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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4/20 01:48:06
Name 如是我聞
Subject [일반] 이게 그거였구나 (수정됨)
예전에 제 할아버지 이야기를 썼었습니다.
https://pgr21.net../freedom/58817
일제시대 학생운동하셨고, 좌익이셔서 6.25 때 학살당하신 분이었죠.

휴전 뒤에도, 저희 집안은 연좌제로 꽤 고통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40년대생이신데, 그 시절에는 번듯한 곳 취업 요건 가운데 하나가 '해외 여행에 결격사유가 없는 자'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시대였기 때문에, 해외여행을 가려면 국외여행허가가 필요했죠. 그걸 기업등에서는 거름막으로 썼나봅니다.
빨갱이 아들이 이게 될리가 있나. 그래서 웬만한 곳에는 입사원서도 못 냈다죠.

결국 등록금이 싼 까닭에 갔던 교대를 나왔으니, 교사가 되셨습니다.
지금이야 교사의 인기가 괜찮지만, 그 시절에는 '할 거 없으면 공무원하고, 공무원도 못하면 선생했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죠.
지금은 달라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시절에는 평교사가 주임교사를 거쳐 교감으로 승진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주임교사만 해도 비밀취급인가가 필요했고, 빨갱이 아들은 그런게 나올리 없었다는 것. 아, 나중에 그게 풀리긴 했습니다.
그 때는 이미 동기들은 저만큼 앞서 간 뒤. 이제와서 주임교사 달아보겠다고 노력하기에는 너무 민망한 나이가 되셨다죠.
그래서 승진은 단 한번도 해보지 못하셨습니다.

또 옛날에는 3사 체육대회란게 있었답니다.
육/해/공사 사관생도들 체육대회인데, 고등학생들이 동원되어서 응원하고 박정희 대통령도 관람하던 행사였다네요.
아버지께서 교사시니까 학생들을 인솔해야 했는데, 대통령 친람행사라 신원조회를 하는 바람에 거기 걸렸답니다. 그래서 가지도 못했다죠.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실텐데, 노태우가 선거운동할 때 '보통사람'을 내세웠죠.
그래서 노태우와 보통사람들의 대화란 프로그램이 방송을 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 교육계 인사로 교총/전교조 한 사람씩 나가는데, 전교조 쪽에서 아버지께서 나가시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언제 녹화니 어디로 오시라는 연락을 받았죠. 그런데 며칠 뒤 방송국 피디에게서 전화가 와서는 녹화가 연기되었다고.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방송은 제 시간에 나왔고 아버지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앉아 있더라는.

이 얘기를 왜 쓰게 되었냐 하면....
김형욱 중정부장 시절, 중정에서 통지서 하나가 날아왔었답니다.
귀하의 국가에 대한 기여를 고려해 어쩌구 저쩌구... 할아버지 기록을 말소했다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하십니다.
그 말을 믿었는데, 삭제는 개뿔...위의 일들을 겪었답니다.
그런데 이 통지서의 사정을 짐작할 내용을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박정희와 김일성의 스파이전쟁' (정주진 지음. 북랩)이라는 책을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중정은 이북출신 고위인사에 대한 북한의 포섭공작(북한에 사는 가족을 이용)을 인지합니다.
이를 '베트남전 확대에 따른 미군의 베트남 개입을 견제하기 위한' 북한의 시도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니까 베트남전에 미국이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북한은 남한에 유격거점을 만들려 시도할 것이다.
그 사전작업으로 월북인사 가족 등에게 접근하고 있다고 본 것이죠.

이에 김형욱은 부역자 및 월북인사 가족 등을 중앙정보부로 초청, 안보정세 설명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북한의 실정을 담은 영상물 시청/ 첨단 시설 견학 후 곰탕을 점심으로 대접하면서, 북한에서 친척이 내려오면 즉시 신고하라고 했다고.

아마 저희 집은 저런데 불려갈만한 가치는 없었던 모양이고, 그냥 서면 한장으로 때웠나봅니다.
아마 그 통지서에 누구 오면 바로 신고해라는 내용이 있었을텐데-그리고 그게 핵심이었을텐데-, 우리 식구들의 눈에 그런건 들어오지 않고 우리가 듣고 싶었던 것만 기억했나봅니다.

