 끈질기다고. 때로 그들은 잘 훈련받은 템플러보다도 더 장렬하게 동료를 위해 죽음 속으로 달려든다고 했다.


"이것..."


그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비닐 팩 안에 봉합된 주사기 하나를 꺼내 보였다.


"스팀팩이라는 것이다. 일종의 마약이지. 제정신으로 싸워서 도저히 살아 돌아갈 가망이 없을 때, 우리는 이 약을 투여한다. 아까 그때도 그랬고."


"......"


그의 입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함께 간 인원은 마린이 여섯, 메딕이 둘이었다. 아, 당신은 마린이 뭔지 메딕이 뭔지 모르겠군. 마린은 나같은 병사를 말한다. 메딕은... 의무병이다."


"의무병?"


그러고 보니 그는, 우리로 따지면 질럿과 같은 하급병사인 모양이다. 하긴 드랍과 같은 급습에 주로 내몰리는 것은 직위가 낮은 일반병사들인 경우가 아무래도 많겠지.


"메딕은 우리를 치료하는 것이 임무인 여자들이다. 그리고..."


인간은 입을 다물었다. 가우스 라이플을 움켜쥔 그의 손이 가늘에 떨리고 있었다.


"그 메딕 둘 중 하나는... 내 애인이었다."


"......"


나는 나도 모르게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정말로 순식간에, 모두 전멸했다. 그리고 나만은..."


"......"


"그녀가... 자신이 성큰의 촉수를 맞아 가며 나를 입구 쪽으로 밀어내 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그 본진 안에 그녀를 혼자 두고 와 버린 거다."


"......
어떻게 할 생각인가."


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인간이란 본래 무모한 종족이라고 들었다. 설마?


"12시로 돌아갈 생각이다... 애초에 그렬 생각으로 귀대하지 않은 거니까."


철컥. 그는 라이플의 탄창을 점검하고 총알을 장전했다.


"가서 그녀를 구해내야 한다. 이대로 나 혼자 돌아갈 수는 없다."


"이것 봐."


"이봐 당신... 아까 얼핏 들으니 당신도 다쳤다고 했지?"


그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웃었다.


"그녀는 의사다. 아주 솜씨가 좋아... 당신 덕분에 내가 목숨을 건졌다고 말하면, 당신도 아주 잘 치료해 줄 거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내가 해야만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이 무모한 인간을 말려야 한다는 것.


"무리다."


"뭐?"


"무리라고 했다, 인간이여. 저그의 본진 안에 너 혼자 잠입한다는 것도 무리이거니와, 다시 살아돌아온다는 것은 더욱 무리다. 게다가."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내뱉듯이 말했다.


"너의 여자 또한... 아직 살아있으리라 보기 어렵다."


"닥쳐."


"드랍을 갔었다니 알 게 아닌가. 저그의 본진 안에 어떤 흉악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말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너처럼 연약한 인간이, 하물며 여자가 아직까지 살아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


"냉정해져라, 인간. 이건 전쟁이다. 혼자 돌아갈 수 없다느니 하는 그따위 감상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마음을 추스르고 빨리 귀대해서 상황을 보고해라. 그것이 너의 종족을 위하는 길이다."


"......"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까 저글링에 혼자 맞서싸울 때보다도 더욱 비장한 표정이 어렸다.


"듣던 대로군."


"......"


"프로토스엔 다크템플러라는 자객이 있는데, 정말로 피도 눈물도 없어서 자기 앞을 가로막는 건 무조건 죽인다고 하더니 정말이었군."


"......"


"잘 들어, 잘난 친구. 난 종족 따위는 관심 없어. 어차피 나 아니라도 나가 싸울 마린은 많아. 저기 윗대가리 앉은 놈들은 어차피 나같은 쫄따구 하나 따윈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써."


그는 떨리는 손으로 옆에 내려놓았던 라이플을 주워들었다.


