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1/09/29 01:08:44
Name 순욱
Subject 아버지와 페이스북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클릭 몇번 으로 친구의 친구를 알게되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고등학교 20년 선배의 인생을 알게되고, 몇천키로는 족히 떨어져 있을 클리브랜드의 어느 야구팬의 생활을 알게됐다. 인간은 인간을 알려주는 수많은 방법을 만들고 나는 점점 더 쉽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회선을 통해 알아간다.


페이스북 너머에서 나와 같아 커쇼의 사이영을 응원하는 어느 외국인을 아는정도 만큼정도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다. 페이지너머로 살펴본 몇장의 사진과 그가 채워놓은 페이스북의 프로필 만큼,  딱 그정도만큼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다.


아버지의 인생을 궁금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냥 궁금하지 않았다. 내 갈길 바쁜 인생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버지의 인생을 잘 모르지만, 내가 '관찰'한 아버지의 인생을 조금 이야기해보려 한다.


아버지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이 어려운 가정속에서 자랐다. 2남 1녀의 장남으로써 시골에서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뛰어놀며 자라셨을 것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인천의 어느 공업고등학교로 진학을 한다. 공부를 잘하셨던 것 같지는 않은데, 정말로 어떤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내가 유일하게 본 아버지의 청년시절 사진도 아마 그때쯤 그의 모습일 것이다. 어떤 자격증 속 흙백사진에 고등학생이거나 갓 청년이 된 까까머리의 아버지가 있었다. 어머니의 친척들이 이야기하던 것 처럼 인물좋던 '송서방'의 모습을 그 사진에서 봤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한후 아버지가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른다. 인천에서 대구로 내려와 이런저런 공장에서 일을 하셨던것 같다.


어머니를 만난 것도 아마 '선'을 통해서 였으리라 생각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연애, 결혼 이야기는 지금까지 그랬듯이 정말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이야기다.  


어머니를 만나고 내가 태어나고, 동생이 태어났을 무렵이 내 기억의 첫머리다. 동생을 보러가자며 두툼한 손으로 나를 이끄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나의 첫번째 기억이다.


어린시절,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아들을 위해서 이것저것 약속도 많이하셨고(비록 많이 지키시지 못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가족들과 있을때 조용히 계시거나 웃고 계시던 분이셨다. 깐깐하게 나를 자주 혼내시던 어머니와 비교를 하자면 나에겐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직장생활이 어땠는지도 역시 짐작만 할 뿐이다. 아마 그의 평소 성격처럼 성실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많진 않지만 적지않은 월급을 매달 가져다 주셨고, 어머니는 동네에서 오랫동안 할머니와 장사를 하고 계셨기 때문에 집안의 벌이는 나쁘지는 않았다.


IMF라는 단어를 듣게 된것은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때였고, 아버지는 TV를 보며 연신 한숨을 쉬셨다. 나에게도 그 IMF라는 것을 설명해 주셨지만 아마 그 분도 TV를 통해서 들은 것이었을 전달하는 정도셨을 것이다.


아버지가 직장을 잃은 것은 그로부터 6개월쯤 뒤였다. 월급을 몇달째 가져오지 못했고, 급기야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하던 사장이라는 사람은 부도를 내고 밀린 임금의 얼마정도를 손에 쥐여주며 아버지를 해고했다.


아버지는 그 후로 몇년동안 일을 하지 못했다. 가끔씩 어디서 돈을 가져오셨던것 같긴한데 일정한 수입은 없었던 것 같다. 직장을 찾기를 포기했는지 아니면 좋은 아이디어가 있었는지, 아버지는 사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업은 더 큰 실패를 했다.


사춘기 시절의 아버지는 힘없는 가장이었다. 빚뿐만 아니라 가족의 다른 문제도 아버지를 괴롭혔다. 그 시절 아버지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머리가 어느정도 큰 아들은 아버지와는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쓴소리 하나 못하시고 사람좋은 웃음만 지으셨다.


아버지는 얼마 후 다시 직장을 찾으셨고 열심히 일을 하셨다. 아들이 친구들과 어딜 쏘다니거나, 컴퓨터 화면만 연신쳐다보며 아버지를 본체만체 할때도 아버지는 일을 하셨다. 어머니도 벌이가 좋지 않다며 가게를 그만두고 힘든 일에 뛰어드셨다. 아버지와 어머니 인생의 전성기에 장만하셨을 집도 처분하고 작은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아버지는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동안 그는 더 늙었고, 더 약해졌으며, 더 많은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늦은 밤 퇴근을 하고 혼자 기울이는 2병에 3천원하는 가시오가피주와 차가운 방에서 혼자 컴퓨터를 바라보며 두는 바둑과 기아타이거즈의 경기를 보는것이 그의 몇 안되는 위로였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관찰한' 아버지의 인생이다.


그의 인생은 "살기바쁜 인생"이었다. 가족과 자본이 아마 그의 등을 떠밀었을 것이다. 한발더 앞으로, 두발더 앞으로, 계속해서 앞으로.. 이렇게 말이다. 아들에게 자기 인생을 스스로 이야기 해줄 수 없을만큼 그는 떠밀려온 "살기 바쁜인생"이었다.


비로서야 나는 아버지의 고통과 인생을 얼마나 약간이나마 이해하게됐다. 힘없고 무능하고 마냥 사람좋던 가장을 내가 다시 이해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잘 모르겠다. 그 시간동안 내가 얼마나 많이 살기바쁜 아버지의 인생을 더 세게 밀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가 소리없이 몇번이나 끄억끄억하고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나는 아버지의 인생을 모른다.


