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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0/06/14 20:11:35 |
Name |
zeros |
Subject |
Mr.Waiting - 2 |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난 벤치에 앉아있었다. 흐릿한 눈엔 가끔씩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이 남기는 긴 꼬리가 비쳤다. 어지러움에 눈을 감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건만 시계방향으로 도는 세상이 어지러웠다. 삼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배 속의 음식물들을 게워냈다. 누군가 노래했던 것처럼 나의 온 세상은 유리알 속이었고 난 마치 점쟁이라도 된 듯 그 유리알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맥주 두 캔과 과자 한 봉지. 우린 나란히 앉아있었다. 이미 하늘은 검푸르렀건만 이름 모를 꼬마 몇몇이 아직 저만치서 놀고 있었다. 난 이미 며칠 전에 그녀에게 그 오랜 시간 품어왔던 내 마음을 말한 상태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고 우린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10월 어느 가을 밤 그 자리에서 만난 것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나 정말 많이 생각했었어. 이런 일로 상담해 보기도 처음이었고.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럼 넌 옛날부터 나를 계속 좋아해왔다는 거야?"
"응. 나 사실 고등학교 때 다른 사람 만나기도 했었거든. 근데 그 때 느낀거야.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너와의 공통점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그걸 알아버리니까 더 이상 그 사람을 만날 수가 없더라."
"으응."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난 초조함에 담배를 물었다. 담배가 다 타들어 갈 때까지도 그녀는 말이 없었다. 담뱃갑을 열어 한대 더 꺼내려 할 때 그녀가 말했다.
"너.. 나한테 조금 더 시간을 주면 안되?"
그녀가 내 마음을 받아주기만 한다면, 아니 그녀가 나로 인해 고민을 해주기라도 한다면 시간 따위는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응. 얼마정도나 드릴까?"
"음.. 다음주 토요일. 그 때 우리 영화라도 하나 보자. 나도 그 때쯤이면 대답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래. 알았다."
우리 둘 다 누가 먼저 일어설지 망설이는 듯 했다.
잠시 말도 안되는 상상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졌다.
"이거. 무슨 게임같아."
"무슨 게임?"
그녀가 물었다.
"게임 같은 거 보면 그렇잖아. 마지막 보스를 물리치러 가기 전에 나타나는 중간보스 같은 거. 나 지금 그런 기분이야."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내 생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길게 느껴진 일주일이 지났다.
우리는 영화를 보기위해 만났다. 영화 제목은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영화를 보는 내내 나 또한 저 주인공들처럼 행복할 수 있길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뒤에도, 커피숖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탔던 버스 안에서 조차 그녀는 말이 없었다. 어느 덧 그녀의 집 앞까지 와 있었다. 나의 초조함은 극에 다다른 상태였다. 왜 그녀는 이렇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걸까.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지은아."
"응."
"너 오늘 나한테 뭐 얘기해주려고 만나자고 했던 거 아니었어?"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불안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 저번에 그랬잖아. 중간보스 얘기."
"응."
"일단은 클리어 한 것 같아."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
"야. 또 말하게 하지마. 나 이런 거 부끄럽단 말이야."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온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잠시 그 폭발하는 듯한 눈부심을 느끼고 난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 나 아직 수험생 신분이라 너에게 얼마나 잘해 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볼께."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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