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2/09/17 02:57:38
Name 아휘
Subject [잡글]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 ---어느 게이머에게
무작정 'write'에 클릭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위의 문장을 자판으로 두드리고 나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담배 한 가치의 시간만큼 망설이다가 다시 자판을 두드리는 중이다, 지금의 나는.

원래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고 했었다.
비탈리 카네프스키의 영화제목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내겐 꽤 각별한 제목이었다.
지난 4월 어느 무렵부터인가 저 제목을 달고 글을 쓰려고 했으니까.

뭐, 대단한 글은 아니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한 프로게이머를 위한 '대책 없는' 연가 따위였다.
제법 구색을 맞추기 위해, '인물論'이랍시고
대학시절 작품론, 작가론 과제 준비를 하듯
그동안 지겹게 봐왔던 vod를 다시 찾아보고 중요한 순간을 돌려보면서
노트와 포스트잇에 메모까지 하면서, ...
그랬더랬다.

그러다가 글이 막혔다.
먹고 살기 바쁜데, 그것두 글로 먹고 살고 있는 판에,
먹고 사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글을 왜,
도대체 왜, 쓰나.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무엇보다 그 글이 그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갔다.
아마도 내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과는 부적절하기 이를 데 없는,
'꼴리는 대로 사느냐 망가지면서 사느냐'의 문제로 하던 일을 잠시 쉬고 있을 무렵이었을 거다.
그가 스타를 접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접는다'는 서술어가  꽤 지독하게, 혹은 잔인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가슴 한 구석이 접히는 느낌이었다.
'빈집털이'를 당해 게임에 진 어느 프로게이머, 그리고 그의 팬이 진짜 '빈집털이'를 당한 것처럼.

결국,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라는 제목의 글은 마침표를 찍지 못하게 된 거였다.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심지어 그 글의 주인공인 그조차 알지 못하는 글에 불과하지만,
아주 조금, 아니 많이, 아쉬워 했던 것 같다.
물론, 혼자서만.

그것 보다 아쉬웠던 건, 더 말할 것도 없이
그의 플레이를 볼 수 없다는 거였다.
더 이상 메딕으로 히드라의 진로를 가로막으며 퉁퉁포 무빙샷으로 녹여버리는 탱크를,
더 이상 '내 멋대로 사는 삶'의 극치를 과시하는 폭주족인 듯한 벌처 쌩까기를,
더 이상 '남이야 뭐라든 내 갈 길 간다'는 듯한 배짱 투넥서스를,
볼 수 없다는 것, 그 자체가 아쉬웠다.
그리고 그리워 할 것 같았다.
심지어 그렇게 보기 싫었던 그의 지는 모습조차도 그리울 것만 같았다.
윗니로 입술을 깨물며 패배 이후의 독기를 삭이는 모습이 꿈에라도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시 시간은 흘러갔다.
팬카페의 글을 보니 그는 여전히 잘 살고 있는 것 같았고,
역시 내가 재단한 그의 모습 그대로 그 선택을 믿고 있었다.
어떤 선택이든, 그 선택의 의미는 선택 이후의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기특하게도, 혹은 애석하게도
그는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아직도 '갖다 박는다'는 식의 방송 부적합 언어를 선사하며 해설을 하고 있었고,
여전히 동료선수를 비방하는 글에 꼿꼿한 벼슬을 세우며 '쌈닭'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다만 갈수록 살이 빠지는 게 괜시리 맘이 쓰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뭐
달리 보면 '댄디'하게 여겨져 좋았더랬다.
그런 그를 보면서 씨익 웃고 말았다.
괜한 감상에 젖어 팬이랍시고 안타까워 했던 내가 민망하다 못해 쪽팔릴 정도였다.
역시 그는 그의 아이디대로 살고 있었던 거다.
결코 얼거나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그는 '게으른 천재'가 아니었을까.
타고난 감각으로 '빨'을 세우는, 또 그래야만 선두에 설 수 있는,
그 감각이 흔들리는 순간, 모든 것이 뒤틀려버리는.
그 감각 하나에만 몰두하기에 그의 가슴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그는 '게임'보다 '사람'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또한 좋아하는 그 만큼 절망하는 '엄살'을 부릴 줄 알기 때문에,
'프로'게이머가 될 수 없는, 혹은 되지 않는 족속이 아닐까.

