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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1/11/20 22:30:24
Name
눈시BBver.2
Subject
사군 육진 - (완) 조선의 국경
https://pgr21.net./recommend/1593
삭게로!
1. 버스 안에서 문득 생각했던 건데... 사실 이건 어디까지나 4군 6진 개척 과정에서 사민정책이 어땠는지를 다루려고 했던 거였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0;
2.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8권이 나옵니다. 어머 이건 질러야 돼 >_<
3. 이대호요? 뭐......... 그냥 응원할 겁니다.
4. 이전에 어떤 분과 쪽지를 나누면서 "청은 그럼 한반도보다 중국을 치는 게 더 만만했던 것인가"하는 질문을 듣고 저도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침 윤관의 9성 얘기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건데 말이죠.
9성을 돌려준 후 여진이 금을 세우기까지 불과 5년 걸렸습니다. 그 직후 요를 쳐서 송과 연합해 멸망에까지 이르게 되죠. 스타크래프트도 아니고 5년 동안 병력 열심히 뽑은 건 아닐 겁니다. 윤관이 물리친 그 여진족이 바로 요를 멸망시키고 송을 압박한 그 여진족이었던 거죠. -_-;
한창 금에 밀리던 요는 압록강 하류에서 점령하고 있던 성 두 개를 고려에게 줍니다. 어차피 자기가 지킬 가능성이 없으니 고려와 금나라 사이에 전쟁을 하게 하려던 건데... 당연히 금은 고려에게 이를 내놓으라고 하죠. 하지만 고려가 내놓을 리가 없었죠. 한동안 계속 엄포만 늘어놓던 금은 결국 그 곳을 포기하고 요를 공격, 멸망시킵니다.
이 성, 보주라는 지역을 지키던 장수가... 척준경이었거든요. -_-;
점령하는 데 있어서 한반도 < 중국이었을지는 모르겠는데, 한반도의 성 두 개 < 요나라였던 건 확실해 보입니다. ( ..)
----------------------------------------------------------
최전방인 경원성을 쌓고 지킨 건 두만강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곳에 이씨의 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종 때는 이 능을 옮기고 결국 포기하죠. 후방 경성으로 물러나서 태종 말쯤에는 다시 탈환하려 했는데...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죠. 그 후에도 대마도 정벌을 한 것을 보아 태조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이나 함경도 지방을 실질 지배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고려 때보다야 낫겠지만 여진족은 그만큼 강하고 짜증나는 놈들이었으니까요.
북옥저가 있던 땅, (그 때문에 낙랑군이 이 지역에 있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호동왕자가 옥저를 갔다가 낙랑군에 들렀다고 하거든요.)고구려가 이 지역을 먹고 만주까지 열심히 영토를 넓혔지만 이들 여진의 전신 말갈족은 실질 지배보다는 간접 지배를 택한 것 같습니다. 대신에 외국과 싸울 때는 말갈족도 열심히 고구려를 돕죠. 발해가 고구려와는 달리 연해주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말갈족 때문이었을 거라 보구요. 고려 때 말갈족이 함흥에서까지 놀고, 삼국시대 때 말갈족이 심심하면 신라, 백제를 치는 걸 보면 애초에 말갈-여진이 이 지역에 살았던 거라고 봐야 되겠죠.
+) 이런 점 때문인지 조선에서는 고구려를 생각보다 작게 보고 있습니다. 평안도와 요동, 이 정도가 고구려의 힘이라고 보고 있더군요.
이런 자들을 내쫓고 직접 지배하겠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죠. 이런 면에서 세종의 4군 6진은 만만히 보면 안 되는 거구요. 태종은 여기까지는 생각 못 한 거 같습니다. 그리고 대마도 정벌을 죽기 전에 해야 될 정도로 무에서는 약하다 생각했던 아들이 설마 그것까지 할 지도 생각 못 했겠죠.
하지만 세종은 했습니다.
