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1/09/05 22:15:32
Name 헥스밤
Subject 후배가 결혼하다.

궂은 날씨에 손님도 없고 출근도 귀찮았던 여름의 끝자락에, 동아리 후배에게 문자가 왔다. 다음 달에 결혼을 한단다. 잠깐 기분이 묘해졌다. 사랑, 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나이를 지나, 단골 술집이 없어지는 사건을 겪는 나이를 지나, 일상을 벗어나는 일들도 결국 일상 안에 있다는 깨달음을 느끼게 되는 나이를 지나, 결국 후배가 결혼하는 나이까지 왔다. 괜히 유난스럽나,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후배라고 해 봐야, 재수를 한 후배니 뭐 나이는 같을텐데. 아니, 빠른 생일이라고 했었나. 뭐, 잘 기억나지 않아요.

동아리의 전통에 따라 동아리 친구들과 모여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한단다. 나야 가게에 매여있는 몸이니 저녁 먹으러 나가진 못하겠고, 청첩장은 적당히 내 동기에게 주렴. 아니면 뭐 저녁 먹고 애들하고 잠깐 가게 들르든가. 하고 답장했다. 이십대의 끝자락에 위태하게 걸쳐있는, 이제 결혼도 하는 녀석에게 애들이라니. 멋적은 일이다.

그렇게 며칠 전, 오랜만에 애들을 만났다. 한 명의 동기녀석과, 한 분의 누님과, 다섯 명의 애들을.

가게로 들어오는 녀석들을 보며 푸핫 웃음이 났다. 뭐야. 십년 전이랑 변한 게 없잖아. 엄청나게 명랑하던 후배 김양은 여전히 명랑했다. 너랑 언제 마지막으로 봤더라. 아.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였구나. 요즘 뭐하고 지내니? 백조요. 아. 여전히 고시공부 중이신가. 오빠 저 한달전에 라식해서 술 못마시니까 무알콜 만들어줘요, 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여기 무알콜같은거 없으니까 걍 도수 낮은거 마셔. 한달이나 되었는데 뭔 상관이람'이라고 대답했다. 십여년 전에 고스로리 패션을 자랑하던 다른 김양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내일 모래 서른인 고스로리라. 그나저나 파워 다이어트에 성공했군. 나는 다이어트 그런거 포기했는데. 독한년. 언론고시 준비한다고? 힘내라. 그나저나 다이어트 건은 정말로 부럽군. 괜찮은 애들 보이면 동아리에 납치해야지, 하는 야심을 가지고 되도 않게 과반 학생회 활동을 하다가 내 눈에 든 불쌍한 박양은 원한 대로 교사가 되었다. 나름 SES의 유진을 닮은 깔끔한 미인상이었는데, 여전하군. 남고 국어선생이라고? 인기 좋겠네. 일은 할만해? 라는 내 질문에 그녀는 대학 시절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전혀' 라고 깔끔하게 대답했다. 짜증만 늘고, 애들은 말을 듣지 않고. 몇 달 전엔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허어라, 예쁘고 성격좋은 고등학교 교사인 애인을 차는 멍청이도 다 있구나.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권양. 권양 역시 박양처럼, 나의 '동아리 납치 프로젝트'에 희생된 녀석이었다. 과반학생회 후배였고, 어쩌다 보니 과 후배가 되기도 했고, 생각해보니 사는 동네도 비슷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몇번 집 앞에 있는 공원을 걷다가 마주친 적이 있었지. 수업도 몇 개 같이 들었겠구나. 아쉽게도 그닥 친하지는 못했다. 술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다가, 한때 내가 그녀의 친구와 좋지 않은 염문이 나기도 했으니까. 집 방향이 같은 덕에 동아리 회식이 끝나고 같이 몇 번 택시를 탄 적이 있었지. 언젠가의 택시 안에서 그녀는 내게 그녀의 친구와 관련된 내 연애사와 관련하여 '왜 그랬어요?'라고 물었던 적도 있는 것 같다. 뭐라고 대답했더라. 뭐라 대답할 말이 있었을까. 잘 기억나지 않아요.

어쩌다 보니 당시 후배들이 전부 여자였던 덕에, 내가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그녀들은 졸업하고 취직 준비를 하고 해서 참 만난 적이 적었다. 몇 번 정도 있었겠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모두에겐 모두의 삶이 있고 거기에 충실하는 것으로도 인생은 지나치게 바쁘니까. 잠깐 모두의 삶이 서로의 삶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는 즐거웠나. 그렇게 묻는다면 뭐라 대답할 말이 있을까. 즐거웠던 것 같기도 하다. 동아리가 즐겁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지금은? 글쎄. 뭐. 다들 잘 사는 것 같고 변한 건 하나도 없고 다들 너무 예쁘고 귀여운데 게다가 나는 괜찮은 술을 만들 줄 아는 바텐더이니 즐거워야지. 그때도 즐거웠고 지금도 즐거운 것 같고. 그때도 나는 이랬고 지금도 이러고. 자네들도 변한 건 없는데. 근데 무엇이 문제이길래 인생은 이 모양일까.

