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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08/16 23:51:54
Name DEICIDE
Subject 스타크래프트소설 - '그들이 오다' 4~6화
2005년 5월 6일 아침 8시
서울특별시 SKT T1 숙소


  선수들의 모임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 누가 출전할 것인지, 누가 적당한 것인지는 그 누구 한 사람도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밤이 새도록 이야기한 것은 어떤 구단에서 어떤 프로게이머가 다쳤는지, 또는 누구의 가족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는지, 거기에 대한 애도와 위로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어느 누구도 선뜻 자신이 출전하겠다고 나서지 못했고, 그 어느 누구도 누구를 내보내겠다고 하지 못했다. 목숨이 걸린 문제였던 것이다.
  회의라는 것이 지지부진해지자, 날이 밝아오자 선수들과 감독들은 일단 잠을 자기로 했다. 누가 출전하게 되든, 좋은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간도 얼마 없고, 맵도 상대도 모르니 연습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게임에 참여할 ‘건강’ 이 남아있는 프로게이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컨디션 조절뿐이었다. T1 선수들은 각자의 방에 몇 명씩의 동료 프로게이머들과 같이 잤고, 거실과 연습실 등에서도 이불을 덮고 선수들이 쓰러져 자고 있었다.

  “기효는 아직 연락 안 되지?”
  “……예.”
  “그래. 수고했다, 영훈아. 이제 들어가서 자라.”
  “예, 감독님. 알겠습니다.”

  송호창 감독은 팔짱을 끼고 소파에 깊숙이 드러누웠다. T1 숙소로 출발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있던 기효가 보이지 않더니, 연락도 되지 않았다. 기효뿐만이 아니라, 꽤 많은 숫자의  안전이 확인된 프로게이머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비난하거나 탓할 수만은 없었다. 수도 없이 자신이 다루는 병력을 상대방과 싸우게 했던, 그리고 그 승과 패를 맛보았던 프로게이머들이지만, 지금은 진짜 ‘전쟁’ 상황이다.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상황이다. 지면 바로 죽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스타크래프트는 컴퓨터 속에서 이루어지는 전쟁놀음이 아니었다. 진짜 생과 사를 가르는 전쟁터가 되어버렸고, 그것을 감당하기에 프로게이머들은 한 명의 여린 청년에 불과했다. 고도의 혹독한 훈련이나 교육을 받은 이들도 당해내기 어려운 부담감과 위협. 그리고, 누군가 내 대신 나갈 수 있다는 자기방어적인 상황에서 도망가지 않을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이었다.

  “끄응……”

  송호창 감독은 크게 기지개를 하고 눈을 감았다. 벌써 다른 감독들은 깊이 잠에 빠져 있었다. 살면서 이런 일을 눈으로 보게 되다니. 외계 종족과의 전투라는 게임을 업으로 삼으면서, 한 번도 외계인이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는데. 그런데 정말로 지구인들이 외계인의 침공으로 학살을 당하다니. 그리고 이 인류를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프로게이머들이라니……
  이런 상황에서 감독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은 선수에게 이미 맡겨진 것이 아닐까……? 아니, 언제나 항상 모든 것은 선수에게 달려 있었지.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매우 지엽적이고 작은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던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신뢰하는 것’ 이 최선이요 최고의 방책이 아닐까.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들다 보니 잠이 오기 시작했다. 송호창 감독은 잠들면서 중얼거렸다.

  “안기효, 이녀석아……”



2005년 5월 6일 아침 10시
잠실종합병원 병실


  “헉……”

  조용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악몽을 꾸었다. 깨고 나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것을 깨어나려고 애쓴 기억은 난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헉…… 허억……”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니 병원이었다. 이제야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자신이 병실에 누워 있다는 것, 그리고 병실 안은 무척 덥다는 것이 가장 처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옆에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는 강민 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팔꿈치 부분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오른팔이 보였다. 팔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고, 팔꿈치가 있던 곳에는 붉게 피가 배어나와 있었다.

