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도,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사실 아무리 읽어도 못 알아듣는 게 태반이긴 합니다. 하지만 시제1호만큼은 비범하게 시작해서 낮설게 휘몰아치다가 마지막에 대칭을 이루면서 시상을 갈무리하는 전개가 아주 느낌 있어서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습니다. 오감도는 이것 말고도 14편(역단, 위독까지 합치면 35편)이나 더 있지만 교육에서든 매체에서든 대부분은 시제1호만 소개하고 넘어가는데, 이건 1호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시가 1호라는 점도 작용했을 겁니다.
그럼 오감도의 간판스타인 시제1호는 알아듣기 쉬운가? 라고 묻는다면, 쉽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해석하는 맛은 있다고 답하겠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런지 보여드리기 위해 아래에 실제로 해석을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만, 본래 시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고 달라야 하니 이게 정확한 해석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애초에 제가 만들어낸 해석도 아니고 99%는 국문학 전공하신 홍승진 교수님의 해석인데, 이게 같은 학교의 권영민 교수님 해석이랑은 또 조금 다르거든요.
어쨌든 시를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한자를 한글로 고친 버전입니다. 이것도 그대로 놔두면 너무 무서워요..) --------------------------------------------------------------------------------------------------------------------- 오감도 시제일호
(길은뚤닌골목이라도적당하오.) 십삼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야도좃소. --------------------------------------------------------------------------------------------------------------------- 읽어 보면, 조감도에서 새 조(鳥)를 까마귀 오(烏)로 바꿔서 오감도입니다. 즉 까마귀의 눈으로 내려다본 모습(Crow's Eye View)입니다. 의미심장하게도 한자를 보면 조(鳥)에서 오(烏)로 바뀌면서 눈에 해당하는 획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눈이 이상한 새의 시선으로 본다는 의미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럼 첫 행부터 보겠습니다.
[ 십삼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 →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 (길은막달은골목이적당하오.) ] → 까마귀의 눈으로 보니, 그 길은 막다른 골목이어야 되겠습니다. 13인의 아해가 달리던 도로가 막다른 골목으로 변합니다.
[ 제일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 → 이름은 알 수 없는 제1의 아해가 무섭답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질주하고 있는데 막다른 골목이니 무서운 듯합니다.
[ 제이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 → 이름은 알 수 없는 제2의 아해가 무섭답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질주하고 있는데 막다른 골목이니 무서운 듯합니다.
[ 제삼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 → 이름은 알 수 없는 제3의 아해가 무섭답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질주하고 있는데 막다른 골목이니 무서운 듯합니다.
[ 제사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 → 이름은 알 수 없는 제4의 아해가 무섭답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질주하고 있는데 막다른 골목이니 무서운 듯합니다.
[ 제오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 → 이름은 알 수 없는 제5의 아해가 무섭답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질주하고 있는데 막다른 골목이니 무서운 듯합니다.
[ 제육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 → 이름은 알 수 없는 제6의 아해가 무섭답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질주하고 있는데 막다른 골목이니 무서운 듯합니다.
[ 제칠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 → 이름은 알 수 없는 제7의 아해가 무섭답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질주하고 있는데 막다른 골목이니 무서운 듯합니다.
[ 제팔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 → 이름은 알 수 없는 제8의 아해가 무섭답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질주하고 있는데 막다른 골목이니 무서운 듯합니다.
[ 제구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 → 이름은 알 수 없는 제9의 아해가 무섭답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질주하고 있는데 막다른 골목이니 무서운 듯합니다.
[ 제십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 → 이름은 알 수 없는 제10의 아해가 무섭답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질주하고 있는데 막다른 골목이니 무서운 듯합니다.
[ 제십일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 → 이름은 알 수 없는 제11의 아해가 무섭답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질주하고 있는데 막다른 골목이니 무서운 듯합니다.
[ 제십이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 → 이름은 알 수 없는 제12의 아해가 무섭답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질주하고 있는데 막다른 골목이니 무서운 듯합니다.
[ 제십삼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 → 이름은 알 수 없는 제13의 아해가 무섭답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질주하고 있는데 막다른 골목이니 무서운 듯합니다.