그래도 그렇게라도 이렇게 만나게 되니 모두들 반갑네. 한 달 코앞에 온 결혼 준비는 뭐 잘 되고 있겠지. 언젠가는 오늘 모인 사람 중 다른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될 거고, 그때 또 한번 볼 수 있겠구나. 모두들 그때까지 잘 살아있기를. 아니 뭐 당장 한달 후 결혼식날 볼 수도 있겠구나. 다들 피곤하고 바빠도 그 날은 즐거울 수 있겠지. 푸후. 잘 버티자.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9-07 12:27)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mapthesoul
11/09/05 22:35
수정 아이콘
헥스밤 님의 가게를 찾아가면 술과 함께 이런 얘기들도 조곤조곤 같이 나눌 수 있는 건가요? ^^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클레멘타인
11/09/05 23:08
수정 아이콘
모두의 삶이 서로의 삶이었던 시절이라... 아련하네요.
레이드
11/09/05 23:25
수정 아이콘
사람은, 미래를 꿈꾸고 현재를 살아가지만 이야기하는 것은 과거뿐이라.. 모든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때론 변하지 않았으면 하고도 바라게 됩니다.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번 가게에 가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네요.
11/09/06 00:05
수정 아이콘
어딘가에 도착했다고 생각했을 때쯤이면 또 어디론가로 가야한다는, 그리고 가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산다는 게 항상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가치파괴자
11/09/06 00:23
수정 아이콘
글에서 추억의 냄새가 납니다
11/09/06 09:26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글을 쓰신거같아요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아요:)
어렴풋한 추억들을 떠올리게하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m]
빈울이
11/09/06 11:39
수정 아이콘
저도 오랜만에 동아리 사람들과 오랜만에 새벽까지 달리다 이제 일어났네요.
그리고 이제 몇년이 조금 더 지나면 글쓴분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살겠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400 살아가는 이야기. [60] 로즈마리7002 11/09/13 7002
1399 그 때 그 날 - 예고편 [15] 눈시BB4491 11/09/10 4491
1398 (09)등급별 종족 벨런스 [19] 김연우7065 09/01/19 7065
1397 (09)어제의 MSL의 조지명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메세지... [28] 피터피터7996 09/01/09 7996
1396 (09)테저전 메카닉의 트릭... (테란 메카닉의 새로운 패러다임) [7] 피터피터6162 09/01/01 6162
1395 (08)제2멀티로 보는 향후 관전 포인트 [22] 김연우6663 08/11/28 6663
1394 (08)관대한 세금, 인정넘치던 나라 이야기 [38] happyend6400 08/11/14 6400
1393 (08)[서양화 읽기] 우키요에와 서양미술의 만남 1편 [15] 불같은 강속구9510 08/10/20 9510
1392 딸아이의 3번째 생일 [20] 영혼의공원4929 11/09/08 4929
1391 (08)그때는 몰랐던 것들 [7] 탈퇴한 회원5005 08/10/18 5005
1390 (08)임진왜란은 화약전쟁 [52] happyend7782 08/09/19 7782
1389 [경제이야기?] 복지는 세금으로한다. 그런데 우리는 세금을 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 [19] sungsik5418 11/09/06 5418
1388 후배가 결혼하다. [7] 헥스밤9401 11/09/05 9401
1387 지하철 그녀 [10] 크로우7492 11/09/05 7492
1386 (08)천재(天才)가 서역(西域)으로 떠나기 이틀 전... [42] The xian8165 08/11/07 8165
1385 (08)소소한 답사이야기)잊혀진 신화를 찾아 익산으로 [10] happyend4299 08/08/31 4299
1384 [잡담] 글쓰기 버튼에 관한 잡설 [2] 28살 2학년3347 11/09/04 3347
1383 레바논 전 보고 느낀 점 적어봅니다 [38] 생선가게 고양이7031 11/09/03 7031
1382 [연애학개론] 밀당의 기본 [35] youngwon6944 11/09/02 6944
1381 단종애사 - 4. 숙부와 고립무원의 조카 [26] 눈시BB4025 11/09/02 4025
1380 SKY92님 불판 모음집 [11] OrBef4214 11/09/04 4214
1379 lol, 리그 오브 레전드)euphoria의 챔프 가이드 이모저모 #1 Range AD편 (2/2) [18] Euphoria4239 11/08/22 4239
1378 [해외축구]아스날, 클럽의 구심점과 치고 나갈 타이밍. [63] 대한민국질럿6396 11/09/02 6396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