1. 적을 토벌하라
"야인 기병 4백여 명이 여연에 갑자기 침입하여 주민을 노략하므로 강계 절제사 박초가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포로로 잡힌 사람 26명, 말 30필, 소 50필을 도로 빼앗았고,전사한 자가 13명이나 되었으나 마침 해가 저물어서 끝까지 쫓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여연과 강계 백성 중에 포로로 잡힌 자가 75명이요, 전사한 자가 48명이나 됩니다"
당시 북방의 방비는 기껏해야 거점 방어 수준을 넘지 못 했습니다. 함경도 동북쪽만 따졌지만, 사실 더 중요한 곳은 백두산에서 갈라진 강, 압록강 중부의 파저강 유역이었죠. 태조 때부터 확보했던 여연군은 계속되는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심심하면 강을 건너 와서 강계까지 쳐들어 왔죠. 세종은 이를 회의에 붙입니다. 세종답게 정말 길고 긴 회의였죠. 결국 치는 쪽으로 의견이 결정되는데, 여기서도 참 기나긴 회의가 이어집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모습을 참 코믹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 군사작전을 의논하는 상황이 참 긴장되고 재밌었을 거라구요. 그리고 진짜 전문가 최윤덕이 나타나자 회의한 건 모두 버로우 (...)
"(대마도 정벌 때 말리는 자가 있었지만) 선왕께서 단연히 대의로 장수에게 명령하여 토벌하였으니 비록 그 소굴을 소탕하지는 못했으나 적이 마침내 위엄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게 되었다"
세종은 그렇게 결정을 내린 후 최윤덕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최윤덕은 그 자세한 계획을 세우죠.
"지금 내전을 받자와 엎드려 살피오니, 파저강을 토벌하는 일에 군사 3천을 쓰라고 하시니,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오랑캐의 땅은 험하고 막힌 곳이 많아서 모름지기 수비군을 나누어 머물러야 하며, 또 치중을 보호하는 군사도 두어야 일이 가히 이룩될 것입니다. 하물며 이와 같은 형세가 두 번 일으키기 어려우니,"
이에 대해 세종은 "그럼 그렇지 내가 삼천명 가지곤 안 된다고 했자나 --"라고 하면서 1만으로 더 합니다.
"윤덕의 말에, ‘황해도의 군마가 시기에 미쳐 달려오면 피로하여 쓸 수가 없을 것이니, 평안도 군마가 거의 2만 2, 3천에 이르는데 어찌 황해도를 의뢰할 것이냐."
이렇게 황해도의 병력을 동원하는 일도 취소되죠. 뭐 일부는 동원하지만요. 그 외에 어떻게 할 것이냐, 언제 할 것이냐의 자세한 의논이 시작된 후 떨리는 토벌이 시작됩니다. 목표는 태종 때부터 계속 조선을 괴롭혀 온 이만주!
총병력은 평안도 1만과 황해도 5천의 총 1만 5천, 이 작전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4군 개척의 토대가 되었죠. 이 전후로 개척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압력을 느낀 이만주는 맹공격을 가하지만 17년에 이천의 2차 토벌로 다시 기세가 죽었습니다.
2. 오랑캐는 강 밖으로
"강역안에 오랑캐가 사는 것은 실로 옳지 못하다. 즉시 이를 쫓아내면 어찌 근심이 있겠는가"
태종이 남겼다는 말입니다. 세종의 4군 6진 개척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의 말은 이랬죠.
"야인들은 강제로 몰아내지 말고 그대로 두고 위무하는 것이 옳습니다"
"공주(경원)는 사방이 트인 곳이라 방수가 지극히 어려우니, 혁파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용성은 극히 요해지이므로 관새를 삼으면 내가 베개를 높이 베고 누울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세종의 답은 이랬습니다.
"수십 년이 못 되어 야인들의 사는 것이 반드시 퍼질 것이다."
"용성을 관새로 삼는다면 야인들의 사는 것도 역시 용성으로 한계할 것이며, 길주로 관새를 삼는다면 야인들의 사는 것도 역시 길주로 한계해서 한도가 없을 것이다. "
당시 두만강의 알목하, 소다로 등의 지역은 조선군에 밀려 여진족이 두만강 이북으로 물러나 있었죠. 거기다 여진족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난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이 때 투입된 것이 바로 조선의 대호 김종서였습니다.