이쯤 되면, 왜 똑같은 말을 계속하는지가 궁금해집니다. 이유는, 똑같기 때문입니다. 굳이 하나하나 보여줘 봤자 양상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3명의 아해가 전부 소개되었음에도 숫자로만 식별이 가능합니다. → 결국, 아해들 모두가 획일화되고 수치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십삼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러케뿐이모혓소.(다른사정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 → 아해들이 무섭다고 그랬는데, 알고 보니 무서운(남에게 두려움을 주는) 아해도 있었고 무서워하는(남에 의해 두려움에 떠는) 아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섭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 아해는 없습니다. 이분법적입니다. 왜 무서워지고 무서워하는지, 언제부터 무서웠고 무서워했는지, 그런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가 서로 다른 아해인지, 혹은 한 아해라도 무서운 동시에 무서워할 수 있는 것인지, 그런 것조차 알 수는 없습니다. 이미 무섭고 무서워하면서 질주해야만 하는 굴레에 빠져든 이상,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으니까요.
[ 그중에일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좃소. ] → 13인의 아해 중 하나가 무서운 아해일 수 있습니다.
[ 그중에이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좃소. ] → 13인의 아해 중 둘이 무서운 아해일 수 있습니다.
[ 그중에이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좃소. ] → 13인의 아해 중 둘이 무서워하는 아해일 수 있습니다.
[ 그중에일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좃소. ] → 13인의 아해 중 하나가 무서워하는 아해일 수 있습니다.
결국 13인의 아해들은 모두 무섭거나 무서워하고 있고, 몇 명이 무섭고 몇 명이 무서워하는지는 알 수 없으며, 모든 아해가 무섭거나 모든 아해가 무서워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왜냐하면 앞에서 보았듯이 13인의 아해들은 숫자로만 구별될 뿐 양태가 전부 똑같기 때문입니다.
[ (길은뚤닌골목이라도적당하오.) ] → 이 길은 이제 막다른 골목이 아니어도 되겠습니다. 13인의 아해가 달리던 막다른 골목이 뚫린 골목으로 변합니다. 이제는 모든 아해들이 자기들끼리 무섭게 하고 또 무서워하기 때문에, 막다른 골목을 배치하여 공포를 조장할 필요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막다른 골목이 없어졌음에도, 길은 여전히 막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 십삼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야도좃소. ] → 이제 13인의 아해들은 질주조차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질주하지 않아도 이미 공포의 굴레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무엇 때문에 질주하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렸습니다. 질주하면 막힘없이 달릴 수 있지만 달리지도 않습니다. 오랫동안 목줄에 묶였던 개가 줄이 사라져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결국 이 시는 함정에 빠져버린 13인의 아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동질적이고 숫자로만 식별되지만, 그럼에도 자기들끼리 무섭게 하고 또 무서워하며 이질감을 느낍니다. 그런 공포의 와중에 처음 무서움이 촉발되었던 원인은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리고, 아해들은 목표의식조차 잃어버린 채 끝없는 상호 공포작용에 빠져 방향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무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역시 현실과의 연관을 고려해서 찾아야 하는데, 다양한 선택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근대성의 폐해를 들 수 있습니다. 획일화되고 수치화된 아해들은 근대사회에서 숫자로 재단되는 개인을 연상시키고, 아해들의 질주는 조금이라도 더 높은 숫자를 얻기 위한 무한경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당초 경쟁에 참여했던 목적은 잃어버리고 경쟁자들에 대한 적대감과 위기감만 나날이 커져가는 상황이 이 시에서 포착한 함정의 내용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물론,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고 물어보면 이 시에서는 답할 수가 없겠죠. 하지만 어떤 질문들은 던지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법이고, 문제제기를 의도했다면 이런 방식은 상당히 성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야 오감도 시제1호를 좋아하니까 이렇게 보는 것이겠지만요.
아무튼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볼 수 있는데, 이걸 듣고서 시를 다시 읽게 되면 새로운 향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도요.
TMI. 오감도 시제1호에서 아해들이 왜 13명인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본문에서 이유를 찾아본다면 [ 제N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가 딱 13글자라서 처음 발견하면 막 전율이 흐릅니다. 제10의 아해까지 쓴 뒤에 연을 바꾼 것도 글자수가 하나 늘어나기 때문으로 보이고요. 그런가 하면 이상의 다른 작품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는 견해 역시 존재하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궁금해하시는 분이 계시면 여기에 대해서도 글을 하나 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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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아해가 무서운 이유는 그를 무서워하는 아해가 있기 때문이죠. 그럼 왜 무서워하는가. 그건 무서워하는 사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타인의 공포가 바로 공포의 이유입니다. 이쯤 되면 다른 사정은 그뿐인 문제가 됩니다. 시시콜콜한 개개인의 사정이 아니라 현대인의 공포 그 자체가 조감의 대상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