저 멀리 미/소의 두령들이 두는 거대한 체스에 남북의 두목들이 휘말렸고, 남북 두목들의 한 수에 우리 집안은 괜히 설레었던게지요.

참고로 저 책 글쓴이의 현대사 인식은 이곳의 많은 분들이 매우 반감을 가질만합니다. 그건 그렇고, 이 책을 읽다보면, 수십년전 일급기밀이었을 내용들이 지금은 학자들이나 관심가질 자료가 되어버렸다는 걸 느낍니다.
세월은 무상한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게 옳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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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루스 노부스
25/04/20 23:51
수정 아이콘
(수정됨) 현대사와 나, 내 가족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실감할 때마다 기분이 참 묘해지곤 하죠. 저희집 같은경우는 뭐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한 게 아니니 부끄러울 것도 딱히 없다고 생각하는(가족은 가족이고 나는 나니까), 할아버지가 왜경이었던 집안입니다. 무려 김일성 일문의 고향인 평남 대동에서 경찰하다가, 해방되고 쏘오련군이 들어오면 뼈도 못 추릴테니까, 다 내팽개치고 마누라와 자식들만 이고지고 남으로 도망왔죠. 그래서, 족보도 없고, 할아버지가 이북에 있을때 본 기억으로만 조상을 기억하는. 김일성이 본관이니 족보니 하는거 다 봉건잔재라고 박살을 냈다니까, 통일후 먼 고향에 찾아가도 확인할 길은 없겠십니다. 월남후 자연스레 조병옥 산하의 경찰로 승계되셨고, 여순사건 진압에 참가했다가, 그 참상을 보고 이짓하단 오래 못살겠다고 생각하셔서 그만두고 나왔죠. 한국전쟁때는 또 잡혔다간 또 뼈도 못 추리니, 또 한번 뒤도 안 돌아보고 부산으로 도망갔고, 전쟁이 끝나고도 또 전쟁나면 또 도망와야하니 한동안 부산살다가, 몇년 지나 서울로 돌아와서 지금으로 이어지고 있네요. 그러다보니 님 가족이 겪은거 같은 고초는 겪을 일이 없었긴 하고, 경찰 나오면서 무려 남대문시장의 점포를 하나 받아 나온지라, 그걸 종잣돈 삼아 지금까지도 유복하게 살고 있긴 하네요. 할아버지가 중간에 많이 날린지라, 기댓값보단 못하긴 하지만. 역시 독립운동가는 3대가 굶고 민족반역자는 3대가 떵떵거리는건지. 그런 점에서 보면 저의 안온한 생활도 나라 팔아먹은 부분에 기댄게 있으니, 당당할 것도 없지 싶기도 하고. 그 할아버지는 생전에 애국을 참 강조하셨었죠. 할아버지의 애국은 어떤 의미였을지 궁금하긴 합니다. 이젠 물어볼 길 없지만.

혼자 산책할 때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이 생각이 종종 떠오르고, 그저께도 꽤 길게 산책할 때도 이 생각을 떠올리고 그랬는데, 이 글을 보니 풀어놔보고 싶어졌네요 후후. 서로 다른, 엇갈린 세월을 보내왔지만, 무상하기는 마찬가진거 같습니다. 그냥 어르신들 기일에 산소나 열심히 다니는 것 말고는 헛헛함 달랠길이 있나 싶긴 해요. 저는 결혼도 안했고 애도 없으니, 저 죽으면 이젠 이 이야기는 제 대에서 갈 길을 잃기도 할테구요. 조카들이 있는데, 조카들이 이런 이야기를 재밌어 할 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혀두 저러한 이야기들은 대한민국 초기사가 워낙 질곡이 심했으니 있었던 일 들이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제는 군사반란도 망치질 세번에 일단락나는 세상이 되었으니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저런 이야기는 고대의 신화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지 싶긴 합니다. 마, 기억해주면 좋고 아닌들 어차피 나 죽으면 끝인데 뭔 상관이랴 싶긴 합니다만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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