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2/01/02 00:18:36
Name 깃털달린뱀
Subject 나도 신년 분위기 좀 느끼고싶다아아아!

1.
어린 시절 저는 기념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아니, 지구가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에 온 걸 도대체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거지?
뭐 지구나 달이 특정 위치에 있으면 광역 버프라도 걸리나? 그냥 중력에 의해 거기 있는 건데?

'새해 첫 날'도 그저 빙빙 돌 뿐인 지구 위치 중 하나를 인간이 마음대로 정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설은 딴 문화권에선 그냥 전혀 특별하지 않은 날 중 하나일 뿐이죠.


생각이 이러니 당시의 저는 모든 종류의 기념일을 그저 과거부터 내려온 미신 취급했습니다.
떡국 먹어서 나이를 먹니, 농사 풍년 기원 차례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전 그런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떡국은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크리스마스에도 굳이 캐롤을 듣지 않았습니다.
외부에서 정해주는 것보다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좋잖아요?


2.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져서인지, 이러한 분위기는 점점 약해져갔습니다.

초등학생 때만 해도 명절에 한복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순간부터 그냥 사복을 입고 가게 됐습니다.
추석, 설의 차례상도 점점 간소해져갔고, 연휴 기간에 가족을 만나는 것이 아닌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이런 기념일은 무언가 특별한 분위기의 날이라기보단, 그냥 대충 친척들 좀 보고 오는 날로 바뀌었습니다.
편하기야 참 편하죠. 귀찮게 한복 안입어도 되고, 명절음식 산더미처럼 냉동실에 박아놓고 내내 안먹어도 되니까요.

저는 이러한 변화를 꽤 반가워했습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관습들이 유지 될 이유는 없으니까요.


대학생 들어서는 아예 혼자 살고 TV도 없으니, 기념일 자체에 무감각해져 갔습니다.
주변에서 무슨 무슨 날이다라고 호들갑 떠는 사람도 없고, 뉴스도 안보니까요.
심지어 제 생일조차 까먹고 넘어갈 뻔한 적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루하루는 그저 평일과 주말이고, 공휴일은 그 의미는 전혀 생각지 않은 채 꽁으로 노는 날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판에 박힌 하루를 몇 년을 보냈습니다.



3.

그렇게 모든 기념일을 무시하고 산 결과, 세상이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는 크리스마스의 캐롤과 트리와 눈사람도, 새해를 맞이하는 기대와 들뜸도, 설날에 한복을 입고 연을 날리거나 전통놀이를 하는 풍습도, 추석에 빚는 송편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루하루가 그저 특색 없는 나날일 뿐입니다.


저는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각각의 관습, 불편함을 모두 벗어던지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무개성한 똑같은 나날이라고.
그 귀찮음, 불편함이라 생각 했던 것이 사실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진일보하여, '자연과학적 의미'에의 집착을 벗어나 결국 모든 의미는 인간이 부여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념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날'에 의미를 담는 것이 나라면, 평범한 하루보단 즐거운 쪽이 낫습니다.
어차피 똑같은 나날이라면, [[핑계를 대서라도]] 즐거운 편이 좋잖아요?

생일은 그저 달력 상의 검은날일 수 있습니다. 그치만 케이크를 사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맛있는 식사를 하는 게 더 재밌잖아요?

빼빼로데이는 명실상부한 상술의 끝판왕입니다.
근데 뭐, 상술이면 좀 어떻습니까? 11월 11일에 빼빼로 사먹으면 괜히 재밌고, 혹시나 좋은 인연이 있을까 두근대며 기대할 수도 있잖아요?


뭐든 뜬금없는 평일에 하는 것보다, 기념일에, 의미를 담아서 하는 일이 훨씬 뜻 깊게 느껴지고 더 재밌습니다.
[[즐거우면 그만 아닙니까?]]


4.