  “후우……”

  용호는 냉정해지려고 애썼다. 모든 것이 생각났다. 친구를 붙들려다가 갑자기 떨어진 엘리베이터. 그 엄청난 힘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던 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추락한 엘리베이터와 함께 잘려진 팔. 그 엄청난 피… 피…
  그 와중에서도 이를 악물고 옷을 벗어서 잘린 상처를 붙들어 매면서 지혈하던 기억.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고, 지금에서야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이군.
  스타크래프트를 하다 보니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해져 버린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내가 잠시 미쳐서 그렇게 무덤덤한 것이었을까. 팔이 잘려버렸다. 앞으로는 스타크래프트도 하지 못하고, 그 무엇도 하지 못하게 될 텐데.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되지. 어떻게 열심히 살아가야 할까 생각해야 하지. 이러면 안되지.

  그렇게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어가다가, 문득 다시 민이형이 눈에 들어왔다. 옆에서 병간호를 해 주었나보다. 그런데 민이형만 온건가? 다른 팀원들은? 용호는 일단 민이형을 깨워 보기로 했다.

  “민이형, 민이형, 일어나봐.”

  용호는 링겔을 맞던 왼손을 들어서 강민을 툭툭 건들어 보았다. 그러자 강민이 부스스 하고 일어나더니, 용호를 보고 토끼눈을 했다.

  “어, 어. 용호야, 정신이 들어? 정신이 이제 좀 들어?”
  “세상 모르고 자기는…… 즐쿰토스가 즐쿰이라도 꾼거야?”

  조용호는 그 상황에서 농담까지 하는 여유를 보였다. 막 잠에서 깨어난 강민은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제대로 선택하지 못했다.

  “어, 요……용호야. 너 팔……”

  그리고 강민은 아차 싶었다. 그 말을 꺼낸 게 아닌데.

  “이 팔? 친구 잡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이제 큰일났네. 스타도 못하고. 그치, 민이형.”

  조용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자기 팔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보다 기분이 조금 더 서글퍼지는 것 같았다. 그때 강민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용호야, 지금 스타가 문제가 아니다. 아니…… 아닌가.”
  “응? 무슨 소리야?”
  “믿기 어렵겠지만,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했어. 전 세계가 다 망해버렸다구.”
  “뭐…… 뭐??”

  이 사람이 무슨 꿈을 꾸고 이러나 싶은데, 강민은 계속해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다친 것도 다 외계인이 공격해서 그래. 그리고 지금은, 그것들이 말하기를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열어서, 자기네가 이기면 우리를 다 죽이고, 우리가 이기면 우리를 살려주겠다고 했어. 그런데……”
  “형, 잠깐, 잠깐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기, 강민선수시죠!?”

  용호의 말이 한 의사의 큰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한 의사가 뛰어오더니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던 것이다.

  “진짜 강민선수시군요. 어, 어라. 그러고보니 조용호선수시네요!”
  “예, 예……”

  갑자기 등장한 의사에 두 사람 모두 당황했다. 그런데 그들 못지않게 의사도 당황한 듯 했다. 조용호의 잘린 팔을 보았기 때문이다.

  “조…… 조용호 선수, 많이 다치셨네요. 어떡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의사가 탄식하듯 말하다가, 강민 선수를 보고 놀라며 다시 말했다.

  “아니, 강민 선수도 다치셨습니까??”
  “아, 예…… 손가락을 조금……”
  “이런 상황에서 손가락을 다치시면 어떻게 어떻게 합니까, 강민선수!!!”

   강민이 깁스를 한 손가락을 멋쩍게 들어올리자, 의사가 하소연했다.

  “대체…… 이런 상황에서…… 강민선수같은분이…… 전 강민선수의 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손가락을 다치다니요.”
  “죄송합니다.”
  “후……”

  의사는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다치신 조용호선수나 강민선수가 더 힘드실텐데. 그 마음 알면서도 답답해서 그랬습니다. 두분 심정은 오죽하시겠습니까.”
  “……”
  “실례했습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나서 의사는 혼잡한 병원의 분주함 속으로 총총히 사라져버려다. 아직 영문을 모르는 조용호와, 그런 의사의 뒷모습을 쓸쓸히 쳐다보는 강민, 그리고 이제 모두들 그 두 사람을 쳐다보는 환자와 그 보호자들이 더운 병실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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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6일 오후 2시 반
서울특별시 SKT T1 숙소


  새벽에 잠들었던 선수들이 한 명씩 일어나고 있었다. 윤열도 부스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어젯 밤에 가장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다른 선수들보다 좀 일찍 일어난 것이다.
  찬물을 틀어놓고, 손을 찬물에 대자 윤열은 조금 정신이 들었다. 양 손으로 물을 받아서, 고개를 숙이고 몇 번을 끼얹었다. 그렇게 몇 번 찬물로 세수를 하고,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

  “후……”

  윤열은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을 보았다. 이런 장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몇 번 보았었지. 얼마 전에 본 ‘달콤한 인생’ 에서의 이병헌이었나…… 하지만,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나 같을까. 이런 기분과 이런 마음일까. 윤열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연거푸 몇 번이고 세수를 했다.