최윤덕 대신에 그가 투입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더 이상 공격만 할 때가 아니라는 거지요. 이제 압록-두만강의 경계를 확실히 하고 여진족을 회유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이전처럼 "우린 조선을 섬긴다능" 정도가 아니었지요. 확실히 조선인이 되라는 거였습니다. 그 시작은 영북진, 그는 힘의 공백이 생긴 알목하에 영북진을 설치합니다. 동시에 오랑캐 토벌 후 숨통이 트인 여연군 밑에 자성군을 만들죠.
당연히 여기 사는 여진족들과 여기에 들어오고 싶어 했던 여진족들의 반발이 생겼지만, 이렇게 무시합니다.
"우리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면 무엇 때문에 쫓으리요. 그러나 만일 옮겨가고자 한다면 또 무슨 까닭에 구속하겠는가"
김종서와 세종의 뜻은 하나로 일치했으니...
"이제 그들이 스스로 멸망하여 북쪽 변방이 텅 비게 되었으니, 이런 기회가 온 것을 놓칠 수 없다"
"강토는 버릴 수 없고 기회는 잃을 수 없으니, 강을 따라 진을 설치하여 한편으로는 농사짓고 한편으로 적을 지킨다면 국경을 방어하기 위하여 다른 지방의 군사들이 왕래하던 폐단 또한 없앨 수 있습니다"
6진 개척은 탄력을 받기 시작해 백안수소에 영북진을 옮기니, 종성진입니다. 원래의 영북진 북쪽에는 회령진을 세우고 이어 부로 승격시키죠. 이어 경성으로 후퇴했던 경원부를 회질가로 옮깁니다. 그 뒷받침을 하기 위해 맨~ 처음에 경원이 있던 곳에도 진을 만드니 현재의 경흥진이죠. 이렇게 되자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최전방이었던 경성이 후방이 되었고, 이 곳에 북병영을 설치, 5진을 뒷받침하게 합니다.
세종 24년에는 경원 북방부터 회령부 서방까지 장성을 쌓게 하고, 31년에 마지막으로 5진의 후방에 부령부를 설치합니다. 이렇게 6진이 완성되죠.
한편 문제가 됐던 여연의 서쪽에 자성군을 설치한 이후 그 남쪽에 무창군을, 23년에는 여연, 자성의 사이에 우예군을 설치해서 4군을 완료하죠. 양 쪽 다 10년간에 걸친 긴 개척이었습니다.
이렇게 여진족들은 조선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거나 강 밖으로 도망치는 길을 확실히 선택해야 했죠.
3. 사민
"하물며 임금이 백성의 원망을 피하기만 생각하고 장래를 생각지 아니하여 그 일에 힘쓰지 아니하고 한갓 세월만 허비한다면 어찌 고식지계(미봉책)가 아니겠는가. 이것도 중한 일이니 그만둘 수 없다"
"나의 계획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중지할 수 없다"
"임금이 태평한 태평성대를 보았느냐? 내 마음은 지옥이기에 그나마 세상이 평온한 것이다"
세종 때의 사민 정책, 대부분 나타나는 기록은 백성들도 좋아했다인데... 사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_-; 좀 힘 있는 사람은 토관으로 삼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세금을 면제하고 여러 혜택을 주었고, 천민들은 양인으로 만들어줬죠. 그래도 사람들은 거부했습니다. 당장 고향을 떠나는 것부터 해서 북방은 추웠고, 연이어 흉년만 계속됐습니다. 여진족은 허구헌날 쳐들어오고 그들을 막기 위해 성 쌓는 데 계속 동원돼야 했죠. 사신이 오면 대접해 줘야 됐구요. 안 그래도 조사의의 난으로 차별받기 시작한 곳이 함경도였습니다. 완전히 차별받게 된 때는 이징옥,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세조 이후이지만 이런 곳에 가고 싶었을 리는 없죠. 평안도 쪽도 마찬가지였구요. 당장 이사해 온 백성들도 도망가는 곳이 북망이었는데요.
1. 함흥 사람들이 가기 싫다고 하고 있네요.