아버지에게도 페이스북이 있다면 화면너머로 아버지의 인생을 배울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사진들과 글을 같이보면 더 생생하게 그의 인생을 배울 수 있을 것같다.  아마, 그리 오래걸리지도 않을 것 같다. 요즘 대세인 페이스북이라면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아버지의 인생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페이스북이 아무리 좋아도 아버지는 컴퓨터를 잘 다루시지 못하니 아버지의 인생을 남기는데 페이스북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나'는 '페이스북'보다 더 좋은 선택인것 같다. 굳이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아도 쉽게 기록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인생이 기록 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면 그게 나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아버지의 페이스북이 되기에는 내용이 부족하지만, 언젠가 아버지가 등떠밀려 온 인생에서 벗어나실때쯤 그때 채워넣어 주셔도 될 것같다. 어쩌면 아버지는 이미 예전부터 조금씩 나 몰래 기록하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그의 굴곡많고 치열한 삶을 통해서 말이다.


아버지에게 언젠가 꼭 한번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다. 내가 그의 페이스북이 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내용이다. 수줍은 많은 그는 아마 씨익하고 웃어넘길거 같으니 어머니에게도 물어봐야겠다.


"아빠, 엄마랑 첫키스는 어디서 어떻게 하셨어요?"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9-29 21:54)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Nothing on you
11/09/29 01:16
수정 아이콘
이번에 귀국하면 아버지랑 오랜만에 여행이라도 떠나야 겠네요. 대화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이런 부족함 없는 수필류의 글을 좋아합니다. 추천!
11/09/29 01:1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네요. 가족에게 잘해야지 하면서 매번 못난 모습만 보이는 자신이 영 마음에 안드는데, 오늘부터라도 더 나아져야겠어요.
11/09/29 01:16
수정 아이콘
저도 마침 오늘 아버지 페이스북 갔다가 짠해졌는데...
추천하고 갑니다.
Je ne sais quoi
11/09/29 01:2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럴 때마다 얼마나 불효하고 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네요.
카싱가지
11/09/29 01:28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번에 집에가면 꼭 물어봐야겠어요. 첫키스는 어디서 하셨냐고요^^
뼈기혁
11/09/29 03:56
수정 아이콘
근래 읽은 수필류의 글 중에 최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11/09/29 08:0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내가 죽은 후 내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울 수도 있는 일인데, 자기 자식에게 기억되는 것만으로도 그 공포의 99% 는 해결될 것 같습니다. 부모님과 이야기 자주 해야겠습니다.
11/09/29 08:51
수정 아이콘
좋은글에 뻘플입니다만... 익산은 전라북도입니다-_-
좋은글 감사합니다.
Alexandre
11/09/29 13:1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어요. 가슴이 먹먹하네요. [m]
허느님맙소사
11/09/29 16:09
수정 아이콘
추천하려고 로그인했습니다. 글 잘 읽었어요.
youngwon
11/09/29 17:40
수정 아이콘
조용히 추천 버튼 꾸욱..
잘 읽었습니다.
유명한그분
11/10/02 17:45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 너무 좋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469 (09)Never give up - 이영호 vs 이성은 네오메두사 관전평 - [28] fd테란6806 09/07/04 6806
1468 (09)최규석님의 만화, 100℃를 보고. [12] 유유히6018 09/06/30 6018
1467 흔한_슬픈_셀카.PNG + 1 [78] 마네13283 11/10/06 13283
1466 공중 공격 탱크 VS 일반형 공격 드라군? [179] VKRKO 9552 11/10/04 9552
1465 잡스를 추모하며... 그가 남긴 말들. [20] 젠쿱8304 11/10/06 8304
1464 와패니즈, 서양 속의 일본 [추가] [101] 눈시BB10900 11/10/05 10900
1463 [롤 개론학] 초보자들을 위한 리그오브레전드 공략 [28] 모찬7448 11/10/02 7448
1462 게시판이란 무엇일까? [12] 김연우4303 11/10/05 4303
1461 (09)[16강개막기념] 택뱅리쌍 그리고 스타리그 (예고 추가) [51] Alan_Baxter7656 09/06/23 7656
1460 (09)동영상 하나 만들어봤습니다. 제목은 '폭풍가도' [34] 유유히8189 09/06/22 8189
1459 (09)See you at our Star-League [18] Hanniabal6161 09/06/22 6161
1458 [연재] 영어 초보자를 위한 글 9탄_to부정사 동명사 편(부제_긴 명사 1) [23] 졸린쿠키4297 11/10/03 4297
1457 그 때 그 날 - 임오화변 [27] 눈시BB4190 11/10/01 4190
1456 (09)폭풍 속의 알바트로스 [29] 10521 09/06/20 10521
1455 (09)당신의 법치는 정의로운가요? [20] happyend4293 09/06/19 4293
1454 (09)당신의 꿈을 응원합니다 [18] happyend5404 09/06/10 5404
1453 청춘이 지난 삶에 대하여. [2] nickyo4789 11/09/29 4789
1452 아버지와 페이스북 [13] 순욱6628 11/09/29 6628
1451 (09)신상문, 죽기로 결심하다. [23] fd테란9707 09/06/11 9707
1450 (09)MSL 개편 반대 선언문 [84] Judas Pain13911 09/06/09 13911
1449 (09)누군가의 빠가 될때 [24] becker7083 09/06/08 7083
1448 그 때 그 날 - 과거 (4) 아버지 아버지 [15] 눈시BB3436 11/09/26 3436
1447 SC2 오프라인 주요대회 일정 (~WCG 2011) [13] 좋아가는거야4631 11/09/22 463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