  “읍푸푸, 읍푸푸, 읍푸푸……”

  걸려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나오려는데, 들어오는 사람과 딱 마주쳤다. 다름 아닌 임요환이었다.

  “어…… 일어났어, 형?”
  “으응. 일찍 일어났네. 아직 다 자는데.”
  “어, 어제 일찍 잤잖아.”
  “그래.”

  그리고 윤열은 나왔고, 요환은 욕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려고 할 때, 윤열이 돌아보며 요환을 불렀다.

  “요환이형!”
  “응, 왜?”

  그러자 문을 닫으려던 요환은 문고리를 잡은 채, 그러나 문을 더 열지는 않은 채 윤열을 보며 대답했다.

  “형……”
  “말해봐.”

  윤열이 반쯤 보이는 요환의 눈을 보며 말했다.

  “형, 경기 나갈거야?”

  그러자 요환이 문을 조금 더 열며 말했다.

  “너는?”
  “……”

  윤열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건 요환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너무도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침묵이었다.

  “……좀더 생각해보고 이야기하자.”

  그렇게 말하고 요환은 욕실 문을 닫고 들어갔다. 윤열은 닫힌 문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물끄러미 욕실 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올때까지 오래도록 그렇게.


2005년 5월 6일 오후 3시
서울특별시 잠실종합병원 병실

  “그럼 누가 있지?”

  용호가 물었다.

  “글쎄. 나도 지금 누구누구가 모였는지는 잘 모르겠어. 나도 바로 병원으로 왔거든. 어쨌든 우리팀에서는 진호, 정석이, 정민이, 길섭이, 민구 정도.”
  “그렇구나.”
  “모두 다 모였을지는 몰라. 프로게이머들 애들중에 잠적한 애도 꽤 될거야.”
  “그렇겠지.”

  강민은 속으로 난감해했다. 용호는 팔이 잘리는 큰 중상을 입었다지만, 자신은 왼쪽 손가락 4개가 삐는 아주 약한 부상만을 입은 상태였다. 스타크래프트를 하기에는 불가능한 부상이지만, 언젠가는 회복될 부상이었다. 이런 부담스러운 상황을 피해갈 아주 적절한 명분을 너무도 손쉽게 얻은 것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용호 옆에 있는 것도 부끄럽고, 다른 선수들을 볼 면목도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어느 곳도 바늘방석이었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게 가장 큰 문제겠네.”
  “그래. 그렇지……”
  “제발, 별거 아닌 초보들이었으면 좋겠는데…… 설마 우리만큼 하는 고수들이겠어?”
  “그래, 제발 아니길 바래야지. 누구든지 지면 바로 죽는 상황이니까.”
  “대체, 그 외계인들이 스타를 어떻게 아는거야?”

  그러나 강민이 훗 하고 웃었다.

  “글쎄, 모르지.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 자체가 외계에서 온 것일수도 있지. 블리자드라는 회사에서 외계로부터 받은 게임…… 그래서 그렇게 재미있고 흡인력도 있고, 그랬던 거 아닐까?”
  “누가 몽상가 아니랠까봐…… 그런데 그럴듯도 한데, 형?”
  “근데 그렇게 생각하면, 그쪽이 스타 원조라는 이야기잖아. 그 가설은 아니길 바래야겠다.”
  “그래, 그러진 말아야지.”

  그러면서 조용호는 병원 천장을 쳐다봤다. 그리고 난데없에 강민에게 질문을 던졌다.

  “형, 내가 다시 스타를 할수 있을까?”

  순간 당황한 강민은 잠시 머뭇거렸다. 곤란한 질문만 하는 녀석, 하고 생각하며 언뜻 생각난 예로 대답했다.