기실 나는, 그의 게임보다는 그의
'옳지 않다고 믿는 것에 과감하게 달려들어 끝까지 붙어 싸울 줄 아는' 근성과
'얼굴 안 보인다고 막 사는 인간들이 싫다며 네티켓을 강조하는' 예의를,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과 '태도'를 좋아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나의 억측일지도 모른다.
내 멋대로 생각하고, 내 어느 구석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모습과 동일시 하고, 감정이입을 하고,
촌스런 팬덤에 젖은 건 아니었을까.
단 한 번도 함께 술잔 기울여 본 적 없기에, 늘 그렇게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을 하거나 막 돼먹은 팬이기를 자처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또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결실의 계절에 어울리는 낭보가 들려왔다.
그가 다른 게임의 예선을 톨과했다는 소식이었다.
혹시나, 역시나.
전 게임을 '랜덤'으로 소화했단다.
하나만 파기에 그의 감성은 너무도 '멀티'한 탓이리라.
그게 어느 순간, 또 다시 최고의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 다움,이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것 하나를 두고 '부활'이라는 엄청난 어휘를 갖다 붙일 수는 없을 게다.
그 어휘는 나중을 위해 아껴두기로 한다.
어쨌거나 큰 무대에 한 번 서야 하지 않겠는가.
그 바닥이나 이 바닥이나, 세상의 그 어떤 바닥이나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되'어야만 한다는 빌어먹을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발이지 그는 정상에 선 표범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봐야 몇 살 더 먹지도 않았지만, 사회생활 좀 해봤다고 조언의 탈을 쓴 어줍잖은 썰을 팬으로서의 기대와 희망이라 바꿔 말하며 박박 우기고 있다.

아니, 아니다.
부활이건 '재활'이건 뭔 상관인가.
그가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
그 게임을 내가 볼 수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행복이라며
그게 팬의 본분이라며, 나직이
나 자신에게 속삭여 본다.
그는 그답게 살아가는데 나는 전혀 나답지 않게
소박하고 점잖은 팬인 척 굴고 있다.
뭐, 어쩌겠나.
내 안의 반, 아니 49%쯤은 정말이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잡글]이란 말머리를 달고 말았지만,
애초에 쓰려고 했던 방향과 내용과는 많이 달랐지만,
결국 다 쓰고 말았다.
쓰다 보니, 참 많은 '배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모습을 통해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는 것.
반성적 사유, 자기 성찰, 그런 것들.
예전엔 참 목숨처럼 여기고 살았던 것들을
먹고 산다는 핑계로 '미필적 고의'로 잊고 살았던 것 같다.
그게 고마워서라도
그와 술잔을 나눌 그 어느 시간을 비워두어야겠다.



