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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5/28 03:27:34
Name Bar Sur
Subject [글] 토막 (2)
  - 낮부엉이 씨의 방문 2  

  이를테면 면도를 하는 것은 사소하기는 하지만 분명한 인격의 수양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아마 있겠지.) 나 역시 그 말이 동의하고 있다. 면도를 하는 건 고만고만한 멋내기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투철한 의식과 철학을 필요로 한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것을 미리 이미지로서 머리 속에 기억해두고 나면, 셰이빙 크림을 바르고 머리 속에서 이미 생각해 두었던 이미지에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겹치며 신경을 집중한다. 그리고 어떤 선험적인 재능에 의지하여 수맥을 찾듯 수염을 깎아나간다.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라, 과정에 깃드는 의식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에 매력이 있다.

  게다가 면도를 하기 전에 새 면도기를 구입했다면 더욱 정신을 또렷히 해야한다. 새 것을 피부와 수염에 길들이는 것은 연애를 하는 것보다 세심한 주의와 참을성이 필요하다. 게다가 셰이빙 크림이 없어 부득이 비누거품을 써야한다면......... 어쩌고 저쩌고......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아, 기억났다. 분명 새로 구입한 면도기와 셰이빙 크림 때문이다. 제기랄.

  

  그 날 밤, 낮부엉이 씨가 우리 집에 방문했었다.

  낮부엉이 씨의 방문은 언제나 그렇듯이 그럴듯한 구두 발자국 소리와 함께 휙휙 돌리는 지팡이(혹은 우산, 회중 시계)와 함께 시작된다. 뚜벅, 휙, 뚜벅, 휙, 뚜벅, 휙........

  똑똑ㅡ, 마침 우리집은 벨이 고장난 상황이어서 그는 직접 현관문을 지팡이로 두들기는 모양이었다.

  '어쩐다.....'

  나는 곤혹스러웠다. 이를테면 낮부엉이 씨와 관련되어 좋은 결과가 나왔다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과거에 한차례 나 역시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던가. 지난 번에 불쾌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뜨뜻 미지근한 분노를 삼켰다.

  하지만 결국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고, 그는 예의 상호호환성이 없는 비대칭의 얼굴로 히죽 웃어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아, 혹시 전에 뵌 적이 있던가요?"

  "아뇨. 처음 뵙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는 최대한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굳이 그와 구면이라는 것을 밝힌다 해도 유쾌한 일은 없을 것이다. 다음 순간, 그는 몸 어딘가에서 슬쩍 사각의 상자를 꺼냈다. 검은 포장지로 덮혀있는 상품처럼 보였다.

  "괜찮으시겠죠? 분명 선생님께도 그리 귀찮은 일은 아닐겁니다."

  "물론 그러시겠죠. 그건 뭡니까?"

  "면도기와 크림입니다. 분명 필요하실 거라 생각해서. 저희 회사에서 이번에 나온 최신형입니다. 촉감이나 성능이나 죽여주죠. 가장 중요한 건, 그리 비싸지 않다는 겁니다."

  그는 간결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물론 뒷말이 더 길기는 했지만.  

  "예를 들면 면도는 단순한 세안 작업이 아닙니다. 이건 엄밀하게 말해서 인격의 수양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는 도구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그렇다고 해서 너무 부담갖지는 마십쇼. 무턱대고 찾아오기는 했지만, 전 얄팍한 술수나 부리는 외판원이 아니니까요. 어디까지나 저는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만 그 물건을 팔고 있습니다."

  "물론 그러시겠죠."

  나는 한껏 비꼼을 담아 말했지만, 낮부엉이 씨는 좀처럼 그런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쓰는 면도기와 셰이빙 크림도 충분히 잘 맞구요......"

  내 반응이 심드렁하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다시 한 번 히죽 웃어보이더니 또 한 번 몸 어딘가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보였다.

  "좋습니다. 그럼 특별히 이것까지 드리겠습니다. 이게 뭔지는 아시겠죠? 요즘 대박이잖습니까."

  "오오!"

  나는 탄성을 질렀다. 그가 내게 슬쩍 보여준 것은 조루증에 걸린 종마를 단박에 불끈불끈 하게 만든다고 하는 전설의(까진 아니지만..) 66년산 월남 당근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불그스름한 빛깔부터 심상치 않았다. 정말이지 매력적이군.


  어느 사이엔가 나는 그가 건넨 면도기 세트와 당근을 받아들고 말았다. 아니, 돈까지 벌써 그에게 쥐어줘버린 모양이다.


  "선생님. 정말 훌륭하십니다. 깔끔하게 면도하고 나가시면 단 번에 고양이 같은 애인도 생길 겁니다. 아, 내일은 바다사자 아주머니 가게에 가시면 특별 할인 기간으로 100원에 가오리 맛 알사탕을 팔고 있으니 꼭 가보시길. 그럼 안녕히ㅡㅡ."


  낮부엉이 씨는 돌아갔고 나는 집에 남아서 한 동안 내 행동에 대해서 고민에 빠졌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결과부터 말해서 낮부엉이 씨가 판 면도기는 분명 좋은 제품이었다. 박하향의 셰이빙 크림도 괜찮았다. 하지만 나는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다시는 낮부엉이 씨 따위와는 상종하지 않으리라.


  대체 조루증에 걸린 종마를 낫게 하는 당근이 내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대체 왜 나는 이런 것에 넘어가고 말았던가.


  쳇, 면도는 인격의 수양 따위가 아니다. 그건 그저 쓰잘데기 없는 신체와 시간의 소모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면도 따위 대충대충 하며 살고 말리라. 그렇게 다짐했다.(다짐했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되지도 않겠지만.)




  ps. 토막은 말 그대로 토막 이야기입니다. 이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길이는 그리 길지 않을 겁니다. 가볍게 읽고 가볍게 넘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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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츠하시
04/05/28 03:30
수정 아이콘
가볍게 읽으라고 하시고선 무언가가 숨겨놓으시고! 아 머리아퍼요. ㅠ_ㅠ
뭔가가 의미하는게 있을 듯한데요?
초콜렛
04/05/28 03:48
수정 아이콘
토막 2편, 재밌네요.
어쩐지 1편보다 가볍고 발랄한데요~^^
i_random
04/05/28 07:54
수정 아이콘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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