  “으, 으응? 할수 있어, 용호야. 옛날에 그 시각장애인인데 스타하는 사람 있었잖아. 그 사람도 스타하는데 너도 잘 할수 있을거야.”
  “아, 그랬지? 요환이형이랑 게임하던 그 사람…… 진짜 신기하더라.”
  
  강민은 또 괜한말 했나 싶어 말실수한거 없나 다시 되짚어보았다. 그때 용호가 말을 이었다.

  “이제 난 악수도 왼손으로 해야겠네. 그치?”



2005년 5월 6일  오후 7시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시청앞 서울광장


  벌써 주어진 48 시간 중에 21시간 가까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시청 앞 광장에 있는 거대한 대형 전광판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날이 저물어가고 주위가 어둑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전광판에는 1, 2, 3, 4, 5의 숫자만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왜 아직도 한 명도 없지……?”
  “대체 뭣들 하고 있는거야??”

  시청 앞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둘씩 걱정스레 우려를 터뜨리고 있었다. 물론 쉽게 나설 수 없고,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자리이긴 했지만, 거기에는 자기 자신들의 목숨 또한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시청 앞 광장에는 거의 5만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월드컵 당시 12만명이 모인 것을 생각하면, 축제 분위기도 아니며 아직 하루 전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파가 몰려든 것이다.

  “여러분!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프로게이머들이 도망치거나 하지 않고, 모두 모여서 어떤 선수가 출전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 회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많아지자 그것을 통제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어떤 소속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상 같은 것을 만들고 마이크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시청앞 광장에는 고출력의 스피커들이 요소요소에 설치되어, 그의 이야기가 시청앞 광장 모든 사람에게 똑똑히 들렸다.

  “그들을 믿어봅시다! 어차피 지금 인류에게 희망은 오로지 그들뿐입니다. 내일 밤 12시에 경기가 시작됩니다. 그때까지 선수들을 믿어봅시다!”

  그의 이야기가 옳다고 생각했는지, 한참 술렁이던 사람들의 반응은 잦아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들의 불안이 커지는 것은 어쩔수 없는 사실이었다.
  전광판을 빤히 쳐다보며 한숨짓던 한 아가씨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가, 옆에 있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잘 되겠죠?”
  “……”

  옆의 사람은 대답없이 모자를 눌러쓴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몹시 걱정스럽고 어두운 표정이었다. 하긴 그런 사람이 이 주위에 한둘은 아니었지만서도.

  “이봐요, 힘내세요. 저는 스타같은거 잘 몰라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을 믿어요. 그 사람들이 잘 해 줄거에요. 비록 그들이 지더라도,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건 사람들이니까, 비록 목숨을 잃어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
  “그들로서는 최선을 다한거죠.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것을 믿는 것 뿐이죠.”

  그러자 그 희망없이 고개를 숙이던 청년은 조용히 우물거렸다.

  “믿는다라……”
  “그래요, 같이 한번 믿어보자고요.”

  그녀는 입을 앙다물며 눈으로 웃어보았다. 모자를 쓰고 있던 그 청년도 고개를 한번 살짝 끄덕였다.

  “그런데, 그쪽은 스타 할줄 아세요?”
  “아, 예. 뭐 조금 하긴 하는데……”
  “정말요? 우와, 정말 잘됐다! 그럼 저좀 가르쳐 주세요. 뭐 어떻게 봐야 하는거에요?”

  아가씨의 반응과 곤란한 질문에 청년은 당황해했다. 요즘 젊은 남자치고 스타 모르는 사람이 많지 않을텐데…… 그리고 스타라는게 말로만 설명될 수 있는게 아닌데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저, 그게, 아무것도 없이 하기에는 좀 그런데요. 말로만 하기에는 좀 어려워서요……”
  “그럼 뭐가 필요한데요?”
  “스타크래프트 게임이 필요한데……”
  “아하! 그래요?”

  그러더니 그녀는 옆에 가지고 온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지금 저 노트북에 스타 가져왔어요. 이게 꼭 있어야 하는줄 알고요. 그런데 그냥 TV 중계 보는거라는 거 알고 얼마나 민망했는데요.”
  “잘 됐네요. 마우스는 없죠? 괜찮아요. 터치패드라도 스타가 어떤 건지 가르쳐 드리는데는 문제 없습니다.”