2. 원래 소다로(경원), 알목하(회령)는 우리 땅이었는데 방어에 실패해서 오랑캐 소굴 됐었죠.
3. 전하께서 선왕의 뜻을 이으려고 하시는데 누가 싫어하겠어요. 그런데요............... 아 물론 전하께선 모두 의심하셔야죠(^_^)
4. 고향을 그리워하는 건 인지상정이니 멀리 옮기면 안 될 거고 가까운 곳에서 조금씩, 조금씩 옮겨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고향까지 왔다갔다하기 쉬우니까 괜찮을 겁니다.
함길도 감사 조말생의 ('-'a) 상소입니다. 이렇게 대 놓고 백성들이 대 놓고 싫어한다고는 말 못 하고 적당히 돌려서 말 했죠.
"본도의 백성들은 모두가 다른 곳에서 들어와 거주하는 사람이니, 살아 갈 수 있는 일정한 재산과 안정된 마음이 없습니다. 또 수재·한재·풍재·상재로 인하여 여러 번이나 흉년을 만나 다른 지방으로 이사하는 사람이 서로 잇닿게 되었으니, 만약 찾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마침내 번성할 시기가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임인년 이후부터 다른 도로 옮겨 간 사람들은 모두 본고장으로 돌려보내게 하소서"
하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흩어지면 군사도 줄어들고 여진족들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될 테니까요. 깨진 독에 물 붙기는 계속됩니다.
"길주 이북에 눈이 깊이 쌓이고 풀이 묻히어, 들에 놓은 우마가 태반이나 굶어 죽었사온데, 회령·경원 양읍이 더욱 심하여 새로 옮겨 온 백성들의 농우와 전마가 거의 다 죽었기 때문에, 또 새로 이사 온 백성들이 길을 통행하지 못하옵기에 설마를 타는 자들을 시켜 미곡을 가지고 가서 이들을 구제하고있습니다"
특히 남쪽에서 온 백성들은 추위와 눈에 적응하지 못 했죠. ... 부산에 살던 저도 서울의 눈에 아직도 적응 못 하고 심심하면 미끄러지는데요 -_-; 그 수도 어마어마합니다. 도망가면 도망갈수록 그 도망간 자들을 붙잡아 오는 것과 동시에 사민도 계속됐습니다.
"금년에 이미 입거한 향호와 역리는 아울러 모두 3백 80여 호에 인구가 5천 3백 30여 명인데"
25년 7월의 기록입니다. 이 한해에 이미 오천 명 넘게 간 거죠. 이에 비관해 죽는 사람까지 나옵니다.
"옥과현의 호장 조두언이 함길도의 향호로 입거하게 되었는데, 멀리 이사가는 것을 꺼리어 자살하였습니다"
이 다음 내용을 보면 "가는 게 절대 힘들고 무서운 일이 아닌데 미리 무서워해서 죽었으니 소문 나서 안 가겠다는 사람이 늘면 안 된다..." 는 식으로 말 하지만 그만큼 힘드니까 안 가려고 한 거죠. (...) 결국 범죄자나 부랑자 위주로 보내게 됩니다. 이 정도면 신대륙 개척이랑 다를 게 없죠 (...)
세종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그들이 살던 평탄하고 비옥한 토지는 텅 비어 주인 없는 땅이 되었고, 또 그 고을에 군액이 감축되어 가니, 그 곳에 다른 사람을 들이여 살게 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그들의 원망과 고통과 근심은 지극했던 것이다."
결국 사민정책은 성종대까지도 계속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조선의 국경은 완성되었죠. 김종서는 마침내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비록 내가 있다 하더라도 만일 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을 족히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비록 종서가 있다 하더라도 만일 내가 없었다면 족히 이 일을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때 김종서의 부관으로 있던 이가 신숙주였습니다. 이후 세조는 신숙주와 한명회를 교대로 함경도로 보내면서 이 지역을 확실히 안정되게 했고, 골칫거리였던 이만주를 토벌해 죽이면서 북방은 한동안 안정됐습니다.뭐 너무 평화로웠던 게 문제였죠. -_-;
이 4군 6진을 맡았던 최윤덕, 이천, 김종서 등이 정승의 반열에 올랐고, 신숙주, 한명회 등도 여기를 맡았던 것 등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곳을 맡는다는 건 엄청난 중임임과 동시에 중신으로 대접받는 필수코스였죠. 이후야 어땠을진 몰라도 특히 무관들은 여기서 근무한 걸 최고로 친 듯 합니다. 그만큼 힘들기도 했겟지만요. 그래서인지 이 곳 출신 병사는 겸사복 등 친위대에 우선 배치됐구요.