"그래, 빌어먹을. 가면 뒈질 거 알아. 본진 구경도 해보기 전에 그 지독한 성큰에 맞아 죽을 거 알고 있어! 하지만 난 내 여자를 죽게 내버려두고 혼자 살 수는 없다. 알아들어? 이러고 뻔뻔하게 돌아가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단 말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배어 있었다.







-Apatheia, the Stable Spirit.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게맛의탐구
02/09/14 12:42
수정 아이콘
옷;;재밌습니다^_^;;
나라당
02/09/14 12:43
수정 아이콘
ㅠ.ㅠ 오랜만에 보는 아파테이아님의 꽁트~
서로 다른 입장에 놓인 마린과 다크템플러의 대화가 왠지
비장함이 서려있는.....메딕을 구해주세요~~
응삼이
02/09/14 12:58
수정 아이콘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금방 올려주셨네요.^^
게임방송사에서 아파님 글의 판권을 사서 드라마식으로 만들어도 좋을것 같습니다.

p.s 토마스에게 워프검을 쥐어주면 다크템플러가 될까?
캐리건을사랑
02/09/14 13:07
수정 아이콘
토,,,토마스....그러면 토마스가 보이는 개그콘서트 관객들은 모두 옵져버?? ㅡㅡ;;
필요없어™
02/09/14 13:48
수정 아이콘
샘이 옵져버라고 생각되는데용 ㅡㅡ;;
02/09/14 14:10
수정 아이콘
아파님, 이렇게 재미있는 글 써주셔서 감사해요..^^ 빨리 하편이 보고 싶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30 프로게이머여, 연애를 하자! [17] 아휘13958 02/09/18 13958
129 [연재] 판타스틱 파이널 판타지(무림편) 2편(온게임넷 듀얼 1주차) [20] 공룡8135 02/09/18 8135
128 [연재] 판타스틱 파이널 판타지(무림편) 1편 [8] 공룡6799 02/09/18 6799
126 [연재] 판타스틱 파이널 판타지(무림편) - 설정집 - [9] 공룡7322 02/09/18 7322
124 [연재] 판타스틱 파이널 판타지(무림편) 프롤로그 [6] 공룡6910 02/09/17 6910
123 [허접꽁트] 귀환 -下 [33] Apatheia6632 02/09/14 6632
122 [허접꽁트] 귀환 -中 [6] Apatheia5797 02/09/14 5797
121 [허접꽁트] 귀환 -上 [7] Apatheia8070 02/09/14 8070
120 "프로게이머 vs 바둑기사 제1편" - updated version. [9] 정현준15722 02/09/01 15722
119 (잡설) 한 여름낮의 꿈 [12] 마치강물처럼7102 02/08/28 7102
118 [잡담] 게임속의 영웅중심 세계관에 대해. [8] 목마른땅6267 02/08/28 6267
117 [잡담] 저그, 그리고 잭 니콜슨. [31] Apatheia8158 02/08/24 8158
116 <허접꽁트> 락바텀 (5) [28] 공룡7966 02/08/24 7966
115 <허접꽁트> 락바텀 (4) [15] 공룡6269 02/08/24 6269
114 <허접꽁트> 락바텀 (3) [11] 공룡5900 02/08/23 5900
113 <허접꽁트> 락바텀 (2) [4] 공룡6278 02/08/23 6278
112 <허접꽁트> 락바텀 (1) [12] 공룡10403 02/08/23 10403
111 저는요 이런 모습을 볼때 기분이 참 좋습니다^^ [14] minority6967 02/08/21 6967
110 가림토를 성원해 주시는 분들께... [36] p.p12226 02/08/10 12226
109 [허접꽁트] 단축키 L -the other half. [24] Apatheia16738 02/04/01 16738
108 [잡담]게임계 vs 바둑계 [22] Dabeeforever9657 02/07/16 9657
107 [일인칭 자전적 실명 소설] 페노미논(phenomenon) [27] hoony-song8585 02/05/07 8585
106 끝말잇기 필승의 비법 -_-+ [27] 한마디21229 02/04/12 21229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