  시청앞 광장 한복판에서, 두 사람은 조그마한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전히 전광판은 그 어떤 선수의 이름도 없는 시커먼 여백이었고, 주위는 더욱 칠흙같은 어둠으로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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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6일 밤 10시
서울특별시 SKT T1 숙소

  오후부터 길고 지루한 회의가 계속되었다. 회의에 지쳐서, T1 연습실에서 스타크래프트를 켜고 하는 프로게이머들도 있었다. 그것이라도 해야 마음이 안정되고 잠시나마 걱정과 근심을 잊을 수 있는 이들이었다.
  회의의 분위기는 갈수록 암울해져만 갔다. 무엇보다, 어젯 밤에 너댓 명의 프로게이머들이 더 사라졌다. 정수영 감독은 그 중의 한명이 홍진호라는 사실이 너무도 실망스러웠고, 또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는지. 그동안 그렇게 오랜 세월을 최고의 자리에 앉지 못했어도 한번도 포기한다거나 낙담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 선수였는데. 이렇게 훌쩍 떠나버릴 아이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그 마음의 부담감과 괴로움이 얼마나 컸으면 그럴 수 밖에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안쓰럽고 이해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홍진호의 빈 자리는 상상외로 컸다. 그가 선수로 출전하지 않더라도, 경력 많은 선배 프로게이머인 그의 부재 자체가 후배나 동료 게이머에게는 충격이었으며 사기 저하의 원인이었다. 이제 24시간이 지난 지금, 선수들을 독촉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때문에 감독들이 모였다. 감독들이 모두 모여도 7명뿐이었다. 나머지 4명의 감독들도 모두 변고를 당하거나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팬택 앤 큐리텔 송호창 감독이 운을 뗐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자기 혼자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아이들에게는 고문일 수 있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그 선택을 도와주는게 현명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송 감독이 독한 마음을 먹고 이야기했다. 몇몇의 감독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호창 감독은 내친 김에 더 말하기로 했다.

  “그리고, 처음 말씀드렸다시피 이제는 시간이 없습니다. 기다리는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차라리, 어서 선수 엔트리를 결정시키고 그들에게 약간의 시간이나마 연습을 시키는 것이 지금 상태에서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경기에 들어선다면 그 긴장감과 부담감에 경기에 패할 지도 모릅니다……”

  경기에 지는 끔찍한 상황을 언급하게 되자, 송 감독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예, 송호창 감독님 말씀이 맞습니다. 고통스럽겠지만, 지금은 우리 감독들이 용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소울팀의 김은동 감독이 말을 받았다. 아까 고개를 끄덕인 감독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지금 결정을 하는 것이 정말 옳을까요……?”

  주훈 감독이 걱정스레 말했다. 사고로 최연성, 박용욱 두 명의 선수를 잃고, 박태민마저 부상당해버린 지금 가장 낙담하고 있는 감독 중의 하나였다.

  “주 감독.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건 자네가 잘 알잖나.”

  송 감독이 안타까움을 내비치며 이야기했다.

  “자, 자, 짝 짝 짝.”

  그 때 KTF 정수영 감독이 박수를 치며 주위를 정돈했다.

  “그럼 한번 구체적으로 이야기들을 해 보도록 합시다. 어느 팀의 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시오?”
  “제 생각에는……”

  정수영 감독이 묻자, 송호창 감독이 뒤이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때,

  “잠깐만요.”

  이제까지 조용히 있던 한빛 이재균 감독이 입을 열었다.

  “<칼레의 시민> 이라고 아십니까?”

  이재균 감독이 물었다. 그러자 감독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제가 다시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칼레는 프랑스의 조그마한 항구도시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 때, 이 도시는 영국군에게 완강히 저항하다가 결국 함락되고 맙니다. 영국은 많은 시간적, 물질적 피해를 입힌 이 칼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기로 마음먹지요.”

  잠시 손에 들고 있던 물잔을 만지작거리며, 이재균 감독은 말을 이었다.

  “그 때, 영국군이 잔인한 조건을 제시합니다. 칼레의 시민을 대표해서 6명이 목숨을 내어 놓는다면, 다른 모든 사람을 살려 주겠다는 조건을 말이지요. 칼레의 시민들은 한편으로는 안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민했습니다. 누구를 내보내느냐, 누구를 죽음으로 내모느냐에 대해서요. 결국 그들은 투표로 그것을 결정하기로 합니다.”