예. 이 친구처럼요.
4. 그 이후
"강인 수천 명이 4군 지역을 차지하여 북쪽으로 갈파 길을 끊고, 서쪽으로 건주 곡식을 통하면서, 남쪽을 향해 우리를 호령한다면 일곱 고을 정수와 성벽은 장차 흙이 무너지듯, 기와가 부스러지듯 하여, 패수 이북 지역은 다시 조선의 소유가 아닐 것이다."
"방수할 곳이 남에게 있어도 오히려 도모했는데, 방수할 곳이 나에게 있건만 어찌해서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것인가? 나는 그런 이유로 폐4군은 복구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지은 경세유표에 있는 내용입니다. 보시다시피 정약용답게 참 명문이죠. 4군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서 단종 때 3군이 폐지되고 세조 때에 하나 남은 자성군까지 폐지돼 폐 4군이라 불리게 됩니다. 뭐 이 정도로 살기 어려웠다는 거겠죠. 최대한 여길 확보하려고 중간 중간에 여러 군을 설치했지만, 이 4군의 후방에 있던 곳이 강계, 그리고 삼수갑산입니다. 조선에서 험하기로 유명한 곳, 대표적인 유배지 중 하나죠. 6진 지역은 그래도 동해가 있고 두만강이 흘러서 나았죠. 함경도 지방의 주요 지역도 다 강가나 해변가였고, 임진왜란 때 함경도를 점령한 2군이 주로 주둔했던 곳도 그랬죠. 이 폐 4군 지역은 이후에도 우리 역사의 배경으로 나온 적이 없다시피하죠. (...)
전 세계에 정복 군주는 많고, 거대한 영토를 만든 나라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관리를 못 해서 잃은 경우가 너무나도 많았고, 그렇게 점령한 땅을 아직도 가진 나라는 적이 없다시피했던 미국과 러시아 정도입니다. 중국이야........ 예 논외로 하죠 -_-;
영토를 늘리는 건과 함께 그 지역을 관리하는 건 정말 중요합니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게임에서도 그 어려움을 제대로 나타낸 건 문명 정도죠. 그런 점에서 세종의 4군 6진 개척은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백성들, 특히 북도에 있던 백성들과 북도로 끌려가는 백성들에게는 결코 좋지 못 할 세월이었을 겁니다. 세종이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언제나 백성을 위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전쟁을 빼면 가장 백성을 힘들게 했을 왕도 세종대왕일 겁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부터 이런저런 정복들이 역사에 적혀 있지만, 실록에서처럼 아래의 반대와 백성들의 불만을 적을 정도의 기록이 남지 않았죠. 정복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아래 백성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 건지 알게 해 주는 게 이 4군 6진 개척이죠. 험한 곳에 있으면 군사들이 힘들어하니 매일 고기와 술로 잔치할 수밖에 없다는 김종서의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죠. 그나마 고대에는 정복한 지역의 백성들을 노비로 삼는다는 메리트가 컸지만 -_-; 이 때는 그런 것도 힘들었죠. 뭐 고려 때부터 계속 정복 혹은 귀화한 여진족들은 하층민으로 살았던 모양입니다만.
그런 면에서 세종이 현 FTA를 한다면 국민들의 의견을 다 받아들이면서 토론해 가며 할 것이다... 고 하는데 (...) 그럴 리가 없죠. 이런 대외 정책은 어느 쪽이든 피해 받는 쪽이 생기고 밀어붙여야 되거든요. 그런 면에서 이런 정복이 가능한 건 군주정의 장점이겠죠.