저는 이것을 늦게 깨달았습니다.
지나간 나날들, 분위기를 타서 더 재밌게 보낼 수 있었던 날들을 생각해보니 정말 아쉽습니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기념일이나 미신을 조금이나마 챙길래요.
내가 그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서.

12월 31일에는 괜히 보신각에라도 나가볼래요. 인파에 치여서 번거롭지만, 주변 공기에서 설렘, 들뜸이 밀려오니까.
동지엔 괜히 팥죽을 사먹어보고, 관심 없다고 안가던 정월대보름 지역 행사에도 나가 볼래요.
코로나 때문에 지금은 힘들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꼭.



한 겨울인데도 미세먼지가 극성입니다.
다들 [[미세먼지를 배출하기 위해]]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는 게 어떨까요?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0-20 00:22)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답이머얌
22/01/02 01:43
수정 아이콘
전 아직도 깃털달린 뱀님의 어릴적 생각과 같습니다. 왜 남의 생일에(크리스마스) 하나 관련 없는(신자도 아닌 사람) 사람들까지 덩달아 난리인가? 오히려 놀고 즐기기에는 부처님 오신 날이 더 좋은데 그날은 왜 단순한 종교축일일 뿐일까 아직도 이해 못하는 한 사람입니다. 설날도 마찬가지. 글 쓰신데로 인간이 자의적으로 정할 날일 뿐인데. 오히려 새해라면 생명이 약동하는 봄이 좋을 것 같은데 엄동설한에 명절이라고 기분내는게 여전히 이해 안가고 있죠. 그런 면에서 농경 사회의 유산인 추석은 그래도 이해가는 면이 있고.

국경일은 한달에 한 번 일요일 아닌 날에 공짜(?)로 노는 날 하루쯤 있는게 좋아서 딱히 의문감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헌절의 휴일 부활과 4월, 11월에도 노는 날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10월과 5월의 노는 날을 좀 줄이더라도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전 제 생일도 그냥 아무생각없이 보냅니다. 축하받으면야 기분이 좋아지긴 하지만 그런거 없었을때도(예를 들어 군대 있었을때, 젊을때 파견으로 지방이나 외국으로 나가 있을때 등) 아무 생각없었거든요.

어떤 축제나 축일은 인간의 본성, 뭔가 일이 없으면 지겹고 근질거리는 본성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무슨 핑계를 만들어서라도(기분이 좋아서 술, 기분 나빠서 술, 누굴 만나서 술, 아무 일 없어서 심심해서 술 뭐, 이런 식으로 말이죠.) 술을 마시듯, 일상이 이어지면 그냥 뭔가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일상을 타파하고 싶어하는 본성이 있어서 그런가 싶습니다.
양고기
22/01/02 03:37
수정 아이콘
없는거보다는 있는게 낫죠. 그냥 사회적 합의라고 생각하고 즐깁니다. 사실 일요일도 꼭 그날 쉬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있어서 좋잖아요
22/01/02 05:03
수정 아이콘
저도 30대가 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특별한 날이라서 축하하는게 아니라, 특별한 날로 만들기 위해서 축하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특별한 날들이 삶에, 생활에 리듬과 악센트가 된다는 것.

올 한해 많은 특별한 날이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살려야한다
22/01/02 07:27
수정 아이콘
크크 저도 99% 같은 생각입니다. 별거 아닌거 알지만 재미있잖아?!
Hammuzzi
22/01/02 09:11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고 그렇게 쌓인 작은 추억 하나하나가 모여 인생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이혜리
22/01/02 09:19
수정 아이콘
헤헤 저는 반대입니다.

어렸을 때 부터 모든 기념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최선을 다해서 즐겼고 지금은 지쳐서줄였어요.

12월 31일을 기념한다고 보신각 종치는 거 보러 갔다가 첫줄에서 2시간 넘게 갇히고 힘겹게 집에 갔었고.