  그러면서 이재균 감독은 송호창 감독을 한번 보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이 떳떳하지 못하다고 여긴, 당시 칼레의 시장과, 귀족, 부호 등 6명이 죽음을 자처하고 나섭니다. 상대적으로 상류 계층에 있는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이들은 당당히 목에 밧줄을 걸고 나아갑니다. 이 사람들의 희생과, 그 고뇌를 표현하기 위해 작가 로댕이 조각을 남기기도 했지요.”

  이재균 감독은 탁자에 물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정리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선수들을 조금만 더 믿어보자는 겁니다. 그들은 한 분야에 있어서 세계 최고에 있는 이들입니다. 저는 감독생활동안 한번도 제가 선수들보다 우월하다거나 위에 있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 분야에서 ‘최고’를 이루어낸 권위자들이고, 장인들입니다. 그런 그들인 만큼, 그들은 스스로 떳떳한 선택을 해 낼 것입니다.”

  이재균 감독의 말이 끝나자, 감독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 숙연한 이야기에, 그리고 그 선수들을 향한 깊은 신뢰에 무슨 대꾸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 거짓말처럼 감독들이 있던 방의 문이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일제히 감독들은 그 쪽을 돌아보았다. 한 명의 선수가 그들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또렷이 이야기했다.

  “제가 출전하겠습니다.”



2005년 5월 6일 밤 11시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시청 앞 서울광장


  청년은 정신없이 스타크래프트를 옆의 아가씨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아가씨는 똑똑해서 무척 이해가 빨랐다.

  “아, 그래서 언덕 위에서 공격하는 것이 훨씬 유리한 것이로군요.”
  “예. 보통 전쟁의 개념과 똑같다고 생각하시면 되요. 그러면 소수 병력으로도 다수 병력을 방어할 수가 있게 되는 거죠.”
  “재밌다…… 이런건 다 어디서 배우셨어요?”

  ‘요즘 젊은이치고 스타 모르는사람 거의 없다’ 라는 말을 해주려다가 청년은 참았다.

  “그냥, 혼자 많이 했어요. 자, 그럼 다음엔……”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주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니, 무척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고, 커다란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 바람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은 북새통에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했다.

  “아유, 무슨 일이죠, 이게?”
  “그……글쎄요. 일어나세요.”

  청년은 먼저 일어나서 아가씨를 잡아 일으켰다. 아가씨는 노트북을 한 손에 안고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으세……”
  “엇, 저기, 저기 보세요!!!”

  청년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가씨가 놀란 얼굴로 전광판을 가리켰다. 그러자 청년도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바라봤다.

  “아……”

  청년이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거기엔 1. 이라는 숫자 옆에 첫 번째 선수가 나와 있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아가씨는 알아보지 못할 글귀로, 깜빡거리고 있었다.



< [ReD]Na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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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17 00:10
수정 아이콘
이거 볼수있는곳 없을까요......?
스트라포트경
05/08/17 00:13
수정 아이콘
아 진짜 잼있슴다~~~!!! 아 또 이런 소설에 빠지면 이상해 질텐데.... 워낙 소설같은데 잘빠져서.... 그래도 어쩔수 없이 보게 되네요... ^^
방방곡곡_국어
05/08/17 00:29
수정 아이콘
베스트 명장면 중의 하나인 6화 마지막...... <[ReD]NaDa>
우오!!!!
방방곡곡_국어
05/08/17 00:29
수정 아이콘
그나저나 46화 좀 빨리 연재를;;;
하얀조약돌
05/08/17 02:16
수정 아이콘
오~ 전 20화 부터 봐서 서운 했는데....
첫회부터 보니까 너무 좋네요^^
이야~ 마지막에 [ReD]NaDa 는 전율이네요^^
05/08/17 08:56
수정 아이콘
XX님이 살아서 정말정말 다행이라는..ㅠ_ㅠ
아케미
05/08/17 09:14
수정 아이콘
예술이네요T_T 왜 이걸 더 빨리 찾아서 보지 못했을까요.
05/08/17 09:31
수정 아이콘
45화에서 연재가 멈춘듯...
김명진
05/08/17 13:13
수정 아이콘
Emperor of Terran <-멋지군요 하하
김명진
05/08/17 13:13
수정 아이콘
제발 부탁 드립니다.
홍진호.. 살려주세요
한동욱최고V
05/08/17 17:46
수정 아이콘
와 멋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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