그 누구보다 백성들을 사랑하고 토론을 중시했던 세종대왕. 하지만 이 북방 개척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무릅쓰며 이룬 일이었습니다. 참... 무슨 생각을 해야 될까요?
이렇게 조선의 국경은 완성되었습니다.
--------------------
뿌나 얘기
1. 중간중간 잘 따져 보면 세종대왕 때의 업적들을 조금씩 보여줘요. 칠정산도 그렇고, 소이의 GPS(...)는 지리지가 정확하다는 걸, 중간에 자격루 프라모델(...)을 넣은 것도 그렇고 뜬금 없는 앙부일구 얘기도 그렇고 말이죠.
2. 뿌나 공홈에서 은근히 나오는 얘긴데,14화 마지막에서 훼이크 가마 맡은 노비들 죽은 거에 대해서는 소이도 강채윤도 아무 말이 없죠. 따지고보면 대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한 건데요. 기절한 걸로 좀 하지 -_-;
3. 그냥 역사에서처럼 한자 제대로 읽기 위해서라고 하면 될 것을 뭘 또 숨기려고... 어차피 반포할 걸 말이죠-_-;
아무튼... 이제 끝! 시리즈는 진짜 끝!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1-22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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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해시 아이콘
11/
11/20 23:2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리즈는 진짜 끝!
다른 시리즈 시작! ^^;;;
OrBef
해시 아이콘
11/
11/21 01:35
수정 아이콘
7개 더 쓰셔야 끝입니다!!!
sungsik
해시 아이콘
11/
11/21 10:11
수정 아이콘
시리즈가 1에서 완이라니 이런 게 어딨습니다 ㅠ.ㅠ
그나저나 북방개척이라는 게 생각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노력이 있었네요.
백성들을 가장 고달프게 한 작업일텐데.. 그 작업을 포기했으면 현재 한반도 국경선은 훨씬 아래로 내려왔을 수도 있고..
참 옳다 그르다를 딱 판단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백마탄 초인
해시 아이콘
11/
11/21 11:4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백성의 반발을 딛고 이뤄낸 배경에는 대부분의 백성들은 잘 살게 해줬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명분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도 되느냐? 의 문제 의식은 그당시 신분제 사회에서 의미가 없는 부분이였습니다. (대부분은 힘없는 하층민이였을테니..)
세종대왕은 그당시 가장 적절하고도 훌륭하게 영토를 개척하고 국경을 마련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시리즈도 기대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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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9
...어머니
[10]
별마을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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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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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
커피 맛 좋은 날.+감사
[10]
nic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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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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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
(10)
무엇이 그녀를 떠나게 했을까?
[30]
happyend
8226
1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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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
(10)
[예능이야기] 열여섯번째. 무한도전의 사회적 메시지.
[20]
Hypocrite.12414.
6915
10/06/09
6915
1595
(10)
테란에서, 저그에서, 토스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낸 선수는 누굴까?
[51]
信主SUNNY
10297
10/06/06
10297
1594
나는가수다 프로그램을 위한 변명
[28]
meon
6004
11/11/21
6004
1593
사군 육진 - (완) 조선의 국경
[4]
눈시BBver.2
6132
1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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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스타 단체전에서 "에이스"의 의미.
[39]
ipa
6392
1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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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
(10)
경기관람, 이제 미래를 봅시다.
[21]
becker
5203
10/05/25
5203
1590
(10)
[쓴소리] 안타까움과 허탈함, 그리고 의식의 부재
[75]
The xian
6524
10/05/24
6524
1589
(10)
감사합니다.
[220]
엄재경
23302
10/05/23
23302
1588
다단계 피해 예방 혹은 ‘Anti’를 위한 글(+링크 모음) 本(본) 편 : 사업Ⅳ-①
[13]
르웰린견습생
3791
1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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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7
[2_JiHwan의 뜬구름잡기]타산지석(他山之石)
[11]
2_Ji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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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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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6
(10)
클랜 숙소 생활에 대한 추억, 그리고 여러분께 올리는 부탁.
[8]
Hell[f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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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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