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예선 통과는 외모라던데, 똥만 남은 PGR, 똥이 넘치는 인도 배낭여행의 예선 통과는 뉴델리역이다.

한국으로 치면 뉴델리역은 서울역이지 않을까 싶다.

여행자 거리로 유명한 방콕의 카오산로드처럼 인도에도 뉴델리역 건너편에는 여행자 거리 '빠하르간지'가 있다.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 사기꾼들이 넘실대는 곳이 뉴델리역이다.
보통 델리로 인도 배낭여행을 오게 되면 국민 루트로 기차여행을 먼저 시작을 하는데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뜯기고 시작하는 여기는 인크레더블 인디아!

오죽하면 인도 대사관에서 사기유형을 안내해주면서 속지 말라고 공문을 정기적으로 보내는데도 속는 게 이 나라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여긴 분명 21세기인 걸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도 델리는 소들이 지나다니고 길가에는 똥이 넘실대고 거리를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도 있고 그나마 양반은 12월에 쪼리를 신고 다니는 현지인들이다. 똥을 주워서 연료로 쓰려고 육교에 말려놓은 장면도 간혹 보인다. 20세기의 릭샤도 보이는 것은 다반사.

'델리 사람들은 베이징의 시민들을 부러워한다'라는 스쳐지나면서 본 뉴스 제목처럼 마스크 없이는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매연이 심한 도시가 이곳이다.


엊그제 빠하르간지에서 처음 만난 동행 누님은 네팔 ABC(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치고 왔다고 하는데 첫 인도여행에 아주 들떠있었다.

며칠 후 이 누님은 인도 남성들과 사진을 찍게 되면서 슴만튀 및 여러 성추행을 당하면서 첫 수수하던 모습은 다크템플러처럼 사라지고 낭랑 18세도 아닌데 '18! 18!'주문을 외치고 있었다.

이날 부러 난 이 누님의 별명을 욕쟁이 누님으로 지어주었다.

인도 배낭여행을 오게 되면 현지인들이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인도 사람에게 물어보니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과 사진을 찍으면 복이 온다라나 뭐라나.


하여튼 욕쟁이 누님의 대활약으로 뉴델리역 사기꾼들의 말을 모두 무시하고 첫 기차행 티켓팅을 획득했다.

성추행 사건으로 누님의 전투력은 100%를 향해있었다. '누구든 와라 걸리기만 하면 뚝배기 깨버린다!'라는 살기가 느껴졌다.

그날 저녁 MSG 하나도 안 보태고 자전거보다 느린 기차를 타고 자이살메르에 도착했다.



인도 배낭여행 5일차.

여기는 골드시티라고 불리는 자이살메르.

지하 도미토리에서 어두컴컴한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욕쟁이 누님은 슬리핑 기차에서 고생했다며 10달러 방에서 홀로 자고 있고 난 여행예산을 아끼겠다고 3달러 지하실 도미토리를 택한 것이 문제였다. 인도 한달 배낭여행 예산은 80만원이었다.

어젯밤에 한 침대에서 강력한 애정행각을 보이던 동남아 커플의 매너로 잠을 설쳤고 새벽부터 샤워하는 외국형님 때문에 잠에서 깼다.

조그마한 시골 마을, 자이살메르의 새벽은 추웠고 고요했다.

창문 하나 없는 지하 도미토리에서 난 이게 새벽인지 지하실이라서 어두운 것인지 마치 예전 창문 없는 고시원에 지내던 시절이 생각났다. 오늘 하루는 다 잤다며 날씨를 확인하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간 것이 발단이 되었다.

동네를 비추는 오래된 전봇대의 불빛 몇 개가 전부인 곳.

우연히 하늘을 보니 수천 개의 별들이 눈에 보였다. 난 빛을 피해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보기 위해 마을 외곽도로를 홀로이 걷기 시작했다.

어제 가이드북을 보니깐 동네 호수가 있다는 내용이 생각나서 이왕 잠도 깬 김에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마을에서 걸어서 대략 30분 남짓.

인도에선 광견병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는데 동네 똥개가 나오든지 말든지 난 겁도 없이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하며 걸었다.

시골에서 자란 나지만 이렇게 고요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다.
새벽에 우는 닭 소리도 술에 취해서 걷는 사람도 없다. 여긴 인도니깐.

사실 오늘의 이벤트는 오후에 사막 사파리 투어였는데 갑자기 동네 호수에서 일출 보기라니!

뭔가 꼬여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항상 여행에 오면 일출 일몰은 꼭 보기때문에 이 유혹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호수에 막상 도착하니 '음매'를 외치며 누워있는 소들과 먹을거리를 찾는 동네 똥개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호수는 정말 어두컴컴하고 주변은 너무 고요했다. 그저 난 구석진 자리에 가서 오늘의 태양이 떠오르길 기다렸다.

아프리카 사파리를 연상케 하는 지평선 너머로 귀엽고 둥글둥글한 태양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었다.

"어때요? 참 쉽죠?"라고 말하는 밥 로스 아저씨처럼 태양이 떠오르면서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고요하고 넓은 이 호수엔 오로지 나만을 위한 공간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