이브때 명동갔다가 내의지로는 1도 상관없이 흘러다니다가 비싸고 정신없고 맛없는 밥 먹고.

해뜨는거보겠다고 정동진가다가 길 막혀서 도착도 못하고 차에서 내려서보고.

등등 다 맛보고 이제는 나만 신날 수 있는 기념일만 챙기게 되었어요. 다들 신나면 넘모힘듬
Dr. ShuRA
22/01/02 09:22
수정 아이콘
저는 1년에 생일이 고작 이틀(양/음)인 게 싫어서 양력부터 음력까지 다 생일로 칩니다
22/01/02 10:09
수정 아이콘
크크 멋지시네요
외국보면 할로윈 기간, 크리스마스 기간 잘챙기는데 거의 그 레벨이군요
그 닉네임
22/01/02 10:22
수정 아이콘
저도 아버지랑 생일 하루차이라 그동안 살면서 죄다 쌤쌤으로 퉁치고 넘어갔는데 재작년부터 챙기는 중입니다
22/01/02 11:52
수정 아이콘
저도 비슷한생각으로 살았는데 애가 태어나고 하니 가족의 문화라고 생각하면 하다보니 나름 재미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408 나도 신년 분위기 좀 느끼고싶다아아아! [10] 깃털달린뱀3572 22/01/02 3572
3407 중년 아저씨의 베이킹 도전기 (2021년 결산) (스압주의) [34] 쉬군6657 21/12/31 6657
3406 게임 좋아하는 아이와 공부 (feat 자랑글) [35] 담담3972 21/12/30 3972
3405 허수는 존재하는가? [91] cheme5756 21/12/27 5756
3404 고양이 자랑글 (사진 대용량) [31] 건방진고양이2882 21/12/30 2882
3403 마법소녀물의 역사 (1) 70년대의 마법소녀 [8] 라쇼3253 21/12/26 3253
3402 경제복잡도지수, 그리고 국가경쟁력 [27] cheme4332 21/12/21 4332
3401 등산 그리고 일출 이야기(사진 많음 주의) [36] yeomyung2322 21/12/21 2322
3400 [역사] 삼성 반도체는 오락실이 있어 가능했다?! / 오락실의 역사 [13] Fig.13155 21/12/21 3155
3399 [NBA] 현대 농구의 역사적인 오늘 [27] 라울리스타4058 21/12/15 4058
3398 그들은 왜 대면예배를 포기하지 못하는가 (1) [75] 계층방정7446 21/12/13 7446
3397 위스키 도대체 너 몇 살이냐 [부제] Whiskey Odd-It-Say. 3rd Try [40] singularian3155 21/12/11 3155
3396 수컷 공작새 깃털의 진화 전략 [19] cheme4007 21/12/10 4007
3395 가볍게 쓰려다가 살짝 길어진 MCU 타임라인 풀어쓰기 [44] 은하관제4399 21/12/07 4399
3394 고인물들이 봉인구를 해제하면 무슨일이 벌어지는가? [66] 캬라10286 21/12/06 10286
3393 [역사] 북촌한옥마을은 100년도 안되었다?! / 한옥의 역사 [9] Fig.14285 21/12/06 4285
3392 굳건함. [9] 가브라멜렉3587 21/12/02 3587
3391 로마군의 아프가니스탄: 게르마니아 원정 [57] Farce4399 21/12/01 4399
3390 올해 국립공원 스탬프 마무리 [20] 영혼의공원4071 21/11/29 4071
3389 꽤 행복한 일요일 오후였다. [15] Red Key4027 21/11/23 4027
3388 [도시이야기] 경기도 수원시 - (3) [12] 라울리스타3796 21/11/16 3796
3387 신파영화로 보는 기성세대의 '한'과 젊은세대의 '자괴감' [23] 알콜프리4992 21/11/15 4992
3386 <1984 최동원> 감상 후기 [23] 일신5265 21/11/14 526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