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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5/11/07 18:21:07 |
Name |
SEIJI |
Subject |
[공모-꽁트] 마우스 셋팅하던 노인 |
벌써 6개월 전이다. 내가 온게임넷에 취직한지 얼마 안되어 메가웹에 들어가 게임진행
요원으로 일할 때다. 마침 프로리그가 열리는 참이라 메가웹에 가서 진행요원 옷을 입고
일단 경기를 진행시켜야 했다.
왼쪽편 경기석 의자에 앉아서 마우스를 셋팅하던 노인이 있었다. 게임을 진행 시키기
위해 마우스를 빨리 세팅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컴퓨터 운영체제로 98을 요구하고 있었
다. 그냥 닥치고 XP에서 하면 안되냐고 했더니,
"운영체제 하나 가지고 그리 고집이시오? 싫다면 다른 데 가리다."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더 고집 부리지도 못하고 98을 깔아주며 마우스 셋팅이나
해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차코 열심히 마우스를 셋팅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제어판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만져보는가 싶더니, 저물도록 마우스를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셋팅하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시작
해달라고 해도 못 들은 체한다. 게임시간이 바쁘니 빨리 시작 해달라고 해도 통 못들은채
대꾸가 없다. 점점 중계진은 지쳐가고, 방송시간은 늘어만 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다.
더 셋팅하지 아니해도 좋으니 그만 경기 시작해 달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레어를 타야 하이브가 되지, 해쳐리가 제촉한다고 하이브가 되나?"
하면서 오히려 야단이다. 나도 기가 막혀서,
"마우스 잘만 움직이는 데 무얼 더 셋팅한단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려, 경기시간
이 없다니까."
노인은
"다른 선수 알아보시우. 난 안 하겠소."
하는 퉁명스런 대답이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경기 시간은 어차피 늦은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수 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셋팅해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볼이 빠지고 끈이 꼬인다니까. 셋팅이라는건 제대로 해놔야지.
셋팅하다가 놓으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투다.
이번에는 셋팅하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화이트보드에다 유성매직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중간광고로 블러드 캐슬만 다섯번 연
달아 내보냈다. '서지훈, DDR만 안하면...' 쓰던 매직을 도로 내려놓고, 노인은 또 다시
마우스를 셋팅하기 시작한다.
저러다가는 마우스 볼이 닳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또 얼마 후에 마우스를 들고 볼을
이리저리 손가락으로 굴려 보더니, 다 됐다고 게임 방으로 들어온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마우스다.
경기가 마치고 밤 11시쯤에 퇴근해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셋팅을 해 가지고 방송이 될 턱이 없다. 시청자 본위가 아니라 자기 본위다.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퇴근준비를 하다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 그 때, 노인이 갑자기 미소를 얼굴에 가득 머금으며 영구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어딘지 모르게 간지나 보이는, 그 바라보고 있는 옆 모습, 그리고 금방이라도 영구업ㅂ다
~ 가 터져나올것 같은 눈매와 입모양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심도 조금은 덜해진 셈이다.
집에 와서 오늘 경기 어땠느냐고 물었더니, 아내는 최고의 명경기였다며 야단이다.
그저 흔한 경기들보다 훨씬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별로 대단한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말을 들어 보면, 양 선수가 서로 공격도 안하고 대치중이면 지루하기만
하고, 서로 치고박고 해도 실수를 서로 연발하면 짜증만 날뿐이며, 그저 관광경기라면
관광당한 선수만 불쌍하다는 것이고, 요렇게 서로 치열하게 공격을 주고 받으면서도
실수하나없이 팽팽한 명경기는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에 친구들과 했던 스타 한판은, 30분 적어도 10분까지는 서로 쳐들어가지 않고 자원을
캐는데 여념이 없어 경기 시간은 항상 1시간씩 되었다. 그러나 요사이 배틀넷에서 스타
한판하려 치면, 개나 소나 벙커링을 하지 않나, 4드론 저글링을 하지 않나 해서 경기시간
이 채 10분을 넘지 못한다. 예전에는 게임을 시작할때, 서로 30분까지는 쳐들어가지 말자
고 약속을 한다음에 비로소 게임을 시작한다. 이것을 "30분 노러쉬."라고 한다.
맵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무한 맵이 대세라, 보통의 것은 미네랄 하나당 10000씩 일렬
로 쫘악 늘어서 있고, 그보다 나은것은 미네랄 하나당 50000씩 꽉꽉 들어차 있으며,
$$$$$$$$$$$ 아이스 헌터 $$$$$$$$$$$$ 라고 한것은 미네랄이 두 줄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도 있었다.
그만큼 많은 자원을 바탕으로 장시간의 플레이를 약속한것이다. 30분 노러쉬라는 말을
믿고 자원만 죽어라 캐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일단 저그가 앞
마당 먹을라 치면 테란은 죽자사자 마린 SCV우르르 달려나와 벙커링에 치즈러쉬다.
플토가 더블넥 하려 치면 저그는 죽자사자 저글링을 왕창 뽑아 넥서스를 날릴려고 안달
이다.
옛날 게이머들은 승패는 승패요, 전적은 전적이지만, 게임을 하는 그 순간만은 오직
상대와 게임을 즐긴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
하게 오랜 시간을 투자해 게임을 즐기며 드라군 8부대 대 히드라 10부대, 캐리어 15대
대 배틀 15대등의 최고의 빅게임을 만들어 냈다. 오랜 기다림덕에 그런 멋지고 화려한
장면이 나왔던 것이다. 그냥 무작정 빨리 경기를 하고 빨리 승패를 가르길 원하는 지금
과는 달리 순수하게 게임 그 자체를 즐긴 것이다.
이 마우스 셋팅도 그런 심정에서 셋팅 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무슨 프로게이머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일개 진행
요원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최고의 명경기가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 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 라면이라도 한 박스 사가지고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프로리그 하는 시간에 메가웹에 출근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와 있지 아니했다.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니 이미 팀을
옮긴지 오래라는 것이다. 짊어지고 있던 라면 한박스를 땅에 떨어트린체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라면 한박스가 금새 온데 간데 없어지는 사이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한 서점의 잡지 코너를 바라다 보았다.
수많은 잡지들중 esFORCE 창간호가 눈에 띄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렇게 웃고
있었구나. 열심히 마우스를 셋팅하다가 모니터를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
랐다.
오늘, 메가웹에 들어갔더니 선수들이 빨리 조인했다고 야단이다. 전에 경기준비가 늦어져
해설자들이 시간때울려고 뻘뻘 흘리던 생각이 난다. 그 때 하던 해설자들의 농담따먹기
를 들은지도 참 오래다. 요사이는 전적 5:5 이야기도 들을 수가 없다. 애수를 자아내던
'쓰리디 알피지의 리더~" 라는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6개월 전, 마우스를
셋팅하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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