By 아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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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atheia
02/09/17 04:48
수정 아이콘
좋은 팬을 두신 그분은, 퍽 기쁘시겠습니다. ^^
02/09/17 08:19
수정 아이콘
김동준 선수는 이런 팬이 있으시니 기쁘시겠군요 ^^ 저 역시 팬이지만요^^
생의한가운데.
02/09/17 09:17
수정 아이콘
정말 사랑하는맘을 가지신 팬"
아파님의 글을보면서 항상느껴오던것을
아휘님의 글 속에서도 느낄수 있겠네요.
정민선수나 루키님, 행복한 분들이세요.
생각나는 또 다른님의 행복한 선수....yellow 진호선수.
저역시 본진 노멀티로 좋아하는 선수가 있지만
님들 만큼의 애정을 갖고 있다고 말할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가끔씩 멀티자리 찿아보려 기웃거려보지만 아직은 본진자원으로
버텨보려합니다. 떨어지면...gg치고 나가야 겠습니다.
좋은 하루들 되세요^ ^--
02/09/17 10:54
수정 아이콘
저두 첨 98년 하이텔 개오동에서 루키님 팬 된 후로 ^^ 정말 좋아 하는 선수랍니다. 이번 워3 리그 김동준님 응원하면서 재밌게 볼 랍니다.
랜덤 종족 그게 김동준 선수의 스탈이겠죠. ^^
02/09/17 11:00
수정 아이콘
멋진 글이네요. ^^
icarus-guy[pgr]
02/09/17 11:30
수정 아이콘
요거는 어때요? (*♡_♡)/ ~♡ 이러면 마음을 나타낼수 있겠죠 !! ^^;;
02/09/17 12:15
수정 아이콘
안녕하세요 homy 입니다.
전 아휘님 글을 다시 볼수 있어 반갑네요. ^^
좋은 하루 되세요.
목마른땅
02/09/17 12:28
수정 아이콘
^^ 아휘님의 글을 다시 볼 수 있는걸 보면, 아직도 pgr21은 살아있는가 봅니다.. 김동준 선수의 해설이나 플레이를 보면 그와 함께 일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게합니다. 그의 정의감, 행동력, 화끈한 성격 등등은 게임계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십분 발휘될 수 있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저의 생각 역시 아휘님 말씀대로, 저 혼자만의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02/09/17 12:30
수정 아이콘
솔직히.. 기대 하고 있습니다..
김동준 선수의 경기를 한 겜도 못 본 사람으로써..
그리고 김선수가 하는 표현들을 흥미 있게 보는 사람으로써.. 말이죠
02/09/17 12:47
수정 아이콘
아휘님! ~♡ (너무 주책인가? 무지무지 방가워서 ^^)
오랫만입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니까 잘 지내셨지요? 이젠 놓치기 전에 아휘님 홈피 얼릉 회원 가입 해 놔야지~ ^^ 안 쫓아 내실거죠?
루키선수는 직접 본 적은 한번도 없지만, 아파님 말씀 듣고 정말 훌륭한 젊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휘님, 만약 루키선수와 술 한잔 자리 만드시면, 저도 끼워 주세요? 아휘님 좋아하는 양주, 국산으로, 우유와 함께, 그 정도만 제가 부담할께요. ^^ 꼭이요?
여친도 잘 계시죠? (아휘님 나타나시니까 pgr에서 제가 좋아하는 분들 한꺼번에 뵙네요. 잘 안보이시던 아파님까지... ^^ 모두모두 좋은 하루 되십시오~)
02/09/17 12:54
수정 아이콘
저 역시 루키 선수가 대활약할 시에 스타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아휘 님의 글을 보니 무척 기대가 되는군요^^;
수시아
02/09/17 13:11
수정 아이콘
이 곳에서 헛생각(?)하는 맛을 진하게 느끼도록 해 주시는 분들 중에 한 분이 오랜만에 써주신 글 고맙네요...거기에 제가 프리챌배를 기억할 수 밖에 없던 선수에 관한 것이라 더욱 ...
02/09/17 18:47
수정 아이콘
"그가 스타를 접는다는 소식을 접했다."..글중에 이 문장을 보고 아..[N2]Rookie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가슴이 울컥 했습니다. 이젠 그의 워크래프트 3를 기대해야겠지요. 어느 방송사든 N2루키 스페셜...그의 지난 VOD를 모아, 루키 자신의 설명과 함께...을 했으면 하네요. 오리지날시절부터의 스타크래프트 경험, 뒷예기들과 함께..
02/09/18 09:49
수정 아이콘
하이텔 게오동 브루드워 게시판 담당자였던 루키님. 다른 게이머들을 알기도 전에 먼저 알았기에 원초적인(?)정이 갈 수밖에 없는... 당대의 고수들과의 대전 경험을 게시판에 올리던 루키님. 그 당시엔 단지 레더 고수였을 뿐인데, 제가 한참의 공백후, 직장 다니다 보게된 게임채널에서 프로게이머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는...
02/09/20 07:53
수정 아이콘
근데, 이 멋진 글이 아직도 추천게시판으로 못 가고 있네요?
추천게시판으로 추천하기 운동 벌여야 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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